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어스(3) >
좋은 투수가 좋은 타자가 되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물론 그렇지 못한 경우는 더 많았지만.
-부웅!!
“스트라잌!!”
성민의 방망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쳇, 아깝군.’
-대체 어디가 아깝다는 거냐? 방금 공이랑 방망이랑 한 10cm는 차이 났는데.
성민은 그날의 결심 이후 정규 연습 외에도 하루에 100번씩은 방망이를 휘둘렀다. 사실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기에는 상당히 어정쩡한 횟수다.
보통 스윙 연습을 열심히 했다는 선수들을 보면 하루에도 천 단위로 방망이를 휘둘렀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시즌 중에 그렇게 하는 것은 조금 미친 짓이기는 하다.
-뻐엉!!
[김성민 선수 공 하나를 잘 골라냅니다.]
[지난 세 번째 등판 경기에서 마수걸이 안타로 이루타를 기록했었죠? 그 이후로 조금 잠잠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11년 동안 타격에 손도 대지 않았던 것 치고는 스윙도 상당히 날카롭고 역시 야구는 잘하는 사람이 잘한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선수예요.]
[그러니까 김 위원님 말씀은 타격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어 보인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김성민 선수의 현재 타율을 생각하면 조금 후한 평가 같은데요.]
[하하, 물론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김성민 선수가 상대하는 투수들이 세계 최고의 투수들인 메이저리거라는 점도 고려해야죠. 게다가 제가 듣기로는 다저스의 투수 타격 연습 때 종종 담장 너머로 공을 날려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파워도 파워지만 타격에 대한 센스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볼카운트 1-1
팀 합동 연습에서 성민은 약 30개가량의 배팅볼을 친다. 기본적으로 타격 코치들은 메이저리거의 타격폼까지 깊숙하게 관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민의 경우는 조금 예외였다.
“그래, 거기서 하체에 무게중심을 조금 더 싣고 땅을 단단하게 밟는 느낌으로 그렇지. 그렇게 휘두르면 된다.”
성민은 무려 11년이나 타격을 손에서 완전히 놓고 있던 선수였다. 코치의 지도 없이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물론 코치 역시 성민의 몸에 딱 맞는 타격폼을 지도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본인이 스스로 타격을 익혀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조절해야 하는 부분이었으니까.
-딱!!
[쳤습니다!! 하지만 1루 내야 깊숙한 곳!! 타이밍이 살짝 밀렸군요.]
[96.4마일의 매우 빠른 공이었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하죠.]
‘이번에는 정말 아까웠죠?’
-뭐 그럭저럭 이전보다는 낫군,
분명 하루 100번의 스윙은 그리 많은 연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민의 곁에는 올바른 길과 틀린 길을 명확히 제시해줄 수 있는 스승이 있었다.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이점이었다. 애초에 이 길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신할 수 없는 깜깜한 길을 걷는 것이 보통이다.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그리고 오직 그것만을 수행할 수 있는 효율성.
하루 100번의 스윙이 성민에게 준 것은 생각 없이 방망이를 돌릴 때 그것을 무너트리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의 익숙함이었다.
네 번째.
94.7마일의 빠른 공.
바깥 코스 살짝 높은 공이었다. 윌 브룩스톤의 미간이 꿈틀했다. 노리던 것보다 훨씬 높게 들어간 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상대는 타율이 1할도 되지 않는 투수였으니까.
성민의 몸이 연습한 그대로 움직였다.
오른 다리를 단단히 땅에 박았다. 레그킥은 없었다. 어차피 그걸로 타이밍을 맞춘다고 1할도 안 되는 타자가 3할 타자로 둔갑할 수는 없다. 완벽하게 몸을 뒤로 받쳐놓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지난 3번째 등판 경기에서 이루타를 쳤을 때와 달라진 점은 그저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배트에 싣는 요령을 익혔고, 실전에서도 그 연습했던 스윙을 그대로 수행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곳은 쿠어스필드였다.
-딱!!
손바닥에 얼얼한 충격이 전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는 많았다. 스윗스팟을 벗어난 공이다. 게다가 타격 연습을 할 때 이런 충격이 오면 보통은 외야 플라이, 코스가 아주 좋다면 아슬아슬한 이루타다.
성민이 1루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평소보다 호흡이 조금 가빴다. 쿠어스필드답다. 하지만 2루에 가서 산소호흡기를 입에 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달릴 타이밍이었다.
1루를 밟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응?’
야수들의 움직임, 주루 코치의 반응, 무엇보다 필 니크로의 반응까지. 성민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 없는 그라운드.
모두의 시선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넘어갔습니다!!]
[김성민!! 홈런!!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홈런입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김성민 선수 타격에 재능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김성민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첫 번째 안타는 이루타. 두 번째는 바로 홈런이네요.]
-단타는 취급하지 않는다.-
-소리 벗고 팬티 질러!!-
-투수가 홈런이라니 ㄷㄷ 대박이네.-
-그래봤자 5푼 따리가 1할 따리 됐는데 오버하기는.-
-네, 그만 부들거리시고요. 애초에 지금 내셔널리그에 1할 이상인 투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 좀 세어보고 오세요.-
-근데 이렇게 되면 김성민 타율로는 0.111인데 장타율은 쩌는 거 아님? 이루타 하나에 홈런 하나잖아-
-아직 쩌는 것까지는 아니고 이번 홈런 전에는 0.059/0.059/0.118이었는데 이제는 0.111/0.111/0.333이네.-
-근데 지금 하필이면 원정인데 성민이 홈런볼은 받을 수 있으려나? 1호 홈런인데 저거 가치가 제법 될 것 같은데.-
-알아서 다 챙겨줄 거임. 콜로라도 로키스 팬이면 그냥 로키스 선수들꺼 뭐 받고 넘겨줄걸? 애초에 우리한테야 성민이가 슈퍼스타지만 로키스 팬한테는 그냥 동양에서 온 투수잖아. 1호 홈런볼이고 뭐고 에드윈이 사인 배트라도 하나 준다고 하면 바로 넘길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그라운드를 한 바퀴 가볍게 내달렸다.
