< 보너스(3) >
프레스톤 윌슨 감독도 호세 레예스 수석 코치도 걱정했던 것은 디아고 헤밍턴과 성민의 원투펀치였다.
그렇기에 시티필드에서 벌어진 3차전은 그들을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딱!!
[쳤습니다!! 케빈 체임벌린!! 높게 뜬 타구. 좌측 담장을 크게 넘어갑니다!!]
[외야 2층 관중석 상단을 직격하는 대형 홈런입니다. 이거 비거리가 거의 450피트는 될 것 같은데요?]
[6회 초, 케빈 체임벌린의 석 점 홈런포. 5:4로 앞서나가던 경기를 8:4까지 크게 벌려놓습니다.]
시리즈 3차전.
다저스의 타선이 뻥뻥 터졌다.
애초에 정규시즌, 리그 전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타격 생산을 자랑하던 타선이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정규시즌의 그 생산성을 항상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이번 3차전만큼은 그것을 그대로 재현했다.
11:7
그렇게 다저스가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을 가져갔다.
그리고 사실상 이번 시리즈는 거기서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빌어먹을. 내가 이래서 어? 에이스 하나 영입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미 지나간 걸 탓해서 뭐 합니까. 남은 경기 어떻게든 힘 내보고, 겨울에 좀 강력하게 요청해보죠.”
“시부럴. 윗대가리는 죄다 산수도 못 하는 건지. 어? 그래 WAR로만 따지면 타자가 좋지. 그런데 걔들은 162경기 뛰고 5~6 나오는 애들이고 선발은 32~33경기 뛰고 4~5 나오는 애들이라고. 포스트시즌 와서 시리즈 7경기로 줄어들면, 거기서 에이스들은 2경기씩 나온다고 치면 이게 비교가 되냐?”
프레스톤 윌슨의 이야기처럼 포스트시즌에서 선발투수가 타자보다 중요해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타자는 에브리 데이 플레이어이지만 선발투수는 자신이 등판한 날의 경기를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심플하게 말해서 162경기 중 32~33경기는 전체의 2할이지만 7경기 중 2경기는 전체의 3할에 육박한다.
“아니, 선배 갑자기 왜 그렇게 전문가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어울리지 않게.”
“난 원래 선수 때부터 전문가적인 견지로 야구를 보는 사람이었어. 내가 너랑 같냐?”
“어휴, 그래서 그런 전문가께서 우승 반지 사이즈를 엄지발가락 사이즈로 받아 갑니까?”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야.”
4차전.
메츠가 젖먹던 힘까지 뽑아냈다.
9:7 승리.
뉴욕 메츠가 본진에서 챔피언십 시리즈 스윕 패라는 최악의 결과는 피했다.
그리고 5차전.
[LA 다저스, 5차전 선발로 4일을 쉰 디아고 헤밍턴 낙점.]
[시리즈 스코어 3:1. 시리즈를 뉴욕에서 끝내겠다는 팀 베이크 감독의 강력한 의지!!]
[디아고 헤밍턴 ‘충분히 쉬었다. 우리가 노리는 것은 이다음이다. 베이크 감독의 선택은 그런 의지의 표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하루 더 쉬고 6차전에 안전하게 내보내는 게 낫지 않나?-
-그러니까 살라만카 내보내서 5차전 승리하면 디아고 아껴서 좋은 거고, 혹시 패배해도 닷새 쉰 디아고면 더 좋은 모습으로 6차전 확실히 잡고 가는 거잖아. 이러면 혹시라도 5차전 패배하면 다저스는 디아고랑 김성민 1, 2 선발 다 쓴 상태로 월드 시리즈 시작하는 거 아님?-
-근데 이거 이기면 솔직히 베스트 시나리오이기는 하잖아. 푹 쉰 김성민 1선발로 써먹고 디아고 헤밍턴을 그대로 2선발로 써먹을 수 있고.-
-머리가 꽃밭이냐? 어떻게 가장 잘 된 경우를 생각하냐. 만약의 경우 염두에 두고 가능성으로 따져가야지.-
-근데 난 솔직히 디아고가 메츠한테 점수 많이 내주는 건 상상이 안 되는데? 얜 꾸준히 좋은 투수였지만 올해는 아예 격이 다른 느낌이었다고. 팀에 김성민이라는 라이벌이 있으니까 오기로 더 잘하는 그런 느낌?-
-확실히 승부욕이 졸라 있는 애라서 그런지, 김성민이 잘 던진 다음에는 더 잘던지는 느낌이기는 했음.-
5차전 경기가 시작됐다.
