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어스(1) >
메이저리그를 관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셔널리그는 아메리칸리그보다 투수가 뛰기 편한 리그라는 점이다.
지명 타자제도 때문이다.
실제로 내셔널리그는 1973년 아메리칸리그에 지명타자가 도입된 이래 단 한 번도 아메리칸리그보다 평균 득점이 높았던 적이 없었다.
적은 차이도 아니다. 평균적으로 0.4점에서 0.5점. 이것은 1선발급 투수와 2선발급 투수를 가를 만큼 큰 차이다.
그리고 그런 내셔널리그에서도 가장 널널한 지구를 꼽는다면 십중팔구는 LA 다저스가 소속된 서부지구를 꼽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구장의 득점 파크팩터다.
그것을 기준으로 봤을 때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5개 팀의 구장 가운데 무려 4개가 투수 친화 구장이다.
2032년, 작년 성적을 기준으로 했을 때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펫코 파크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오라클 파크는 파크펙터 29위와 30위를 기록했다. 다저 스타디움 역시 24위로 만만치 않게 낮았고 그나마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체이스필드가 17위로 선전했다.
이 네 개 구장의 평균을 내보면 리그 전체 평균보다는 무려 0.43점. 아메리칸리그와만 비교하면 0.81점을 덜 내줬다.
그리고 성민 역시 이 투수 친화 구장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는 3월 데뷔 이후 홈에서만 3연속 등판했고, 그 이후 펫코 파크와 오라클 파크에서만 경기를 치렀다.
[김성민 내셔널리그 4월 이달의 신인 확정적! 어쩌면 4월 이달의 투수도?]
[다섯 경기 4승!! 31.1이닝 1.44. 김성민 특급투수의 위력을 자랑하다!!]
[2,200만 달러를 헐값으로 만드는 김성민의 놀라운 활약.]
[김성민!! 신인 투수 유일하게 사이 영 배당에 이름을 올렸다!! 예측 사이 영 배당 +1400으로 공동 10위 랭크!!]
-자랑스럽다 김성민. 2,200만 달러가 헐값이라니.-
-지금 페이스대로면 1년 만에 3년 치 몸값 다 할듯. FA선수들 WAR 1당 950만 달러인가 하는데 성민이가 한 달 만에 WAR이 1.1임. 시즌 끝나면 거의 8이라는 소리인데. 크, 주모!! 여기 국뽕 한사발 가져다 주시오.-
-오버하기는. 이제 고작 한 달임. 성적은 전부 지나 봐야 아는 거다.-
-근데 저게 무슨 소리야? +1400이라니?-
-100달러 걸면 1400달러로 돌려받는다는 뜻임. 시즌 초반인데 저 정도면 진짜 엄청 높은건데.-
-높기는 지금 내셔널리그에서 선발 중에서 평자책 1위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근데 성민이가 장기적 전망이 좋은 건 아니니까. babip 보면 다저스 수비빨이랑 늘서 구장빨 제대로 보는 거 티 나고, 너클볼 투수는 워낙에 경기 복불복이 심하잖아.-
-하여간 뭔 말만 하면 매일 늘서빨 수비빨.-
-실제로 수비랑 구장 보정된 수치로 보면 차이 확 나거든?-
-워워, 뭐 이런 걸 가지고 싸우고 있어. 어차피 이런 이야기도 다음 경기에서 어느 정도 결판 날 거잖아.-
-하긴,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런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라고 해도 모든 구장이 투수 친화적인 것은 아니었다.
쿠어스 필드.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의 4개 구장을 합쳤을 때는 분명 리그 전체 평균보다 0.43점을 이득 본다. 하지만 거기에 쿠어스 필드를 포함하게 될 경우 그 0.43점의 이득은 0.08점으로 줄어든다.
작년 쿠어스 필드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파크팩터를 기록했던 코메리카 파크의 파크팩터는 1.104. 쿠어스 필드의 파크팩터는 무려 1.403에 달한다.
