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반기(2) >
-내 첫 올스타전의 경험이 생각나는군.
사무국에서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올스타전이 열리는 카우프만 스타디움이 위치한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로 이동하는 길. 필 니크로가 감상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1969년이었지. 난 당시 풀타임 3년 차에 접어들던 선수였다. 나이는 만으로 서른. 그래 너랑 똑같은 나이였지.
‘조금 늦으셨었네요.’
-뭐, 만으로 스물여덟에야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됐으니까. 게다가 너야 여러 가지 이슈를 등에 업고 쉽게 가는 거지만, 나 때는 지금처럼 말랑하지가 않았어. 풀타임 1년 차 신인 투수가 올스타? 그 괴물 같았던 밥 깁슨 자식이나 스티브 칼튼도 무리였지. 톰 시버 정도가 예외였을까. 게다가 우리 팀은 그렇게 인기 팀도 아니었단 말이지.
물론 지금도 여전히 1년 차에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민이 굳이 거기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이 가장 빛났던 시대를 떠올릴 때면 특별한 감정에 젖는 법이다. 필 니크로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어른이었고 굳이 산통을 깨트리고 싶진 않았다.
-어마어마했지. 누구 하나 팀의 중심타자가 아닌 선수가 없었고, 에이스가 아닌 선수가 없었어.
‘그래서 겁이라도 먹으셨던 겁니까?’
-그래, 솔직히 말하면 약간 쫄았던 것 같아. 그런데 같이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행크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라고.
‘행크요? 설마 그 행크 애런?’
-그래, 그 행크 애런.
1974년.
야구의 신이 남기고 갔던 홈런 기록을 깨트리며 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겼던 거인의 이름이 필 니크로의 입에서 나왔다.
다른 이야기는 다 제쳐두고라도 사무국에서 최고의 타자에게 수여하는 상의 이름이 행크 애런 상이라는 점만으로도 그 남자의 위상을 알 수 있다.
‘행크 애런이 대체 뭐라고 했는데요?’
-여기 있는 선수들이 대단해 보이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지.
‘그랬더니요?’
필 니크로가 웃으며 답했다.
-‘필 너를 보는 저 녀석들의 시선도 마찬가지다.’라고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성민아 명심해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저도 압니다.’
-하여간 겸손한 맛이 없다니까.
‘잘난 놈이 자기 잘난 거 알면서 겸손한 척하면 더 재수 없는 법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필 니크로와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 비행기가 캔자스시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 미리 준비된 차량으로 약 20분.
“와우, 사무국 지원 되게 빵빵하네.”
“우리 올스타잖아. 어때? 저녁에는 잠깐 관광이라도 할까?”
디아고 헤밍턴의 제의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스타전 게임까지는 이틀이 남았다. 홈런 더비를 비롯해서 내일 몇 가지 일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원정 경기를 위해 미국 전역을 돌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평소라면 하기 힘든 시티 투어를 비롯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특히 특급호텔의 두 번째 등급 스위트룸은 성민이 묵어본 어느 방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호텔의 스파 역시 근육을 풀어준다는 측면에서는 팀의 코치가 해주는 스포츠 마사지 쪽이 더 좋았지만, 오일을 이용한 안락함이 돋보였다.
“이봐, 디아고. 그런데 이거 내가 듣기로는 가족도 같이 올 수 있다고 들었는데 왜 혼자 온 거야?”
“그건 너도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보면 알게 될거야. 물론 난 릴리와 스텔라를 사랑해. 하지만 남자에게는 가끔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오, 거기. 그래 거기. 좋았어.”
“너 지금 그 대사 조금 이상한 거 알지?”
배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두툼한 손가락에 오일을 듬뿍 묻힌 남자 마사지사들에게 등을 맡긴 남자의 말치고는 많이 이상했지만, 어쨌거나 성민 역시 주변 조금 빨리 결혼했던 친구들에게 육아 스트레스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디아고와 성민이 시즌 개막 이후 3개월이 넘게 쌓인 피로를 확실하게 제거했다.
***
무난함과 개성이란 결국 상대적이다.