-아쉬운 표정이구나.
‘뭐, 좀 그렇긴 하죠. 여긴 시티필드잖아요.’
-그게 뭐?
‘어릴 때 메이저리그 경기 틀면 거의 절반은 여기였다고요. 덕분에 그 시절에 뭐 나중에 잘 되면 메이저에서 뛸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할 때 배경이 항상 여기였고요.’
-어차피 내년에도 메츠랑은 3경기나 있으니 그때 뛰어볼 수 있겠지.
‘그야 그렇지만, 또 포스트시즌 이렇게 사람이 꽉 찬 상태랑은 좀 다르니까요. 게다가 한국 팬들한테도 시티필드에서 뛰는 선수를 보는 건 감회가 조금 다를 거고요.’
성민과 필 니크로는 덕아웃에서 한가롭게 잡담을 나눴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그런 것을 하기에 지금 그들의 팀은 너무 강력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마음에 다저스가 보답했다.
LA 다저스의 타선은 오늘도 쉬지 않았다.
너희들은 그냥 딱 퀄리티 스타트만 해주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 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강력함.
시티필드는 절대 타자 친화적 구장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시티필드는 다저 스타디움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그것은 이번 시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저스의 야수들은 마치 이곳이 타자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맹타를 휘둘렀다.
1회 초, 5득점.
디아고 헤밍턴이 마운드에 올랐다.
그의 시선이 덕아웃에서 선수들과 노닥거리는 성민에게 잠시 꽂혔다.
1차전 8이닝 무실점.
포스트시즌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다. 하지만 성민은 보란 듯이 그보다 더 대단한 결과를 만들었다.
‘나도 그냥 더 던지게 놔뒀으면 완봉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거야.’
성민이 싫지는 않았다.
녀석은 싫어하기 힘든 성격의 사람이었으니까.
단지 성민의 피칭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그 피칭이 만든 결과를 보고 있자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경쟁심, 그리고 승부욕.
다행스럽게도 디아고 헤밍턴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런 감정을 긍정적으로 발산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
디아고 헤밍턴이 그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LA 다저스. 시리즈 5차전 11:3 완승!!]
[디아고 헤밍턴!! 7.1이닝 6피안타 1볼넷 2실점!!]
[LA 다저스 챔피언십 시리즈 4:1 승리!! 이제 남은 것은 월드 시리즈뿐.]
[디아고 헤밍턴 챔피언십 시리즈 MVP 수상!!]
-와, 요즘 다저스 진짜 미쳤네. 거의 완전체임.-
-하위권 선발이 조금 약한 거 빼고는 이건 뭐 질 것 같은 느낌도 안 드는데?-
-하위권 선발이 약한 것도 아님. 3선발인 존슨부터 5선발인 살라만카까지 평자책 3점 중후반 정도는 기대할 만한 솔리드한 투수들이야. 그냥 1, 2선발들이 미친 것뿐임.-
-에이, 그래도 다저스만 한 팀에 평자책 3점 중반대 선발이 3선발인 건 좀 약한 건 맞지.-
-리그에 150이닝 이상으로 존슨보다 평자책 낮은 투수 꼽아봐라. 양대리그 30개 팀 합쳐서 50명도 안 됨.-
-다저스 수비가 있잖아. 수비 무관으로 환산해서 보면 존슨보다 괜찮은 투수 7~80명은 될걸?-
-아이, 참. 지금 뭐 그딴 아무 상관 없는 거로 싸우고 있냐? 그것보다 지금 이렇게 되면 우리 성민이가 월시 1선발 각 아님?-
-그럴 확률이 좀 높긴 하지.-
-헛소리 ㄴㄴ함. 디아고 헤밍턴 나흘 쉬고 시티필드에서 7.1이닝 2실점 하는 거 못 봄? 어차피 월시 1차전까지 4일 쉴 수 있고 디아고 상징성도 있는데 무조건 얘가 1선발이지.-
-하긴, 디아고도 그런 쪽으로는 욕심 쩌니까. 절대 양보 안 할 것 같은데. 게다가 얘 슬슬 장기로 연장계약 묶을 때 됐잖아. 다저스가 FA 자격 얻을 때까지 놔두지는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월드시리즈인데. 나흘 쉰 디아고보다 푹 쉰 성민이가 더 좋은 투수인 건 너무 명백하잖아. 디아고 성깔 맞춰준다고 그런 짓을 하겠다고? 그게 말이 되냐?-
***
“이런 일이라면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다른 투수도 아니고 성민인데요. 전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디아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자네를 아주 존중해. 하지만 우린 벌써 3번이나 실패했고, 그 실패는 어쩌면 우리가 자네의 전성기를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만한 일이었어.”
