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너스(1) >
“이거 설마?”
에드 맥밀란의 질문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롤렉스.”
“와우, 이걸 나한테? 괜찮겠어? 마이크가 6회까지 공을 받았잖아.”
“걔 꺼도 하나 더 준비했어. 이미 병문안 선물로 가져다줬지. 그나저나 젠장, 남들은 퍼펙트 한 번에 롤렉스 하나라는데 이거 내가 엄청 손해 보는 거 알지?”
성민의 엄살에 옆에 있던 디아고 헤밍턴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퍼펙트에 롤렉스 두 개면 손해도 아니지. 내가 퍼펙트를 할 수 있다면 난 롤렉스 열 개도 살 수 있다고.”
“이봐 디아고, 저거 하나에 6만 달러야. 백화점에서도 못 구해서 웃돈 주고 구한 녀석들이라고.”
“그렇다면 열 개는 취소하고, 다섯 개 정도로?”
“4억짜리 계약을 할 예정인 남자가 왜 갑자기 그렇게 약한 모습이야.”
“그것도 계약을 해야 생기는 돈이죠. 에드. 난 2년 전까지 최저연봉이었고 이제야 간신히 1,000만 달러를 받아본 애송이라고요. 거기서 세금 떼고 에이전트 비용 떼고 거기다가 아이는 둘이고 LA 물가는 살인적이고. 어휴, 다섯 개면 많이 쓴 겁니다.”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롤렉스 다섯 개면 많이 쓴 건 아니지. 난 그보다 더 썼는걸.”
“뭐가? 롤렉스 두 개 산 거 아니야?”
“이거나 받아.”
“이게 뭔데?”
성민이 자신의 가방에서 오메가 시계 하나를 꺼냈다.
“이봐, 다들 이리 와 봐. 시즌 치르느라 고생들 했고, 이건 내 선물이야. 롤렉스까진 아니지만 내 성의다.”
“이게 뭐야? 웬 시계야?”
“퍼펙트 게임 기념이야. 뭐 포수만 주는 게 전통이라고는 하지만, 어디 퍼펙트 게임이 투수랑 포수만 고생한 건가? 다 같이 고생했잖아.”
“난 게임 뛰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받기 싫어?”
디아고 헤밍턴이 냉큼 시계를 받아들었다. 리셀러들에게 개당 6만 달러씩 주고 산 롤렉스까지는 아니었지만, 백화점에서 개당 4천 달러씩이나 주고 산 시계였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었어?
‘뭐 어차피, 이렇게 써도 티도 안 날 만큼 많은 돈을 벌잖아요. 그리고 짜잘한 거 몇 개 사줘봐야 기억도 안 남습니다. 이왕 쓸 거면 덩어리 큰 거로 하나씩 던져줘야죠. 이렇게 뭔갈 던져놔야 제 경기 때 조금이라도 더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162차전 경기 시작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상황.
예상 밖의 선물로 부드러워진 분위기 가운데 가벼운 잡담들이 오고 갔다.
이미 우승은 확정된 상황. 남은 162차전은 어차피 유망주 위주로 가볍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였다.
“마이크는 좀 어때?”
“어떻기는, 시즌 얼마나 남았다고, 시즌 아웃이지. 포스트시즌 아예 못 뛸 예정이야.”
“그 친구도 불쌍하네. 시즌 내내 같이 뛰었는데 결국 반지는 못 받는다니 말이야.”
“어쭈? 지금 반지는 누구한테 맡겨놓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 기세 보면 맡겨둔 거나 다름없지 뭐. 난 지금 우리가 지는 건 상상이 안 되는데?”
그리고 162차전
에드 맥밀란이 상상도 못 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다저스가 로키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6:4로 패배했다.
“이봐, 에드 너 상상력의 부족을 인정할 때가 된 것 같은데?”
“흥, 내가 출장을 안 했으니 이건 ‘우리’는 아니지.”
물론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저스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고 그들은 디비전 시리즈에 직행했다.
김성민 2033년 정규시즌
33경기 선발 등판 213.1이닝 20승 3패. ERA 2.57 209삼진 42볼넷
그리고 강력한 사이 영 후보.
[팀원 전원에게 시계를? 퍼펙트 투수 김성민의 통 큰 선물.]
[성공적인 데뷔 시즌. 김성민 신인왕은 확정적!!]
[김성민!! 가장 강력한 사이 영 경쟁자는 같은 팀의 디아고 헤밍턴?]