과거 1968년 당시, 카우프만 스타디움이 처음 지어질 때만 하더라도 이곳은 무난함의 극치를 달리는 구장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65년이 흘렀다.
당시 판에 박은 것 같다는 소리를 듣던 좌우대칭형 구장은 이제 단 둘밖에 남지 않았다. 무난함의 극치가 개성으로 돌변한 것이다.
“우리 구장이랑 느낌이 비슷하네. 근데 좀 광활한 느낌?”
“뭐, 여기도 좌우대칭이니까. 그리고 실제로 광활하긴 광활하지.”
거의 잠실에 필적할만한 외야의 완벽한 좌우대칭.
평소 등판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부터 예민하던 디아고 헤밍턴이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올스타전이기 때문일까? 그의 얼굴에 여유가 감돌았다.
물론 그것도 정확히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였지만 말이다.
내셔널리그 올스타팀의 선발로 등판한 디아고 헤밍턴이 2이닝 동안 여덟 명의 타자를 상대로 실점 없이 안타 하나와 볼넷 하나, 그리고 삼진 네 개를 기록했다.
“젠장.”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타자들을 상대로 무실점. 게다가 삼진은 네 개나 기록했음에도 2번의 출루에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과연 디아고 헤밍턴다웠다.
보통 불펜으로 출장하는 경기라면 자신이 언제 마운드에 올라가게 될지 미리 알수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중요한 것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가 아닌 메이저 최고 기량의 선수들로 구성된 팀들이 맞부딪히는 경기 그 자체였다.
성민에게 주어진 것은 3회 말 수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민은 너클볼 투수였다. 아무 포수에게나 수비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민의 전담 포수인 마이크 올리버를 데리고 올 수도 없었다.
오늘 내셔널리그 올스타팀의 감독을 맡은 폴 마이클은 나름의 고심 끝에 성민의 포수를 정했다.
“제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성민의 공을 제일 많이 받아 본 게 접니다. 게다가 어차피 제가 선발 포수일텐데 저한테 두 타석 정도는 주실 생각이었잖아요.”
어차피 연습도 없이 성민의 공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포수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메이저 최고의 수비형 포수로 손꼽히는 에두아르도 크루즈 정도면 몰라도 에드 맥밀란보다 수비에서 확실히 낫다고 할만한 포수는 없었으니까.
3회 말.
성민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NBA나 NFL에 비해 야구가 가장 크게 부족한 것은 역시 전국구 스타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야구의 인기가 부족하다는 것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했다. MLB에 비하자면 NBA나 NFL의 경기 수는 매우 적다. 24시간 스포츠를 중계해주는 채널을 틀면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아니더라도 다른 팀의 경기를 볼 일이 많다는 뜻이다.
반면 MLB의 경우 거의 매일매일 경기가 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다른 팀의 선수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올스타전은 매우 중요했다.
성민은 다저스의 팬이라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선수였지만, 오늘 올스타전을 시청하는 시청자의 7, 8할은 성민을 몰랐다.
[3회, 내셔널리그 올스타팀의 마운드에 김성민 선수가 올라옵니다. 앞서 훌륭하게 공을 던졌던 디아고 헤밍턴 선수와 마찬가지로 다저스 소속의 투수죠?]
[네, 메이저는 처음이지만, 작년까지 KBO에서 11시즌을 보낸 베테랑 투수입니다. 이번 시즌 FA로 메이저에 진출했죠.]
[현재까지 116.2이닝 평균자책점 2.55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이저에는 3년 6,600만 달러에 계약을 맺고 진출했는데 지금까지만 본다면 다저스로서는 정말 크게 남는 장사를 한 셈입니다.]
[또 한 가지 정말 특이한 점은, 이 투수가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라는 점입니다.]
[너클볼이요? 흥미롭군요. 하지만 이게 정말이라는 말까지 붙일 정도인가요? 그래도 종종 레파토리에 너클볼을 섞어 던지는 투수는 있었잖습니까.]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 투수는 정말 진짜배기거든요. 레퍼토리의 8할 이상이 너클볼인 전문 너클볼 투수입니다.]