중립구장의 기준이 1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수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야말로 투수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기록이다.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 2차전. 김성민 선발 등판 예정!!]
[김성민 선수의 4월 내셔널리그 이달의 투수를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 쿠어스!!]
[다저스의 슈퍼 에이스 디아고 헤밍턴조차 침몰시켰던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 필드의 위용!!]
-하필이면 일정이 왜 이렇냐? 좀 무난하게 이달의 투수 타나 싶었는데 쿠어스라니.-
-김성민은 쿠어스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
-넘어서기는 개뿔 디아고 헤밍턴도 완전 조진 곳이 쿠어스임.-
-지금 성민이가 헤밍턴보다 평자책 더 낮거든? 그것도 헤밍턴 쿠어스 등판 제외하고도.-
-멍청아. 헤밍턴은 원정을 많이 뛰었잖아. 쿠어스 말고도 내셔널스 파크에서 뛴 것도 있고. 내셔널스 파크도 꽤 심한 타자구장이거든?-
-근데 쿠어스랑 그런거 다 고려해도 지금 평자책이 1.53 차이 나는데 그 정도면 성민이가 확실히 더 잘하고 있는 건 맞지.-
지난 4월 초.
디아고 헤밍턴은 쿠어스에서 5.1이닝 6실점으로 침몰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그날은 컨디션도 별로 안 좋았다고.”
디아고 헤밍턴이 이를 박박 갈았다.
물론 그날 디아고 헤밍턴을 상대했던 콜로라도 로키스의 1선발인 윌 브룩스톤이 듣는다면 기가 막힐 소리이기는 했다. 디아고 헤밍턴이 5.1이닝동안 6실점을 했던 그 경기에서 윌 브룩스톤은 5이닝 8실점으로 물러났었기 때문이다.
물론 디아고 헤밍턴의 머릿속에 그날 경기의 승리투수가 자신이라는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5.1이닝에 6실점이나 했다는 기억뿐이다.
그야말로 훌륭한 선발 투수의 자세였다.
그리고 1차전.
-딱!!
“망할.”
이번에도 저 높이 날아가는 타구를 바라보며 디아고 헤밍턴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경기 벌써 두 번째 피홈런이었다.
하지만 역시 에이스는 에이스였다. 홈런을 두 개나 허용했음에도 그의 투지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저스의 덕아웃 역시 그를 쉽게 강판하지 않았다. 애초에 콜로라도 로키스의 다섯 번째 선발 투수는 고작 3.1이닝 만에 마운드를 내려갔고 그 뒤를 따라 올라온 불펜들 역시 신나게 털리고 있었다.
디아고 헤밍턴이 마지막 남은 아웃 카운트 하나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6이닝 6실점. 그리고 시즌 다섯 번째 승리.
디아고 헤밍턴이 오늘 또 상처뿐인 승리를 쟁취했다.
***
부산 마린스의 클럽하우스.
4월 한 달. 그들은 10승 9패를 기록했다. 작년의 마린스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작년의 성적 자체가 김성민이라는 압도적인 에이스 덕분에 나온 성적이었다. 그가 빠졌음에도 아슬아슬하게 가을야구는 노려볼만한 성적을 유지 중이다. 분위기가 나쁠 이유가 없었다.
오늘 경기 마린스 승리의 주역인 김정엽이 옷을 갈아입으며 입을 열었다.
“내일 드디어 성민 선배 쿠어스 등판이네요. 괜찮겠죠?”
그의 걱정 어린 이야기에 호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통화할 때는 괜찮아 보이더라. 별거 아니라고 큰소리 뻥뻥 치는 게 딱 평소 그 녀석이었어.”