-롤렉스 두 개에 오메가로 38개라고? 거의 3억 아님?-
-김성민 버는 돈 생각하면 껌값이지. 쟤 연봉이 220억임. 우리로 치면 연봉 4천짜리 직장인이 동료들한테 70만 원 치 정도 크게 쏜 수준.-
-그러면 통 큰거 맞네 ㅋㅋ 나 4천 버는데 70만 원 함부로 못 씀.-
-애초에 엥겔지수가 다르잖아. 그리고 퍼펙트게임이면 거의 무슨 기념일로 삼을 만한 일이었으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그나저나 김성민 사이 영은 가능하려나?-
-글쎄, 신인왕은 확정인데 사이 영은 디아고 헤밍턴도 워낙 잘 던졌잖아. 게다가 좀 불리한 게 컵스의 토니 알렌도 성적이 꽤 좋은데 성민이랑 디아고 헤밍턴은 친 다저스 기자들 표가 좀 나뉘고 토니 알렌은 독식을 할 예정이라서.-
-아무리 그래도 토니 알렌은 들이댈 게 아니지. 걘 성민이랑 평자책 0.3점이나 차이 나잖아.-
-대신 이번 시즌 유일하게 300탈삼진 넘긴 투수지.-
-아 그놈의 삼진 타령은 진짜.-
포스트시즌이 시작됐다.
에드 맥밀란이 성민의 3이닝을 감당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회의적이었다.
“괜찮을까?”
“올스타전에서도 무사히 받았고 지난 경기에서도 잘 받았잖아. 그리고 구단에서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거야 아직 몇 이닝 안 되잖아.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라도 해봐. 선수 흔들리는 거 순식간이야. 게다가 구단도 생각이 있잖아. 애초에 에드가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면 다저스가 왜 마이크 올리버를 썼겠어.”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네.”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와일드카드로 올라온 필리스를 상대로 디아고 헤밍턴이 압도적인 피칭을 보여주었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그 경기가 저녁이 아닌 낮 시간의 다저 스타디움이었다는 점이었다.
일단 대진 자체도 당연히 디비전 시리즈에 직행한 다저스 쪽이 유리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경우 와일드카드에서 이미 그들의 에이스 카드를 소모하고 올라왔다.
물론 에이스끼리의 경기였다고 해도 디아고 헤밍턴 쪽의 무게가 훨씬 묵직했을 것이다. 하물며 필리스의 두 번째 선발인 사울 아르미스는 감히 디아고 헤밍턴에게 비할만한 투수가 아니었다.
그는 낮시간의 다저 스타디움에서 고작 3.1이닝밖에 버티지 못했다.
[LA 다저스 디비전 1차전 9:2 완승.]
[2차전 퍼펙트 투수 김성민 등판 예정.]
[21세기 이후 메이저리그에 계속됐던 퍼펙트 투수의 잔혹한 징크스. 과연 김성민은 그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마이크 올리버 시즌 아웃. 전담 포수를 잃은 김성민. 에드 맥밀란과의 호흡은 어떻게?]
-퍼펙트 할 때 보니까 별로 상관없이 잘 던지드만.-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다저스가 OPS 0.400짜리 포수 썼겠지.-
-야 0.400 아니다. 이제 0.428이다.-
-네, 마이크 올리버 씨 똥 같은 자기소개 잘 들었고요.-
-아니, 0.400이나 0.428이나.-
-다시 말하지만 난 진짜 작위적인 고구마가 싫다. 세상이 원래 탄탄대로로 가는 일은 없다지만 하필 우승 앞두고 이게 무슨 천재지변이냐.-
사람들의 걱정 속에 성민의 디비전 2차전 등판이 찾아왔다.
“성민, 마음껏 던져도 좋아.”
“이제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충분히 마음껏 던지고 있거든.”
“날 믿는 건가?”
“원래부터 믿었어. 하지만 알잖아. 너클볼이 항상 볼집으로만 받을 수 없는 거. 혹시라도 네가 손가락 삐끗이라도 하면 시즌을 치르는 상황에서 팀 전력에 너무 큰 손해 잖아. 하지만 이제 남은 경기는 몇 경기 되지도 않고, 그러니까 부디 잘 부탁한다.”
에드 맥밀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 니크로가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성민을 바라봤다.
-?
‘왜요.’
-?
‘아이참. 사람이 어떻게 항상 진실만 이야기합니까. 가끔 립 서비스도 하고 그런 거죠. 어차피 마이크는 병원에 있고 대안은 에드뿐이잖아요. 그러면 기라도 세워 줘야죠.’
