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10화 (111/287)

< 하반기(3) >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에드 맥밀란의 이야기에 코웃음을 치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하여간, 그놈의 허풍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줄어들지를 않는군.”

그리고 타석에 1번 타자 에노모토 코이치가 올라왔다.

한때 NPB에서는 스즈키 이치로의 재림이라고까지 불렸던 외야수로 4년 전 포스팅을 통해 MLB에 진출했다.

[타석에 뉴욕 양키스의 에노모토 코이치 선수가 올라옵니다. 앞선 타석에서 아쉽게 내야 땅볼로 물러났던 에노모토 코이치!! 과연 김성민 선수를 상대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이 선수도 기대에 비해서는 참 못 터졌던 선수입니다만, 이번 시즌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요.]

[맞습니다. 6년 총액 1억3천만으로 포스팅 피만 2,137만5천 달러나 됐었거든요.]

[개정 이후 최고 금액이었죠? 당시 양키스에서는 최대 스즈키 이치로. 최소한 올스타급의 리드 오프를 기대했고요.]

[하지만 아쉽게도 작년까지는 거기에는 조금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만, 이번 시즌은 0.287의 타율과 0.376의 훌륭한 출루율을 기록 중입니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이런 모습이야 말로 양키스가 1억 3천만을 들여 영입할 때 기대했던 모습일 겁니다. 자, 에노모토 코이치!! 과연 생소한 너클볼을 상대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에노모토 코이치가 가볍게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NPB 시절 그는 분명 스즈키 이치로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이치로 본인도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고만고만한 재능들이 모인 NPB에서의 이야기였다. MLB에서 그는 그 이치로의 마이너 카피 수준밖에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민은 방심하지 않았다.

스즈키 이치로의 타격 능력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긴 하지만 기준 자체가 3천 안타를 쳐낸 명전급 선수들을 기준으로 했을 때다. 그는 분명 10년 연속 올스타, 10년 연속 골드글러브. 그리고 신인왕 MVP 동시 수상에 어울리는 위대한 타자였다.

에노모토 코이치는 그런 남자의 마이너 카피다.

스즈키 이치로의 마이너 카피라는 별명은 절대 욕설이 될 수 없다. 본인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저 남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일지도 몰랐다.

초구.

74.3마일의 고속 너클볼.

몸쪽으로 들어올 듯 꿈틀거리던 공이 다시 바깥으로 움직였다.

에노모토 코이치가 그 공을 그냥 흘려보냈다.

-뻐엉

“스트라잌!!”

[에노모토 코이치 한 번 지켜봤습니다만 아슬아슬하게 걸쳐 들어갔습니다.]

매서운 공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리고 그 생각이 박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딱!!

높게 뜬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내야 관중석으로 빠졌다.

에노모토 코이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빨라.’

92마일짜리 속구를 던지는 건 직전 타자를 보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74마일짜리 너클볼 직후에 보는 92마일의 느낌은 또 달랐다.

에노모토 코이치가 신중하게 다음 공을 대비했다.

NPB에서는 스즈키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완성형 타자였던 에노모토 코이치였지만, MLB에서는 그 결이 크게 달랐다. 스즈키 이치로는 위대한 선수였지만, 그의 타격이론은 현대의 그것과 어울리지 않았고 효율 역시 매우 떨어졌기 때문이다.

세 번째.

61마일의 느린 너클볼.

예상했던 공이다. 타이밍을 맞출 수 있다!!

‘이런 미친?’

하지만 움직임이 예상과 다르다. 앞서 고속 너클볼을 이미 봤기에 너클볼의 움직임을 이 정도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술 취한 듯이 날아오는 야구공.

갈 길을 잃은 방망이가 그 공을 툭 건드렸다.

내야 땅볼 아웃.

1루를 향해 다섯 걸음 남짓 걸어갔던 에노모토 코이치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괴물이네.”

“아직이야.”

“어?”

에드 맥밀란이 포수 마스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에두아르도 자식한테도 이야기했지만, 저 녀석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한 거라고. 설마 저 망할 자식. 내가 불안하다 이건가?”

“어? 그게 무슨.”