“그래도 이왕이면 쿠어스는 일주일 정도만 뒤로 미뤄졌어도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건 그렇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달의 투수를 타느냐 못 타느냐는 제법 큰 일이니까.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라. 성민이가 어디 보통 녀석이냐. 게다가 너클볼은 원래 회전이 없을수록 유리한 공이잖아. 쿠어스에서는 괜찮을 거야.”
“그런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마린스 투수조 최고참 진명규가 두 타자의 이야기에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왜? 쿠어스는 공에 회전이 덜 먹히는 게 문제라던데. 그러면 애초에 회전을 안 하는 너클볼이면 더 좋은 거 아니야?”
“멍청하기는. 공에 회전이 덜 먹히는 게 아니라, 공기의 밀도가 낮아서 회전이 좋아도 무의미해지는 거야.”
“그 말이 그 말 아니야? 어차피 너클볼은 회전하지 않는 공이니까 회전이 무의미해지면 더 좋은 거잖아.”
“어우. 진짜 이 답답이가? 너클볼이 자기 마음대로 흔들리는 것도 결국 공기 저항 때문이잖아. 중요한 건 회전이 아니라 공기저항이라고.”
김호섭이 곰곰이 진명규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명규가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그냥 쉽게 결론만 이야기해줄게. 쿠어스에서는 너클볼도 훨씬 덜 움직인다. 그리고 덜 움직이는 너클볼은 뭐다?”
“······. 덜 움직이는 너클볼이 뭔데?”
“뭐긴 뭐겠냐. 그냥 느린 속구. 배팅볼이지.”
***
4월의 마지막 주.
성민의 여섯 번째 등판이 돌아왔다.
-괜찮냐?
‘네, 뭐 그냥 저냥요. 어제는 좀 갑갑했는데 하루 지났다고 버틸만하네요.’
쿠어스 필드의 덕아웃에는 다른 구장에는 없는 이색적인 물건이 존재했다.
필 니크로가 산소마스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따가 너무 힘들면 저거 꼭 사용하고. 쪽팔린다고 안 쓰면 진짜 힘들어지는 수가 있다.
‘진짜 저거까지 필요할까요? 뭐 훈련 때 좀 힘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마운드에서 공만 던지면 그렇겠지. 근데 출루해서 달리기라도 하면 무조건 써야 해. 해발 1마일을 무시하면 안 된다.
쿠어스 필드의 해발고도는 1마일.
거의 설악산 정상에 육박할 만큼 높은 위치다. 덕아웃에 놓인 저 산소마스크는 절대 응급상황에 대비한 용도가 아니다. 실제로 격렬한 주루 플레이를 끝낸 야수들은 잠깐이라도 거의 무조건 저 산소마스크를 뒤집어쓴다.
1회 초.
쿠어스 필드의 마운드에 콜로라도 로키스의 1선발 윌 브룩스톤이 올라왔다.
작년 그는 FA를 앞두고 2.7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의 성적을 기록했었다. 그것은 특급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칠만한 좋은 성적이었다.
4년 9천만, 5년 1억 등등 많은 제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제안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7년 1억 3천만이었다. 금액은 물론이거니와 일단 기간부터가 다른 팀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멍청했어.’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여기만큼은 선택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이 동네는 정말 미친 동네다.
윌 브룩스톤의 커리어 평균 자책점은 3.41로 그 정도면 준수한 프론트라이너다.
몸 상태?
작년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을 때와 비교해서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다. 실제로 원정 2경기 15이닝 동안 그는 고작 1실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지금까지 그의 평균자책점은 무려 5.73
쿠어스 필드에서 3경기 18이닝을 뛰는 동안 무려 20점을 헌납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아니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다저스의 타선이 그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안타, 안타, 희생 플라이, 홈런, 내야 땅볼, 안타, 안타, 삼진.
그는 오늘 세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기 위해 8명의 타자를 상대했고, 3점을 내줬다.
평균자책점 6.35
1억 3천만짜리 투수가 창백한 얼굴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제 성민의 차례였다.
< 쿠어스(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