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종의 미(3) >
마이크 올리버와 달리 에드 맥밀란은 굳이 욕심을 낼 필요가 없는 위치의 남자였다.
그는 이미 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아마 지금과 같은 폼을 7~8년만 더 유지할 수 있다면 명예의 전당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욕심이 있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다. 더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에 이름을 새길 위대한 선수로 남고 싶었다.
물론 너클볼을 잡을 수 있어야만 그런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승부욕이, 실력 향상을 위한 욕구가 눈앞에 보이는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지난 7개월.
그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물론 세상일의 대부분은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역대라는 말까지는 아직 일렀지만, 현역 최고라는 말 정도는 충분히 다툴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성민, 나를 벽이다 생각하고 마음껏 던져. 오늘 공이 내 뒤로 빠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미트를 챙겨온 에드 맥밀란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그리고 7회 초,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부웅!!
“스트라잌!!”
[7회 초, 로키스의 공격. 에드 맥밀란이 74.4마일의 빠른 너클볼을 가볍게 받아냅니다.]
[지난 6회 말에 김성민 선수의 전담 포수인 마이크 올리버 선수가 주루 플레이 중 손가락 부상으로 교체됐는데요, 이게 참 곤란한 일이예요.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 김성민 선수는 ‘그걸’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다른 투수라고 해도 저런 상황에서 포수가 바뀐다면 흐름이 끊기면서 참 곤란해질 텐데 심지어 김성민 선수 같은 경우는 너클볼 투수란 말이죠. 너클볼 투수에게 전담 포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다시 말하지 않아도 이 경기를 보는 관중분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지금 에드 맥밀란 선수를 보면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지난 올스타전에서도 그렇고 이런 모습을 보면 굳이 전담포수를 따로 둘 필요가 있나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흠, 제법 안정적인데?
‘에드도 열심히 하긴 했잖아요.’
-하긴, 좀 귀찮을 정도로 공을 던져달라고 굴긴 굴었지. 코치들이 손가락 다칠 수 있다고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말이야.
‘혁준이 녀석도 저만큼 욕심이 있었다면 지금보단 훨씬 잘 됐을 텐데 말이죠.’
-그 멍청이 이야기는 하지도 마. 그냥 그 녀석 깜냥이 거기까진 거니까. 뭐 올리버 녀석도 크게 다른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에이, 올리버랑은 다르죠. 혁준이도 에드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욕이 있긴 했다고요.’
로키스의 1번 타자인 제이슨 스튜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이크 올리버가 교체될 때만 하더라도 갑자기 자신감이 팍하고 솟구쳤었다. 너클볼이 던지는 투수만큼 받는 포수도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게다가 마이크 올리버의 타격이 엉망진창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OPS가 0.400밖에 안되는 포수를 굳이 계속 전담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합리적인 추론은
-부웅!!!
“스트라잌!!!”
74.2마일의 너클볼을 연달아 받아내는 에드 맥밀란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아니, 에드 맥밀란이 이렇게 공을 잘 받는데 저딴 성적을 내는 전담 포수는 대체 왜 쓰는 거야?’
제이슨 스튜어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분명 무언가 하자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대체 세상에 어느 미친 감독이 멀쩡히 공을 잘 받는 OPS 0.891의 포수를 두고 OPS 0.400짜리 포수를 쓴단 말인가. 설사 2번째 옵션이 필요하다고 해도 리그의 평범한 대체 포수라도 OPS 0.600은 보장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OPS 0.400짜리 포수를 쓴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세 번째. 91.1마일의 속구가 존을 슬쩍 벗어났다.
볼카운트 1-2
그리고 네 번째.
에드 맥밀란이 침을 꼴깍 삼켰다.
73.9마일의 빠른 너클볼.
마이크 올리버만큼은 아니었지만, 연습을 통해 성민의 너클볼을 천 단위로 받았던 만큼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이건 성민의 표현에 따르자면 ‘잘 던진 너클볼’에 속하는 공이다.
제이슨 스튜어트가 공을 두들기는 상황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날아드는 공이 어느 쪽으로 올지 대충 예측한 곳에서 미트를 대기시켰다.
공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저 공이 에드 맥밀란이 예측한 곳으로 빨려들어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약 0.55초.
그의 시선이 야구공만을 응시했다. 공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미트를 움찔하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춤을 추는 것은 그저 현혹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공이 도달할 위치다.
제이슨 스튜어트의 방망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이다.
그 방망이의 움직임에 현혹되어 공의 움직임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공을 쫓는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부웅!!
방망이가 만들어낸 공기의 흐름 때문일까? 공이 또다시 움직인다.
지금이다.
물론, 이건 너무 과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괴물 같은 공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과한 생각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이번에도 역시 완벽하게 손바닥으로 받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
세상 어떤 일도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 블로킹, 송구, 포구, 타격 그 무엇도 처음부터 지금처럼 잘했던 것은 아니다.
정직하게 흘린 노력의 땀방울은 절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노력에 배신당해본 적 없는 천재
에드 맥밀란이 미트를 팡팡 두들기며 성민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헛스윙 삼진!! 와우, 대단합니다. 김성민 선수. 포수가 바뀌었음에도 별 상관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에드 맥밀란 선수가 정말 안정적으로 공을 받아주긴 했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 너클볼 투수가 아니더라도 포수가 바뀌면 좀 흔들릴 수 있거든요. 하물며 지금 너클볼 투수예요. 하지만 김성민 선수. 역시 흔들림이 없습니다.]