“아냐. 아무것도. 그냥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고개를 갸웃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에노모토 코이치를 대신해 2번 타자 제이크 스컬리가 걸어왔다. 같은 양키스 소속으로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유격수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투수야.”

“멍청하기는. 아무리 내셔널리그라고 해도 평자책 2.55의 투수다. 당연히 까다로울 걸 예상했어야지.”

본래는 에드 맥밀란의 이야기를 전해주려 했었다. 하지만 이런 재수 없는 말을 듣고도 굳이 호의를 베풀 이유는 없다. 에노모토 코이치가 입을 다물었다.

타석에 선 제이크 스컬리가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분명 이곳은 캔자스시티 로얄스의 홈구장인 카우프만 스타디움이었지만, 일순간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이 된 것 같은 커다란 환호성이었다.

성민이 입을 삐죽거렸다.

‘뭔가 좀 재수가 없는데요?’

-당연한 일이다. 원래 양키스 자식들은 재수가 없어.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도 메이저리그에는 전국구 스타라고 할만한 선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국구 스타에 가장 가까운 선수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 제이크 스컬리일 것이다.

올스타에 선정될만한 실력.

뉴욕 양키스라는 메이저리그 최고 인기팀의 유격수.

무엇보다 그는 메이저리그 최고 미남인 휴스턴의 아론 브라이언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갈 만큼 준수한 외모를 갖췄다.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61.4마일의 느린 너클볼.

제이크 스컬리의 몸이 움찔했다.

완벽하게 타이밍을 뺏었다는 증거다.

휘두를까? 말까? 아직 카운트는 넉넉했다. 제이크 스컬리가 방망이를 멈췄다.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0-1.

두 번째. 곧바로 이어지는 빠른 공.

-딱!!

마찬가지로 올스타전에 출장한 다저스의 일루수 케빈 체임벌린이 공을 쫓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타구는 내야 관중석까지 뻗어 들어갔다.

‘쳇, 확실히 올스타는 올스타다 이거네요. 100킬로짜리 던지고 곧바로 147짜리 던졌는데 이걸 곧바로 따라 나오네요.’

-그래도 방망이 타이밍이 밀리긴 밀렸어. 그 정도면 충분하지.

‘뭐 파울 플라이도 어쨌든 카운트가 잡히긴 잡히니까요.’

볼카운트 0-2

제이크 스컬리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신을 가다듬었다.

‘멍청한 잽 새끼 말 처럼 저 칭키자식 만만하지가 않아. 빌어먹을.’

뭔가 미국 하면 인종차별의 대명사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미국은 인종차별이 매우 적은 국가에 속한다. 최소한 그들은 공공연한 장소에서 그런 언행을 저지르는 것을 매우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메이저리그의 경우도 그런 행동에 적극적으로 징계를 하는 편이다.

제이크 스컬리가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억눌렀다.

세 번째.

성민이 존 밖으로 슬쩍 빠져나가는 너클볼을 뿌렸다. 하지만 던지는 투수 본인도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공답게 성민의 손을 떠난 공이 존의 외곽을 크게 벗어났다.

제이크 스컬리가 방망이를 멈췄다.

-뻐엉!!

당연하게도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이어지는 속구와 너클볼. 제이크 스컬리가 하나는 골라냈고, 또 하나는 파울로 연결했다.

볼카운트 2-2

성민이 여섯 번째 공을 준비하려는 찰나.

에드 맥밀란이 갑자기 포수 마스크를 치켜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리고는 성난 얼굴로 성큼성큼 마운드를 향해 걸어왔다.

“이봐 성민.”

“어?”

“지금 날 봐주는 건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그 공을 던지지 않는 거지?”

“그 공이면? 잘 던진 너클볼?”

“그래, 바로 그 공.”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에드 맥밀란을 바라보며 성민이 턱을 긁적였다.

“에드, 그건 너도 잘 알잖아. 그 공은 내가 노리고 던진다기보다는 그냥 고속 너클볼을 던지다 보면 잘 들어갔을 때 나오는 공이라는 거.”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지금 결정구로 고속 너클볼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야. 너 보통 레퍼토리가 카운트 몰렸을 때 결정구로 고속 너클볼을 사용하잖아. 지금 그걸 사용하지 못 하는 건 내가 뒤로 흘릴 걸 염두에 둬서 그런거고.”

