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12화 (113/287)

< 유종의 미(2) >

이전에도 설명했던 것처럼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자 대부분은 홈과 원정에서 차이가 극심하다. 그리고 그 괴리는 쿠어스필드와 다른 구장들의 파크팩터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에드윈 필립스는 조금 달랐다.

물론 그도 역시 쿠어스필드에서의 성적이 훨씬 훌륭했다. 하지만 다른 로키스의 타자들이 쿠어스필드를 벗어나면 평균 미만의 타자가 되는 것과 다르게 그는 쿠어스필드 밖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다.

넘쳐나는 재능 덕분이다.

혹자는 그가 쿠어스필드에 적합한 타격을 가져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의 커리어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다.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50홈런 이상을 쳐낼 포텐셜을 가지고 쿠어스필드에서 40홈런을 쳐내는 교타자.

-저 녀석은 행크를 닮았어.

‘행크 애런이요?’

-그래, 행크도 요즘 홈런 타자들이랑은 다르게 저런 식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곤 했지. 행크의 타구는 마치 총알처럼 쏘아졌었어.

현대 야구 이론에서 일정 이상의 로우파워가 갖춰진 타자는 몸통의 회전력을 이용하는 로테이셔널 히팅 시스템으로 어퍼 스윙을 했을 때 생산성이 극대화된다. 에드윈 필립스는 그 일정 이상의 로우 파워를 갖춘 타자였다.

하지만 그는 쿠어스필드를 홈으로 쓴다는 이유로 몸의 무게중심 이동을 이용하는 웨이트 시프트 히팅 시스템으로 레벨 스윙을 사용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

성민의 몸쪽 91마일짜리 속구를 잡아당긴 쏜살같은 타구가 머리보다 조금 높은 곳을 향해 쏘아졌다.

60년대 후반, 아직 행크 애런의 힘이 남아있던 시기, 필 니크로가 매일같이 보던 바로 그 타구였다.

-이건 아무도 못 막는 타구다.

‘영감님 제 편 맞습니까?’

아니었다.

물론 행크 애런은 위대한 홈런왕이었다.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로 755개의 홈런을 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에드윈 필립스는 행크 애런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저스의 유격수 자리에 선 페데리코 수는 제2의 안드렐톤 시몬스를 논하는 대단한 유격수였다.

사람의 머리보다 높은 높이로 날아가는 빠른 속도의 타구였다. 그냥 손을 뻗어서는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타구.

페데리코 수가 그것을 점핑 캐치로 잡아냈다.

-······?

필 니크로가 할 말을 잃었다.

괴물이다.

‘영감님 시대에 저 녀석 있었으면 행크 애런도 성적이 조금은 안 좋아졌겠네요.’

-그럴리가. 물론 저 수비는 그 빌어먹을 오즈 생각이 나게 하는 수비다. 82년에 우리의 우승을 도둑질했던 그 빌어먹을 오즈 자식도 저런 식으로 수비를 했었지. 하지만 그래도 행크는 더 특별했어. 난 두 사람을 다 경험했지만 행크였다면 아마 오즈 자식이 잡지 못할 만큼 더 쏜살같은 타구를 날렸을 거다.

‘이거, 페데리코가 직접 듣는다면 꽤 기분 좋을 이야기를 해주시네요. 아지 스미스랑 비교라니 말이죠.’

필 니크로의 입에서 역대 최고의 수비형 유격수 이름이 흘러나왔다.

방금 페데리코 수가 보여준 수비는 그만큼 대단한 수비였다. 비록 하이라이트 필름에는 다른 화려한 수비들이 더 돋보이겠지만, 어려움으로 따지자면 이 쪽이 훨씬 더 어렵다.

에드윈 필립스가 허탈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타석에서 내려갔다.

1회 초, 삼자범퇴. 그리고 공수교대.

다저스의 타선이 로키스의 투수를 신나게 두들겼다.

안타, 안타 그리고 또 안타.

제법 길었던 다저스의 1회 말 공격이 끝나고

2회 초 로키스의 공격 이닝.