“머저리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였죠.”
“단순히 머저리들이라고 하기는 그렇지. 지금부터 20년 전 우린 실제로 그런 일을 경험했었으니까 말이야.”
디아고 헤밍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20년 전에도 LA 다저스에는 클레이튼 커쇼라는 그와 비슷한 선수가 존재했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위대한 투수였다. 하지만 다저스는 그런 투수의 전성기에 단 한 번도 커미셔너 트로피를 가져오지 못했다.
사실 그것은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말하긴 힘들었다. 그저 그들은 그 위대한 에이스를 존중했고, 그 존중의 방식이 조금 잘못됐을 뿐이었으니까.
다저스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항상 그를 마운드에 세웠고, 그는 그것을 절대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순간에 자신이 마운드에 서는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인간의 육체에는 한계가 있다. 넘치는 의욕은 종종 그 한계를 까먹게 만들지만, 인간은 절대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어쨌거나, 전 성민을 믿습니다. 그는 좋은 동료고, 충분히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위대한 투수죠.”
“알겠네. 그러면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지.”
“그러면 전 먼저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푹 쉬고. 2차전은 무조건 자네의 차례야.”
말을 끝내고 나온 디아고 헤밍턴이 꽉 쥔 주먹을 풀었다.
손바닥에는 꾹 눌린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그에게 성민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월드 시리즈 1차전 마운드를 양보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흘을 쉬고 등판하여 7.1이닝 그리고 또 나흘을 쉰 자신보다 지난 2차전 이후 무려 8일을 쉰 성민 쪽이 훨씬 좋은 투수라는 것은 너무 명백했다.
게다가 성민은 너무 좋은 남자였다. 그의 가족들 가운데 성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 월드 시리즈 일정에 맞춰 미국으로 날아올 성민의 가족과 가족끼리의 식사 약속까지 잡을 만큼 둘의 사이는 친밀했다.
‘그래, 성민이라면.’
디아고 헤밍턴이 기꺼운 마음으로 1차전 마운드를 양보했다.
그리고 그즈음,
뉴욕 양키스가 마침내 6차전에서 디트로이트를 무너트리며 시리즈 스코어 4:2로 챔피언십 시리즈의 승리를 확정 지었다.
[김성민 월드 시리즈 1차전 선발 등판 확정!! 상대는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 욘 마르틴.]
여러모로 LA 다저스에게는 유리한 일정이었다.
디비전시리즈를 스윕 승, 챔피언십 시리즈를 4:1로 이기고 올라온 다저스와 다르게 양키스는 디비전을 5차전까지, 그리고 챔피언십 시리즈를 6차전까지 치르고 올라온 상황이었다.
정규시즌 역시 149경기 만에 우승을 확정했던 다저스와 달리 158차전까지 가서야 승리를 결정지었다.
무엇보다 가장 유리했던 점은 그들이 챔피언십 시리즈를 끝낸 이후 LA로 돌아가지 않고 뉴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번 시리즈의 홈 어드밴티지를 지닌 곳은 아메리칸리그. 게다가 어차피 상대는 뉴욕 양키스 혹은 뉴욕에서 거리상 멀지 않은 디트로이트였다. 굳이 LA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분명 원정 경기였지만, 딱히 원정 팀에게 주어지는 피로감 따위는 없는 상태에서 치러지는 1차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세계의 수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뉴욕에서의 등판이 성큼 다가왔다.
< 보너스(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