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종의 미(1) >
149경기.
LA 다저스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 확정을 위해 필요한 경기 수였다. 다저스가 남은 경기를 모두 패배하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남은 경기를 모두 승리해도 뒤집을 수 없는 큰 차이를 고작 149경기 만에 만들어낸 것이다.
샴페인 거품이 다저스의 라커룸 안을 가득 채웠다.
보호 안경을 쓴 선수들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샴페인. 성민 역시 그들 가운데 서 있었다.
-좋으냐?
‘뭐 일단 지구 우승도 우승이잖습니까. 당연히 좋죠.’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마음인지는 잘 안다. 가끔 그런 친구들이 있었지. 우승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기 위해 빅마켓 팀으로 이동해서 커리어 말년을 불태웠던 친구들 말이다. 지금 너를 보고 있자면 그 친구들을 보는 것 같구나.
‘전 이미 우승 경험해봤거든요?’
-아마 넌 그래서 더 그런 걸 거다.
‘그래서 더 그렇다고요?’
-솔직히 마린스에서 우승했을 때 생각하면 지금 기쁜 것도 아니잖아. 그냥 햄버거를 샀는데 직원 실수로 햄버거 안에 패티가 두 장 끼워져있는 정도 기쁨 아니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분명 지구우승도 우승이긴 했지만 그리 큰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느낌이었다. 사실 지금 샴페인을 뿌리는 일 자체가 조금 호들갑이 아닌가 싶은 심정이다.
‘뭐, 아직 지구 우승이니까요. 한국이랑 다르게 여긴 다른 지구의 우승자들과도 싸우고, 그리고 아예 다른 리그. 어쩌면 정규시즌에 한 번도 싸워보지 못했던 상대까지 이겨야 진짜 우승 아닙니까. 챔피언십 시리즈, 그리고 월드 시리즈까지 승리하면 느낌이 또 다르겠죠.’
-아니, 그건 다 마린스 때문이다.
‘아니, 이 영감님은 뭔 일만 있으면 다 마린스 때문이라네. 마린스한테 뭐 돈이라도 떼먹혔습니까?’
-그게 아니라 내 말은 마린스에서 경험했던 그 우승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 말이다. 평생을 바라왔던 팀의 우승을 ‘너의 손’으로 이뤄낸 경험이었잖느냐. 이런 우승이 재미없는 건 당연하겠지.
‘잠깐만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래, 거긴 KBO였고 여긴 메이저리그잖습니까. 여기서 우승하는 건 세계 최고가 된다는 뜻이라고요.’
-글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너 지금 영 재미가 없어 보인단 말이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1인분만 하면 이길 수 있다. 야수는 공을 잡았고 타자들은 공을 쳤다. 7회에 마운드를 내려와도 안심하고 해바라기 씨나 먹으면서 승리를 챙길 수 있다.
내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도 적었다. 팀이 연패라도 하는 것 같으면 에이스인 디아고 헤밍턴이 연패를 끊어줬다.
그런데 재미가 없다고? 내가 천국에 만족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내가 마린스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됐다고?
성민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성민에게 다저스의 선수들이 샴페인을 뿌려댔다.
메이저 1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건너뛰는 경기 하나 없이 30경기에 등판하여 19승 4패. 192.1이닝 평균자책점은 2.71로 내셔널리그에서도 단 넷밖에 안 되는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활약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총 61타석에 들어서서 안타만 13개. 그중 홈런만 세 개에 2루타도 세 개 3루타까지 존재했다. 0.220의 타율은 내셔널리그 투수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고 0.704의 OPS는 내셔널리그 투수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였다.
심지어 투수 주제에 도루까지 하나 기록했다. 타자로서 적립한 WAR만 0.8이다.
강력한 사이 영 컨텐더.
그리고 거의 확정적인 투수 실버슬러거 수상자.
메이저 1년 차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대단한 성적이다. 이번 시즌 LA 다저스의 지구 우승에 성민이 기여한 바는 매우 거대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냥 지구 우승이 의외로 너무 쉽게 돼서 그런 겁니다. 포스트 시즌에 나가고 월드 시리즈까지 나가면 다를 거예요.’
성민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야기했다.
필 니크로가 그런 성민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그저 웃었다.
성민은 어디를 가더라도 제 몫을 해낼 만큼 좋은 투수다.
거기에 다저스는 좋은 팀이고, 성민은 그저 녹아드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일단 메이저리그라는 거대한 무대에 적응하는 데 이만한 무대면 충분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즌이 흘러갔다.
***
“시발!! 못 해 먹겠네. 아니 뭐 그쪽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이렇게 지랄이실까?”
“지랄? 이 애새끼가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주 미쳤구나.”
잘 나가는 팀이 있다면 못 나가는 팀도 있는 법이다.
애초에 메이저리그 팀 가운데 항상 대권에 도전하는 팀은 다저스와 양키스 정도가 전부다. 나머지 팀은 그 기간의 길고 짧음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어느 정도 리빌딩을 감수한다. 못 나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삐거덕거리는 파열음이 탱킹 도중이 아닌, ‘올해부터는 달리겠다.’하고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진 이후에 나왔을 때 발생한다.
“애새끼? 오냐오냐? 몇 년 전에 좀 잘 나갔었다는 이유로 되지도 않는 군기나 쳐 잡아대면서 누구보고 애새끼래? 댁 나보다 야구 잘해? 홈런 몇 개 쳤어? 삼루수가 유격수보다 홈런도 적게 쳐놓고 오냐오냐?”
“뭐 이 새끼야?”
