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어스(2) >
일반적으로 투수들에게 불리하다는 말은 타자들에게 유리하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누누이 말했던 것처럼 쿠어스필드는 투수들의 지옥과도 같은 구장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쿠어스필드는 타자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구장이어야 했다.
하지만 쿠어스필드를 홈으로 쓰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자들에게 그것은 절반밖에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분명 쿠어스필드는 타자구장이다. 하지만 지난 2002년 이후 작년까지 31년 동안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의 wRC+가 100을 넘었던 시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들은 쿠어스필드에서 매우 강력한 타자였다. 그들이 31년 동안 기록한 홈경기 OPS는 0.850에 가깝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쿠어스필드의 특수성이 그들을 약하게 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1번 타자인 제이슨 스튜어트가 타석으로 걸어왔다.
작년 시즌 그의 슬래시 라인은 0.314/0.387/0.479로 숫자만 본다면 리그에서 손에 꼽히게 강력한 좌타자였다.
타율, 출루율, 장타율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딱!!
제이슨 스튜어트가 성민의 73.4마일 고속너클볼을 두들겼다.
밀어친 타구.
제법 빠르게 날아드는 그것을 유격수인 페데리코 수가 빠르게 낚아챘다. 좌타자인 제이슨 스튜어트가 1루까지 달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4초 미만. 짧은 시간이다.
페데리코 수가 달리던 자세 그대로 몸의 방향만을 틀은 채 어깨의 힘 만으로 1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강한 송구. 그러나 방향은 조금 좋지 못했다.
하지만 다저스의 1루를 지키는 캡틴 케빈 체임벌린이 자신의 골드글러브 2회가 딱지치기로 따낸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뻐엉!!
“아웃!!”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건 조금 쫄깃했어. 만약에 마린스였다면 무조건 확정 이루타 감이었을 텐데 말이지.
‘타구가 확실히 빠르긴 빠르네요.’
-농담 조금 보태서 쿠어스필드는 다른 구장이라면 중견수가 산책하듯 걸어와 잡을 외야 플라이가 담장 밖으로 날아가는 구장이다. 투수가 던지는 공만 약해지는 게 아니라 타자들의 타구도 터무니없이 빨라지지.
‘그거야 저도 잘 압니다. 그러니까 로키스 타자들이 저런 식으로 방망이를 휘두른다는 것도 잘 알고요.’
21세기 이후 메이저리그는 더 빠른 공, 그리고 더 강한 타구에 집중해왔다.
정교한 수비 시프트를 뚫는 데 필요한 것은 스프레이 히팅이 아닌 시프트로도 막을 수 없는 강한 타구라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었다. 점점 더 빨라지고 교묘하게 움직이는 투수들의 공을 밀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밀어친 약한 타구보다 강하게 잡아당긴 타구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곳 쿠어스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투수들의 공이 다른 구장보다 훨씬 밋밋해진다. 회전수와 실밥을 이용하는 투수들의 무기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여기서만큼은 스프레이히팅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외야도 넓고 낮은 공기 밀도 덕분에 타구 속도도 빠르다. 굳이 강하게 잡아당길 필요도 없다. 그저 슬쩍 밀어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안타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네가 공략해야 하는 지점이다. 뭐 이것도 다저스의 야수들이 능력이 있으니 가능한 부분이긴 하지만 말이야. 만약에······
성민이 필 니크로의 말을 끊었다.
‘또 마린스 야수들이였다면 이런 건 꿈도 못 꿨을 거라는 소리 하려는 거면 않으셔도 됩니다. 아주 귀에 딱지 앉겠어요. 그리고 애초에 마린스에 있었으면 이런 개똥 같은 구장에서 뛸 일도 없었거든요?’
공기 밀도가 낮은 쿠어스필드와 너클볼의 궁합은 최악이다.
보통의 너클볼 투수였다면 이곳에서는 그저 배팅볼 투수밖에 되지 못한다. 하지만 필 니크로가 볼 때 성민은 가능성이 있었다.
+++
며칠 전 쿠어스필드 등판이 결정됐던 바로 그날, 성민이 필 니크로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쿠어스필드에서 던지기 위한 조언?