과거 내셔널리그의 어느 투수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피칭은 직업일 뿐이다. 진짜 흥미로운 쪽은 타격이다.’
물론 성민으로서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선수가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정도는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구공이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느낀 감정은 그 정도였다.
덕아웃을 지키던 선수들이 잠시 당황했다.
“이거 어쩌죠?”
“뭘?”
“그거 해야 합니까?”
메이저에 올라온 신인 선수가 홈런을 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외면하는,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벤트를 어떻게 해야할까?
모두가 알고 있어 당황하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홈런을 치기 전까지는 각오를 하고 있다가도 홈런을 치고 들어오면 당황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메이저 첫 홈런의 경험은 그만큼 강렬하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일단은 프로에서 11년이나 뛴 선수야. 루키 취급을 할 필요는 없지.”
케빈 체임벌린의 이야기에 에드 맥밀란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거기 있을 때 타석에는 서본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리그 전체가 지명타자 제도로 돌아간다고 들었거든요. 지금 저건 단순히 메이저 1호 홈런이 아니라, 정말 프로리그 1호 홈런이잖아요.”
“그건 또 그렇군”
라티노 친구들 역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역시 이런 이벤트는 챙겨줘야겠지?”
“그래, 평소 너무 능글거리는 모습만 봐서 당황한 모습도 좀 보고 싶긴 하단 말이지.”
“근데 당황을 하기는 할까?”
“뭐, 궁금하니까 직접 해보자고.”
마지막 홈플레이트를 밟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성민이 덕아웃 입구에서 마치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과 같은 폼으로 양팔을 쫙 펼치고 턱을 높게 치켜들었다.
‘뭐지?’
‘지금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덕아웃에서 각자의 일을 하며 성민이 뻘쭘하게 자기 장비를 내려놓는 순간에 축하를 해주려던 선수들이 당황했다.
잠깐의 침묵.
마르타 블랑코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선수들의 조금 격렬한 축하가 쏟아졌다.
오늘의 선발투수였던 만큼 몸을 두들기는 수준은 아니었다. 선수들이 손에 한 웅큼 움켜쥔 해바라기 씨를 성민에게 뿌려댔다.
“하여간,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당황할 리가 없다고.”
“성민, 1호 홈런 축하해. 젠장, 설마 투수보다 홈런을 늦게 치게 될 줄이야.”
“이봐, 올리버. 넌 성민보다 늦게 치는 걸 걱정할 게 아니라 커리어 1호 홈런을 칠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지.”
“하긴, 그건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홈런보다 성민보다 타율이 더 낮아질 걸 걱정해야할 것 같은데.”
“뭐라고? 이 자식들이?”
쏟아지는 해바라기씨를 맞으며 성민이 산소호흡기를 뒤집어썼다.
-괜찮냐?
‘후, 뭐 버틸만합니다. 근데 진짜 평소보다 좀 힘들기는 하네요. 저거 뛰었다고 이렇게 숨이 가쁠 줄이야.’
경기가 계속됐다.
-딱!!
쿠어스필드의 가혹함은 공평해서 윌 브룩스톤만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어찌 됐건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수들은 메이저리거였다. 그리고 쿠어스의 성민이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는 작년 초 KBO에서 보여주던 수준에 불과했다.
쿠어스필드의 광활한 외야로 뻗어 나간 타구들은 장타로 연결됐다. 다저스의 외야수들은 제법, 아니 정말 괜찮았지만 그런 괜찮음으로도 도저히 커버되지 않을 만큼 쿠어스필드의 외야는 광활했다.
하지만 성민이 그들에게 점수를 내주는 것 이상으로 다저스의 타자들은 점수를 뺏어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모두가 제대로 된 타격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다저스의 8번 타자 마이크 올리버가 세 타석 연속 삼진으로 물러났다.
‘후, 오히려 포수 쪽이 더 쉽다니.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뭐 어쨌거나 타자 하나를 쉬었다 가는 건 똑같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덕아웃의 에드 맥밀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늘 성민이 던지는 공 정도라면 그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타석에 들어갔다면 다저스가 얻어낸 점수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팀 전체를 생각할 때 베이크 감독의 판단이 올바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162경기를 모두 뛰는 포수는 환상 속의 생명체다.
에드 맥밀란은 포수 가운데 제법 건강한 편에 속했지만 그래도 140경기 내외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다. 그것도 하반기에 가면 푹 퍼진다.
5경기 마다 한 번의 휴식.
심지어 지난번과 지지난번 경기의 경우에는 성민이 교체된 이후 마지막 한 타석씩을 소화하며 수비도 총 3이닝을 소화했다. 사실상 보름 만의 휴식인 셈이다.
-딱!!
[쳤습니다!! 빠른 타구. 2루 주자 3루 지나 홈까지!! 홈에서!!]
“세이프!!”
[그사이 김성민 선수 1루 지나, 2루까지 도착합니다!!]
[이걸로 경기 두 번째 안타입니다. 와, 김성민 선수 오늘 아주 물이 올랐는데요?]
무엇보다 오늘 다저스의 타선은 그를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강력했다.
‘그나저나 저 녀석 타격에 더 재능이 있는 거 아니야?’
김성민 6이닝 7피안타 1볼넷 3실점.
그리고 3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 2득점.
성민이 시즌 다섯 번째 승리를 수확했다.
< 쿠어스(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