정말이지 이것 이상 홀가분할 수 없는 수준의 상황에서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로키 산맥에서라면 충분히 통할만 한 타자들을 내야 땅볼로 잡아내고 로키 산맥에서도 통하기 힘든 어설픈 애송이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녀석들 ‘마린스’ 수준이군.

‘아 진짜. 이 영감님이?’

사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실력만으로 보자면 마린스보다는 나은 타자들이었다. 어찌 됐건 확장 로스터를 통해 메이저를 밟는 선수들은 최소한 KBO에 용병으로 불려오는 타자들 수준은 됐으니까.

다만 지금은 시즌 끝물이고, 이제 막 메이저에 올라와 긴장한 애송이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경기의 결과보다는 자신들의 성적이 더 중요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여기서 돋보이는 것이 내년 시즌 메이저에서 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쳐내겠다는 의욕이 빤히 보이는 타자들이 상대다. 존에서 슬쩍슬쩍 빠지는 속구로 방망이를 유인하고, 타이밍을 빼앗은 더러운 너클볼로 땅볼을 유도한다.

3회까지 삼진 6개 포함 퍼펙트.

“크, 하여간 맥밀란이 이번에 진짜 투수 하나는 기똥차게 뽑았다니까. 이 가격에 이런 투수를 3년이나 쓸 수 있다니 말이야.”

“시즌 초에는 무슨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투수한테 2,200만 달러나 쓰냐고 투덜거렸었잖아.”

“그거야 다저스 홍보팀의 홍보 부족 때문이었지. 아니 KBO에서 그렇게 잘 던진 투수라는 걸 알았으면 내가 그랬겠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무리 KBO를 박살 낸 선수라고 해도 마이너를 박살 낸 선수에게 2,200만 달러나 쓰는 것을 환영하는 팬은 드물었다. 지금 다저스의 팬들이 성민에게 환호하는 것은 그저 성민의 지난 1년이 그만큼 환상적이었다는 뜻이었다.

경기가 이어졌다.

4회, 5회. 6회. 로키스의 공격이 끝났다.

로키스의 덕아웃은 아예 의욕 자체를 잃어버렸다. 안 그래도 포스트시즌 진출이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털려버려서야 어떻게든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욕 자체가 분쇄돼버린다.

반면 다저스의 덕아웃은 흥이 오를 대로 올라왔다.

단순히 성민이 상대방을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만이 이어졌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로키스는 투수도 엉망진창이었다.

5회까지 무려 13점.

그야말로 스탯 세탁의 기회다. 다저스의 타자들이 연신 맹타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마이크 올리버가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메이저리그에 뛸 준비가 되지 않은 타자였다. 하물며 이번 시즌 LA 다저스는 평범한 메이저리그 팀도 아니다. 다저스는 리그 최강의 팀 중 하나였다.

그의 이번 시즌 성적은 다저스의 모든 타자를 통틀어 최악. 범위를 내셔널리그 모든 타자로 확장해봐도 안 좋은 의미에서 단연 돋보이는 성적이었다. 게다가 그에게 공을 던지는 성민의 타격 성적이 워낙 좋았던 바람에 안 그래도 엉망진창인 타격이 더 도드라졌다.

‘그런데 이거 좀 위험할수도.’

애초에 더블 A에서 벽에 부딪힌 이후 본인의 깜냥이 메이저리거 감인지에 의문을 품던 차에 메이저리그의 혹독함을 한 시즌 동안 경험했다. 만약 승부욕이 넘치고 도전의식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의지를 불태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이크 올리버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최대한 메이저에서 버티는 것이었다. 일단 1년을 채웠으니 기본적인 노후 연금은 일단 됐고, 당장 야구를 그만두고 뭔가를 하려면 그래도 밑천이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성민의 계약은 3년이었고, 3년 정도면 새 시작을 위한 밑천을 모을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앞으로 3년을 할 수 있을지다. 본래 너클볼 전담 포수는 너클볼을 잘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마이크 올리버의 타격 성적은 매우 심각했다. 오늘 모두가 시원하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와중에도 홀로 무안타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말이다.