-야, 이거 뭐야? 에드 맥밀란 너클볼 개 잘 받는데?-
-얘 이렇게 너클볼 받을 수 있는데 대체 왜 지금까지 올레기 그 새끼가 성민이 전담 포수 했던 거임? 내가 매일 성민이 경기 보면서 그 새끼 타석에서 얼마나 고통받았는데.-
-와, 이렇게 되면 성민이 유일한 약점인 전담포수가 극복되는 건가? 이제 드디어 완전체 가는 거임?-
-아직 꼴랑 너클볼 세 개 받았음. 설레발 ㄴㄴ함.-
-난 다른 건 됐고, 제발 이번 경기에서 포일 같은 거로 퍼펙트가 깨지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그게 대체 무슨 시발 작위적인 고구마냐.-
필 니크로가 물었다.
-불안하지는 않으냐?
성민이 답했다.
‘불안이야 항상 불안하죠. 하지만 영감님이 말했잖습니까. 너클볼 투수는 원래 그런 거라고.’
-흥, 언제부터 그렇게 내 말을 잘 들었다고.
‘야구에 관한 건 언제나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죠. 그 외의 것은 좀 아니지만.’
공을 받는 사람은 바뀌었다. 하지만 성민에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너클볼 투수가 믿어야 하는 것은 오직 공을 던지는 자기 자신. 그리고 필요한 것은 오직 공을 던질 용기뿐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그 마음이 듬뿍 담긴 공이 2번 타자인 카를로스 페랄타의 헛스윙을 끌어냈다. 퍼펙트를 진행 중인 상황. 포수가 어이없는 이유로 바뀌었음에도 성민의 집중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예리하고 날카롭게 연마됐다.
두 번째.
에드 맥밀란이 존을 제법 벗어나는 빠른 공을 요구했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리고 그 의도는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힘없이 떠오른 타구가 좌익수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 이거지.
포수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마린스 시절 조마조마하게 공을 던지던 것보다는 편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에드 맥밀란이 공을 놓칠 가능성뿐이었다.
마린스 시절,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되고 그 안타가 실책이 되어 점수를 내줄 것을 걱정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은 여전히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성민이 집중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오직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나의 공뿐이다. 그렇게 다음 타자를 준비했다.
타석에 에드윈 필립스가 올라왔다.
[7회 초. 투아웃 타석에 로키스의 3번 타자인 에드윈 필립스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앞선 두 타석 모두 범타로 물러났었죠. 사실상 오늘 경기의 마지막 고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공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손끝의 감각만큼은 더욱 민감하게.
74.9마일.
오늘 던진 너클볼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었다.
-중지에 힘이 조금 덜 실렸다. 빠르게 던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잊지 말아라.
필 니크로가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방금 성민이 던진 너클볼의 회전수는 3.2회. 절대 나쁜 공이 아니었다. 이 잔소리는 그저 지금 성민이 보여주고 있는 날카로운 집중력이라면 그 너머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 노인의 격려였다.
-딱!!
에드윈 필립스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건드렸다.
하지만 타이밍은 약간 밀렸으며, 배트의 최적 지점 역시 상당하게 빗나갔다. 아무리 50홈런을 쳐낼 로우 파워를 갖춘 타자라고 해도 이래서는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들 수 없었다.
타구가 1루 내야 관중석을 꿰뚫었다.
볼카운트 0-1
두 번째.
몸쪽으로 깊숙하게 붙이는 속구.
사실 어려운 주문이었다.
위대한 기록까지 남은 타자는 고작 일곱 명. 자칫 잘못하면 몸에 맞는 공이라는 터무니없는 실수로 그 기록을 깨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문을 하는 에드 맥밀란도 공을 던지는 성민도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것을 염두에 뒀던 것은 오직 에드윈 필립스뿐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0-2
성민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중지에 힘이 덜 실렸었다는 필 니크로의 말은 기억에서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강하게 의식하지도 않았다. 누군가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상태였다.
초구와 비슷하게 힘찬 움직임.
성민의 손가락이 공의 움직임을 제어했다.
용기, 그리고 확신.
75.1마일.
그리고 1.6회전.
단언컨대 그것은 성민이 던진 모든 너클볼 가운데 가장 환상적인 공이었다.
리그 최고 수준의 재능을 지닌 타자 에드윈 필립스의 방망이가 그 공을 노렸다. 물론 너클볼은 노린다고 무조건 쳐낼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그가 행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는 가장 마지막까지 공을 지켜보고 공이 움직일 것이라 예상하는 방향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그런 방법으로 비록 범타라고는 하지만 꾸준히 성민의 좋은 너클볼을 두들겨왔었다.
하지만 지금 성민의 공은
더 빨랐고
더 현란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성민이 경기 21번째 아웃 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상 이번 경기의 마지막 고비였다.
[어메이징!! 어메이징 김!!]
[김성민 메이저리그 25번째 퍼펙트게임!!]
[경기 도중 부상으로 포수가 바뀌는 악재 속에서도 커리어 3번째 퍼펙트를 기록한 김성민.]
[한 투수가 3번의 퍼펙트를? 그것도 2년 사이에? 믿을 수 없는 대기록!!]
[김성민 1965년 9월 9일 샌디 쿠팩스 이후 최초!! 다저스의 역사를 다시 쓰다.]
“이거 설마?”
< 유종의 미(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