-넌? 넌 괜찮으냐?
‘계속 말씀드리지만 안 괜찮을 것 없다니까요. 에드가 공을 완전히 못 받는 것도 아니고 이제 제법 잘 받잖아요. 게다가 뒤로 빠져봐야 단타예요. 마린스에서 던지던 거랑 비교하면 오히려 훨씬 괜찮은 환경이라고요.’
-하긴, 단타가 인 사이드 파크 홈런으로 이어지는 대환장파티와 비교하면 공 몇 개 뒤로 빠지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기는 하지.
‘그냥 제 마음만 잘 붙잡고 던지면 그만입니다.’
성민이 자신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증명했다.
4회 초, 원아웃 주자 2루 볼카운트 1-1의 상황.
에드 맥밀란이 존 밖으로 빠지는 너클볼을 주문했다.
-부웅!!
마이크 올리버였다면 어떻게든 잡아냈을 수준의 살짝 더 빠진 너클볼. 에드 맥밀란의 등 뒤로 야구공이 넘어갔다.
[와일드 피치!! 김성민 와일드 피치입니다!! 2루 주자 3루까지!! 3루에서!!]
포수 뒤편 벽을 맞고 튕겨 나온 야구공. 성민이 재빨리 공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마스크를 내던지고 공을 주으려던 에드 맥밀란이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3루에서 멈췄습니다. 타자는 달리지 않네요. 원아웃 주자 2루의 상황이 주자 3루로 바뀝니다. 볼카운트는 2-1.]
에드 맥밀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건 아마 와일드 피치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공을 던진 성민도 공을 받으려던 에드 맥밀란도 알고 있었다. 이건 너클볼을 잡으려는 포수라면 무조건 받아내줘야 하는 공이었다는 것을.
그런 에드 맥밀란에게 성민이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생각보다 훨씬 아무렇지 않았다.
-확실히 동엽이 자식이 1루 내야 관중석에 다이렉트로 송구했을 때와 비교하면 이건 별것도 아니긴 하지.
이어지는 아쉬운 적시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성민이 바로 그다음 타자를 병살로 깔끔하게 잡아냈다.
[김성민 선수, 비록 점수를 1점 내주기는 했지만, 아주 침착하게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보통 너클볼 투수는 아무리 좋을 때에도 그 안정감? 하여간 뭐 그런 게 좀 떨어지거든요. 이게 감독 입장에서는 굉장히 곤란한 요소에요. 중요한 경기일수록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우리 김성민 선수 같은 경우는 그렇지가 않단 말이죠. 참 써먹기 좋게 견적이 딱 나오는 투수입니다.]
7이닝을 던지면서 1실점.
성민이 자신의 몫을 확실하게 해냈다.
마린스와는 달랐다. 마린스와는.
LA 다저스는 선발투수가 자신의 몫을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해낸 것에 보답할 줄 아는 팀이었다.
[다저스 디비전 시리즈 2차전 7:2 완승!!]
다저스의 활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4차전, 5차전도 없었다.
깔끔한 3차전. 스윕승.
다저스가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상대는 지난 199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왕조’를 건설했던 뉴욕 메츠.
“젠장, 내가 이래서 어? 마케팅도 좋고 다 좋다고 좀 데리고 오자니까. 빌어먹을. 새 구단주 자식도 그렇고, 앤드류는 또 왜 이렇게 일찍 은퇴를 한 거야. 하여간 항상 마지막까지 일하는 사람만 덤탱이를 뒤집어쓴다니까.”
“에이, 야구가 좋아서 아직까지 아득바득 남았으면서 덤탱이는 무슨 덤탱입니까. 그렇게 싫으면 은퇴하던지요. 나도 감독 좀 해보게.”
“내가 은퇴하면 호세 넌 무조건 같이 은퇴다.”
“아, 제가 왜요!!”
“너 인마 나 정도 되니까 너 같은 놈을 수석이라고 데리고 있지. 니가 어디 감독을 할 깜냥이냐?”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월드 시리즈 토우 링을 가지고 있는 그 왕조의 주인공 중 하나가 덕아웃의 책임자로 LA를 밟았다.
< 보너스(1) > 끝
ⓒ 묘엽
작가의 말
작중 세계관은 제 전작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에서 이어지는 일종의 페러럴 월드입니다.
특별히 꼭 알아두셔야 할 건 없고 1998년 부터 2017년까지 메츠가 잘 나갔다는 가상의 설정 정도만 아셔도 글을 읽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