[타석에 마이크 올리버, 9번 타자인 마이크 올리버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요즘 내셔널리그에는 강한 9번이라고 투수를 8번에 두고 보통 6번 정도를 치던 타자를 9번에 두는 일이 많아졌습니다만, 사실 다저스는 그런 의도로 타순을 짠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이 선수 이번 시즌 지금까지 32경기 94타석을 소화하며 0.187/0.202/0.198을 기록 중입니다.]

[참, 아쉬운 성적이에요. 물론 포수의 경우 타격 성적을 좀 덜 보는 포지션이고 너클볼을 받을 수 있는 포수가 희귀하다고는 하지만 주전 포수인 에드 맥밀란 선수의 성적과 비교하면 이게 참.]

[그나마 다행이라면 김성민 선수의 타격이 예상보다 매우 좋다는 점 정도입니다. 실제로 김성민 선수를 8번에, 마이크 올리버 선수를 9번에 둔 것으로 다저스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6회 말 다저스의 공격.

로키스가 내세운 선발투수는 진즉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두 번째로 올라온 불펜 역시 만신창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이크 올리버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공을 두들긴 마이크 올리버 본인도 깜짝 놀랐다. 타구의 질이 매우 좋았다. 마이크 올리버가 빠르게 1루를 지나 2루까지 달린다.

빠르게 더 빠르게.

공을 주워든 우익수가 2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누구 못지않게 넓은 외야의 홈구장을 사용하는 로키스의 우익수였다. 어깨 하나는 누구를 가져다 대도 부족하지 않았다.

2루를 향해 달려가던 마이크 올리버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뻐엉!!

“세이프!!”

마이크 올리버의 손가락이 2루 베이스에 먼저 닿았다. 마이크 올리버가 기록한 이번 시즌 두 번째 이루타였다. 기쁜 일이다. 0.187/0.202/0.198의 성적이 0.196/0.211/0.217로 상승했으니까. 하지만 그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오는 지독한 통증이었다.

“아악!!”

다 이긴 경기였다.

굳이 2루까지 달릴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슬라이딩을 하더라도 굳이 헤드 퍼스트를 할 이유도 없었다.

멍청한 욕심이었다.

성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옆을 떠돌던 필 니크로 역시 눈을 부릅떴다.

의료진이 서둘러 2루를 향해 달려갔다.

장갑 아래 크게 부푼 손가락이 드러났다.

-이런 멍청한!!

한눈에 봐도 당장 경기를 속행할 수 없는 손가락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늘 경기만이 아닌 앞으로 남은 모든 일정까지도.

[아, 마이크 올리버 선수, 상당히 고통이 심해 보이는데요?]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마이크 올리버의 부상이 걱정되기 때문에? 천만에.

-이런 미친. 야, 포수가 저기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왜 하는 거야.-

-와, 누가 제 놈한테 타격하라고 했어? 어차피 타격은 다른 타자들이랑 성민이가 다 하잖아. 그냥 공이나 받으면 되는데 저기서 슬라이딩을 대체 왜 하는 거야? 그것도 다 이긴 경기에서?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방망이나 붕붕 휘두르고 돌아오면 되잖아.-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 망한 거 아님? 성민이 공 받을 포수가 없잖아.-

-어쩌면 잘된 걸지도. 에드 맥밀란도 올스타전 보니까 성민이 공 잘 받더만. 본인도 평소에 받을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고. 타격 생각하면 포스트시즌에 에드 맥밀란이 붙박이 해주는 게 이득 아님?-

-근데 그거 그냥 허세잖아. 걔가 너클볼 받을 수 있었으면 지금 저 똥 같은 포수한테 계속 공받게 시켰겠냐?-

-근데 지금 당장 퍼펙트를 진행 중인데 이거 어떻게 함? 미치겠네.-

다저스의 덕아웃이 기이한 혼란으로 가득 찼다.

성민의 눈치를 보는 선수들, 마이크 올리버를 향해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은 선수들. 곤란한 표정의 코치진.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은 성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난 얼른 가서 내 너클볼용 미트 가져올게.”

< 유종의 미(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