“워워. 진정하라고. 그럴 리가 있겠어? 혹시라도 네가 뒤로 흘린다고 해도 지금 어차피 주자가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냥 지금 제일 잘 들어가는 공 위주로 던진 것뿐이라고.”

누가 듣는다면 어처구니가 없을 일이었다. 보통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오는 건 투수를 달래기 위함인데, 정확히 그 반대의 풍경이 마운드 위에서 벌어지다니.

-이 녀석도 참 웃기는군.

‘뭐 그만큼 승부욕이 넘친다는 뜻이겠죠. 게다가 오늘 경기 이벤트전이잖아요.’

-하여간 쓸데없는 데서는 또 속이 좋아요. 만약 나였다면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한 마디 해줬을 게다.

‘그러니까 영감님이 현역 시절에 적이 많았던 겁니다. 에드도 승부욕이 끓어넘쳐서 그렇지 머저리는 아니에요. 지금 대충 달래두면 나중에 오늘 일 미안하다고 찾아와서 스테이크라도 하나 사줄 친굽니다.’

성민이 적당히 에드 맥밀란을 달래서 돌려보냈다.

-그나저나 저렇게 원하는데 던져주지 그러냐? 뭐 네 말처럼 뒤로 하나 빠지더라도 큰 문제가 생기는 일도 아니니 말이다.

‘그렇기는 한데, 괜히 전국 중계되는 무대에서 그런 꼴 당하면 또 저를 붙잡고 귀찮게 할까봐 그랬죠.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안 그래도 어차피 귀찮게 할 것 같긴 하네요.’

여섯 번째.

성민이 에드 맥밀란이 원하는 사인을 보내주었다.

물론 원한다고 해서 항상 2회전 미만의 대단한 공을 던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운 좋게도 그 원하는 공이 성민의 손끝에서 튀어나왔다.

제이크 스컬리는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여섯 개의 공을 지켜보는 동안 너클볼에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착각이었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자면 번쩍이는 두둥실.

-부웅!!

73.4마일. 회전수 1.92회의 너클볼이 제이크 스컬리의 헛스윙을 끌어냈다.

에드 맥밀란의 거대한 미트가 움직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미친 공이다. 심지어 타자의 배트를 피해 움직인 직후, 미트까지 도달하는 그 짧은 거리에도 미세하게 자기 멋대로 움직인다.

볼 집으로 받아내는 완벽한 포구는 아니었다.

손가락 마디를 욱신하게 하는 아슬아슬한 위치. 하지만 성민의 공은 분명 에드 맥밀란의 미트에 꽂혔고 공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스트라잌!! 아웃!!”

3회 말. 스트라이크 아웃 두 개를 포함한 삼자범퇴.

양키스의 타자가 침을 내뱉었다.

‘젠장맞을. 디아고 새끼만 해도 골이 아팠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저스와 양키스가 만나는 경기는 3년에 4경기 혹은 6경기뿐이라는 점 정도일까?

‘하지만 결국에는 만나게 되겠지.’

아메리칸리그의 가장 강력한 컨텐더인 뉴욕 양키스.

내셔널리그의 가장 강력한 컨텐더인 LA 다저스.

두 팀이 노리는 것은 하나뿐인 왕좌다.

내셔널리그의 15개 팀 가운데 마지막 순간에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은 팀을 꼽으라면 그것은 다저스일 수밖에 없다.

[김성민 올스타전 3회 등판 1이닝 2탈삼진 완벽투!!]

[올스타전 내셔널리그의 7:4 승리!!]

양키스의 떠오르는 아이콘이 더 큰 무대에서의 복수를 기약했다.

그리고 또 다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하반기(3) > 끝

ⓒ 묘엽

작가의 말

아마 앞으로 2화? 3화 정도면 제가 생각했던 메이저리그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을것 같습니다. ㅎㅎ

실망시키지 않는  좋은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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