“네. 영감님은 메이저에서 오래 뛰셨잖아요. 쿠어스필드에서 뛰어본 적도 있으실 텐데 그러면 뭐 조언해주실 이야기 있을 거 아닙니까. 듣기로는 쿠어스필드는 공기 저항이 적어서 너클볼 회전이 엄청 밋밋해진다고 그러던데요.”
-너 쿠어스필드가 내가 은퇴한 90년대 이후에 지어진 건 알고 하는 소리냐?
“······.”
-하지만 거기서 뛰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뭐 조언을 못 해줄 건 없지.
“뭡니까?”
성민이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물었다.
-잘 던져. 최선을 다해서. 잘 던진 너클볼이면 통할 거다.
“설마 그게 끝이에요? 잘 던지라는 말이? 아니 그게 지금 조언이에요? 시험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한테 최선을 다해서 잘 보라는 이야기랑 대체 뭐가 다릅니까.”
-자, 성민아 생각을 해보자. 너한테서 너클볼의 무브먼트를 빼면 뭐가 남지?
“수려한 외모와 완벽한 몸매 유려한 언변과 빛나는 지성?”
-농담하지 말고. 야구 말이다. 야구.
필 니크로의 이야기에 성민이 잠시 고민했다.
자신에게서 너클볼의 무브먼트가 빠진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어?”
-이해했느냐? 거기에 아무리 쿠어스라고 해도 잘 던진 고속너클볼이면 평소 그냥 던지던 고속너클볼만큼의 움직임은 보여줄 수 있을 거다.
+++
콜로라도 로키스의 2번 타자 카를로스 페랄타가 타석에 들어섰다.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뛰어난 타자로 작년 31개의 홈런을 기록한 남자다.
‘뭐 그래봤자 그중 22개가 쿠어스필드에서 기록한 홈런이고 원정에서는 9개밖에 치지 못 했잖아요.’
-하지만 여긴 쿠어스필드지.
카를로스 페랄타 역시 앞선 제이슨 스튜어트와 스윙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절한 웨이트 시프트를 이용한 타이밍 조절, 그리고 간결한 레벨스윙.
성민이 첫 번째 공을 뿌렸다.
74.6마일의 고속너클볼.
하지만 무브먼트가 평소만 못하다. 그것은 분명 평소였다면 거의 실투에 가까운 공이었다.
-딱!!
높게 뻗은 타구가 내야 관중석에 직격했다.
카를로스 페랄타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이것은 영상으로 보던 것과 비교한다면 거의 움직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이었다.
하지만
‘75마일짜리 체인지업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볼 끝이 더러운 체인지업이지.’
메이저리그의 구단들은 바보가 아니다.
실제로 과거 1992년부터 1997년까지 LA다저스는 톰 캔디오티라는 걸출한 너클볼 투수를 보유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그들은 너클볼과 쿠어스필드의 궁합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았고 톰 캔디오티의 등판 일정을 무리라는 느낌이 들 만큼 조정해가며 쿠어스필드 등판을 막았었다.
하지만 2033년.
다저스는 성민의 등판을 굳이 조정하지 않았다.
너클볼의 무브먼트가 조금 밋밋해진 김성민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최고 93마일에 육박하는 속구와 74마일 그리고 62마일의 훌륭한 오프 스피드 피치.
그리고 쿠어스필드에서도 영점을 조절해서 그럭저럭 존의 아래쪽 구석을 공략할 만큼 훌륭한 커맨드가 남는다.
사람들은 종종 쿠어스필드의 가장 더러운 점을 변화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점을 꼽는다. 하지만 실제 쿠어스필드의 성적을 살펴보면 걸출한 브레이킹볼을 구사하는 선수보다, 속구의 비중이 높은 투수의 성적이 더 저조한 경향을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의 회전과 공기의 저항을 가장 크게 활용하는 공은 변화구가 아닌 속구이기 때문이다. 좋은 속구는 곧게 뻗어나가는 공이 아니다. 정상적인 움직임보다 ‘덜’ 떨어지는 공이다.