[맙소사!! 전문 너클볼 투수면 지난 2017년 R.A 디키와 2018년 스티븐 라이트 이후로 맥이 끊기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무려 15년 만의 전문 너클볼 투수죠.]
전국으로 중계되는 ESPN의 해설자들이 성민에 대한 정보를 나열해주었다.
다른 선수들을 설명할 때와 사실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민에 관한 정보는 다른 선수들 보다 훨씬 선명하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외국에서 온 중고 신인이라는 점, 그리고 리그에서 손꼽히게 훌륭한 성적을 기록 중이라는 점. 무엇보다 너클볼 투수라는 특성덕분이었다.
[자, 타석에는 9번 타자죠? 작년 겨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오클랜드 애슬래틱스로 자리를 옮겼던 에두아르도 크루즈 선수가 들어옵니다.]
[지금 성민의 공을 받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에드 맥밀란 선수와 함께 메이저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선수입니다. 작년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올스타전 출장이로군요.]
마운드의 성민이 공을 쥐었다.
-저 자식 괜찮겠지?
‘뭐, 시즌 시작되고 빡세게 연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공 주고받았잖습니까. 욕심이 많은 녀석이니 잘할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 좀 못 받아도 어떻습니까. 어차피 이벤트 게임인데.’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이기고 싶어서 아주 근질근질한 것 같은데?
성민이 대답 대신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분명 올스타전은 기껏해야 이벤트 경기다. 지난 2016년 이전에야 승리한 쪽에게 월드시리즈 홈어드밴티지라는 무시할 수 없는 상품이 걸려있었다지만, 지금은 약간의 상금을 더 받는 것이 전부다.
아직 연봉협상 자격이 없는 최저연봉 선수들이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금액이지만, 성민 정도의 선수가 집착할 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승리는 언제나 그런 잡다한 문제 너머에 있다.
승리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기쁘다. 하지만 승리란 본래 승리 그 자체만으로도 기쁜 법이다.
마운드의 성민이 공을 뿌렸다.
초구, 몸쪽 깊숙하게 붙이는 가장 빠른 속구.
마지막 등판으로부터 5일.
몸은 충분히 풀렸다.
-부웅!!
“스트라잌!!”
92.1마일의 공이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그가 눈을 부릅떴다.
‘분명 너클볼 투수라고 들었는데 92마일이라고?’
내셔널리그의 타자들, 혹은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성민을 상대했던 선수들은 성민에 대해 충분히 공부했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 성민을 상대할 일이 없는 선수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만약 오늘 경기가 정규시즌 경기였다면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성민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고 타석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에두아르도 크루즈에게 오늘 경기는 그저 이벤트 경기에 불과했다. 시즌을 치르며 당장 오늘 경기의 상대를 분석하기에 바쁜 메이저리거에게 올스타전에서 한 번 만날 투수까지 미리 공부해오길 바라는 것은 과한 일이었다.
물론 공부가 덜 됐다고 해도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에드 맥밀란과 함께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다.
-딱!!
빠른 너클볼과 속구에 내야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파울만 연속으로 두 개.
그리고 네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61.3마일의 느린 너클볼이 그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빼앗았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허탈하게 웃으며 에드 맥밀란을 향해 투덜거렸다.
“92마일짜리 속구에 75마일이랑 61마일 너클볼이라고? 이봐, 에드. 이 녀석 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라이벌의 투덜거림에 에드 맥밀란이 기쁘게 답했다.
“뭐긴 뭐겠어. 리그에서 오직 이 몸만이 감당할 수 있는 진짜배기 너클볼 투수지. 너도 저 자식 공 받으려면 피똥 좀 싸야 할걸? 어쩌면 피똥만 질질 싸고 못 받을지도 모르지.”
“에이, 연습만 좀 하면 그 정도까진 아닐 것 같은데. 그리고 솔직히 공 받는 건 내가 너보다 더 낫잖아.”
“헛소리 그만하고 덕아웃으로 돌아가기나 하셔.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 하반기(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