“시발, 누군 욕을 못 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어디서 자꾸 새끼 새끼 거리고 있어!!”
보스턴 레드삭스는 성민을 영입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유망주는 하나둘씩 터지고 있었고 전력만으로 봤을 때 그들은 이제 슬슬 시동을 걸어야 할 시기였으니까.
작년 그들은 분명 81승을 기록하며 아쉽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올해 보스턴은 무려 8천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들여 전력을 보강했다.
하지만 시즌이 거의 끝난 지금
그들은 53승 107패라는 터무니없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FA로 영입한 선수들과 베테랑 없이 성장한 유망주들의 충돌. 그리고 터질 것 같았던 유망주들의 폭망과 FA 먹튀의 발생.
보스턴의 단장 존 맥도웰의 원형탈모는 이제 정수리를 넘어 머리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커져 버렸다.
“이대로는 절대 안 돼.”
***
시즌 161차전.
성민의 32번째 등판이 있는 날이었다.
이미 지구우승은 결정됐고, 남은 것은 성민 개인의 기록 정도였다. 마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경기장 역시 저녁의 다저 스타디움이었다. 이보다 좋은 환경은 있을 수 없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오늘 성민의 상대는 저 쿠어스에서 성민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콜로라도 로키스의 산 사나이들이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경우 이미 와일드카드를 통한 포스트시즌 진출도 물 건너간 상황이다. 게다가 홈 관중들이 보고 있는 홈경기도 아닌 원정 경기. 선수들의 사기가 높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선발 라인업에 확고한 주전이라고 할만한 선수들은 고작 다섯에 불과했다.
야구의 시즌은 농구나 미식축구와 다른 의미로 터프하다. 1년 160경기를 빽빽하게 치른 선수들의 몸이 온전할 리 만무하다. 게다가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들의 유리 몸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그들로서는 중요도도 떨어지는 이런 경기에 굳이 쑤시는 몸을 이끌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
오늘 콜로라도 로키스의 레벨은 명백히 메이저와 AAA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저스 역시 같은 문제가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저스의 경우 오늘 경기가 홈경기라는 점, 그리고 약 3만 명에 달하는 관중들이 다저 스타디움을 찾았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물론 그들 역시 완전하게 베스트 멤버는 아니었다. 하지만 선발라인업의 야수들 가운데 무려 7명이 핵심 멤버였고 나머지 2명 역시도 수비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백업들이었다. 무엇보다 다저스와 로키스의 뎁스는 그 두께가 달랐다.
선두타자 삼진 아웃.
그리고 타석에 카를로스 페랄타가 들어왔다.
지난 홈경기에 시즌 30호 홈런을 기록하며 2년 연속 30홈런+를 기록한 강타자다.
하지만 딱히 긴장은 하지 않았다.
산 사나이들의 배트가 무서운 곳은 오직 저 멀리 로키 산맥에 위치한 쿠어스필드뿐이다. 오늘 성민이 공을 던지는 곳은 다저 스타디움.
‘산에서 내려온 산 사나이들은 별것 아니지.’
작년 카를로스 페랄타가 기록한 31개의 홈런 중 원정에서 기록한 홈런은 고작 아홉 개. 올해는 그보다 더 적은 여덟 개에 불과했다.
그것은 카를로스 페랄타가 강력한 홈런 타자인 것은 오직 쿠어스필드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단순하게 계산했을 때 만약 그가 평범한 중립구장을 홈으로 쓰는 타자였다면 그의 홈런 수는 20개 미만.
‘제가 풀타임 타자로 뛰었으면 홈런 페이스가 28홈런인가 그랬죠? 그러면 조금만 무리했다면 저도 30홈런 타자급 아닙니까?’
-흥, 운 좋게 홈런 세 개 쳤다고 우쭐해서는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성민의 헛소리를 필 니크로가 코웃음으로 답해주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성민의 공이 날았다.
90.4마일의 빠른 공.
카를로스 페랄타가 그 공을 지켜봤다.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0-1
마이크 올리버가 미트를 팡팡 두들겼다.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다. 투수들의 구속과 구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시즌 막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밖에 떨어지지 않았을만큼 자신을 관리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다. 비록 메이저는 처음이지만 어쨌거나 나름의 프로리그에서 11년을 생활한 짬밥의 힘이다.
두 번째.
73.7마일의 고속 너클볼.
카를로스 페랄타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부웅!!
“스트라잌!!”
타석에서 잠시 물러난 카를로스 페랄타가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LA 다저스와 콜로라도 로키스는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소속이다. 1년에 붙는 경기만 19번. 벌써 성민과는 세 번째 만남이다. 타석수로만 따져도 여덟 타석째다. 그는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성민을 가장 많이 상대해본 타자 중 하나다.
‘시부럴. 다른 놈들은 대체 왜 저 자식을 감당 못 해서 쩔쩔매나 했는데 이건 우리 집에서 보던 거랑 완전 차원이 다르잖아.’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성민이 낯설었다.
그가 기억하는 여덟 타석은 모조리 산 동네,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인 쿠어스필드의 성민이었다. 하지만 다저 스타디움에서 보여주는 ‘잘 던진 너클볼’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겁먹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투수라도 실투는 나오는 법이다. 쿠어스필드에서 성민은 좋은 투수였지만 그들은 그런 성민을 상대로 두 경기 동안 7점을 뽑아냈다.
오늘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해낼 수 있다.
착각이었다.
-부웅!!!
세 번째.
같은 코스로 들어오는 73.8마일의 고속 너클볼.
“스트라잌!! 아웃!!”
두 타자 연속 삼진.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유종의 미(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