투수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영점이 있다. 강속구 투수들의 경우 그 영점이 조금 덜 맞아도 공의 구위로 그것을 억누를 수 있다. 하지만 쿠어스필드에서는 아니다.
게다가 쿠어스에서는 그 자신만의 영점 역시 엉망진창이 돼버린다. 높게 뜬 공들은 타자의 방망이를 부르고 그 경우 높은 확률로 담장을 넘어가 버린다.
결국, 그나마 쿠어스에서 통하는 투수는 좋은 감각으로 즉시 영점을 수정할 수 있으며, 최대한 땅볼을 유도할 수 있는 투수다.
LA 다저스의 전력분석팀은 그들의 에이스인 디아고 헤밍턴보다 오히려 성민 쪽이 쿠어스에서 더 좋은 투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헛스윙.
그리고 존을 살짝 빠져나가는 속구.
성민이 세 번째 공을 뿌렸다.
-딱!!
몸쪽 낮게 깔려 날아온 92.1마일 속구를 카를로스 페랄타가 후려쳤다.
빠른 땅볼.
다저스의 이루수인 마르타 블랑코가 가볍게 공을 잡아 1루에 송구했다.
“아웃!!”
지금까지 던진 공은 총 다섯 개.
그리고 투아웃.
로키스의 세 번째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에드윈 필립스.
올해로 메이저 8년 차를 맞이하는 타자다.
-저 녀석만큼은 방심하면 안 된다.
필 니크로의 잔소리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자들은 쿠어스필드에서 뛰기 때문에 얻는 이득 이상으로 큰 손해를 안는다. 쿠어스필드에 가장 적합한 타격 매커니즘과 다른 모든 구장에서 뛰기 적합한 매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홈경기에 유리한 매커니즘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홈에서 상대하는 투수들의 수준은 더블A수준인데 원정에서는 진짜배기 메이저리거 수준이다. 시즌이 진행되면 될수록 로키스 타자들의 성적은 엉망진창이 돼버린다.
하지만 에드윈 필립스는 달랐다.
그는 지난 7년을 통틀어 원정 경기만을 기준으로 wRC+가 110 미만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다른 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어퍼스윙을 한다면 50홈런도 너끈히 쳐낼 수 있는 로우 파워였다.
그는 그런 터무니없는 힘을 가지고도 철저하게 웨이트시프트 시스템을 이용한 레벨스윙에 집중했다. 덕분에 커리어 7년 동안 기록한 홈런은 239개. 유망주 시절 그가 받았던 평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쿠어스를 홈으로 쓰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 대신 그는 매우 높은 비율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얻었다. 그 결과 에드윈 필립스의 지난 커리어 슬래시 라인은 0.327/0.411/0.614라는 괴물 같은 수치를 자랑했다.
헬멧을 눌러쓴 에드윈 필립스가 타격 자세에 들어갔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세심한 포즈였다.
성민이 우둘우둘한 공의 실밥을 매만졌다. 마음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많은 투수가 쿠어스필드에서 던진 자신의 공이 자신의 생각, 그리고 경험과 다르게 들어가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진다.
성민 역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다르다.
성민은 마린스의 수비 속에서도 0점대의 평자책을 기록했던 위대한 투수였다. 고작 내 공이 내 생각과 다르게 들어간다는 스트레스 정도로는 그를 흔들 수 없었다.
성민이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을 최선을 다해 뿌렸다.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을 던졌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74.1마일 회전수 1.7번.
정말 잘 던진 너클볼이다.
물론 공의 움직임은 평소 3.5번쯤 회전하던 너클볼과 흡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딱!!
높게 뜬 파울타구가 케빈 체임벌린의 미트를 벗어나지 못했다.
“쿠어스필드에서 이런 움직임이라고?”
아웃 카운트 세 개까지 투구 수는 고작 여섯 개.
방망이를 휘두른 에드윈 필립스가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마운드의 성민을 바라봤다.
공수교대.
에드윈 필립스가 경악의 눈빛으로 성민을 바라보던 그 자리에 푸른빛의 카본 헬멧을 눌러 쓴 성민이 올라왔다.
< 쿠어스(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