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적 없는 기레기(3) >
삼진을 집착하지 않고 과감하게 공을 집어넣는 성민의 피칭이 이어졌다.
그리고 휴스턴은 이제 강력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팀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제’에 불과했다. 전체적인 타선의 강함으로 따지자면 리그에서도 하위권에 불과했다. 게다가 오늘 경기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치러진다. 지명타자가 아닌 투수가 타석에 선다는 뜻이다.
오늘 휴스턴 타선의 강함은 굳이 비교하자면 KBO 최강의 팀이었던 재규어스보다 아주 약간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성민은 작년 정규시즌 재규어스를 상대로 3경기 22이닝 동안 고작 3점을 허용했다.
물론 성민의 정규시즌 평자책이 0.76밖에 되지 않는 투수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재규어스를 상대로 기록한 1.23은 제법 높은 평자책이다.
하지만 재규어스를 상대할 때 성민의 뒤를 받쳐주던 것은 부산 마린스의 야수들이었고 오늘 성민의 뒤를 받쳐주는 것은 LA 다저스의 야수들이다.
-딱!!
낮게 깔린 타구를 페데리코 수가 가볍게 처리했다.
이제는 긴장감조차 생기지 않는 너무 당연한 수비였다.
에드 맥밀란이 덕아웃에서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성민을 맞이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민의 공을 받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이크 올리버는 그런 에드 맥밀란의 모습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됐건 자신이 이 팀에 필수요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1년만 버텨도.’
이번 시즌 메이저 최저연봉은 59만5천 달러. 그가 작년 마이너에서 벌었던 돈의 30배에 달했다. 세금과 각종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40만 달러 가깝게 남는다. 게다가 의료보험 혜택과 62세 이후 매년 4만 2천 달러의 연금까지. 심지어 그 연금은 금액적인 손해를 감수할 경우 45세부터 수령할 수도 있다.
즉 1년만 메이저리거로 버틴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타석에 8번 타자 마이크 올리버가 올라옵니다.]
[이 선수도 참 운이 좋은 선수죠?]
[그렇습니다. 솔직히 메이저 콜업 자체가 좀 불투명하던 선수였거든요. 작년 AA에서도 0.247/0.301/0.341의 성적을 기록했었어요.]
[마이크 올리버 선수가 뛰었던 AA 리그는 텍사스 리그인데, 작년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타고투저였거든요. 리그 평균이 0.269/0.347/0.469였단 말이죠. 마이크 올리버 선수가 포수라는 점을 감안 해도 메이저에 콜업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성적이었어요.]
[하지만 너클볼 투수를 써먹기 위해서는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세금이라고 봐야겠죠. 사실 다저스 입장에서는 주전 포수인 에드 맥밀란 선수가 어떻게든 김성민 선수의 공을 받아주길 바랐을 겁니다. 사실 에드 맥밀란 선수도 어디서 포구나 블로킹으로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선수는 아니거든요.]
마이크 올리버 같은 엉망진창인 타자가 메이저에서 뛸 수 있는 것 자체가 김성민의 입지를 설명해준다. 한국의 중계진들이 돌려 돌려 성민을 칭찬했다.
타석의 마이크 올리버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메이저 세 번째 경기.
현재까지 그의 타격 성적은 8타수 무안타. 5삼진. 그는 아직 한 번도 1루를 밟지 못했다. 공을 아예 못 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치는 모든 타구는 야수들에게 잡히는 것이 당연한 형편없는 땅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명백히 메이저에서 뛸만한 기량의 타자가 아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9타수 무안타. 마이크 올리버가 시즌 여섯 번째 삼진을 적립했다.
[바로 이게 문제입니다. 저 마이크 올리버라는 친구는 그냥 공 받는 기계에요. 아니 공 받는 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방망이? 어휴, 벽이 방망이 휘두르는 거 봤습니까? 도루 저지? 블로킹? 다 엉망입니다. 그런데 왜 저런 포수를 쓰느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클볼 투수를 쓰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토니 이시카와가 잠시 숨을 고르고 준비해둔 종이에 준비해둔 대본을 읽어나갔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단지 이 경기가 끝이 아니에요. 지금 다저스는 저런 똥 같은 자식을 쓰기 위해서 25인 로스터의 한 자리를 사용하고 있어요. 25인 로스터 한자리의 가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물론 구단마다 다를 겁니다. 참고로 재작년 다저스는 로스터 한자리를 비우기 위해서 무려 2년 4,200만 달러의 계약이 남아 있던 존 앨버트를 지명 할당했습니다.]
한 잔의 물. 토니 이시카와의 비난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셔널리그 투수의 평균 타율은 1할. 사실상 내셔널리그는 여덟 명의 타자가 경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작년을 기준으로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리그의 OPS 차이는 약 0.013. 에게?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건 생각보다 큰 차이입니다. 그런데 보시죠. 다저스의 경우 투수인 김성민, 그리고 마이크 올리버까지 구멍이 두 개입니다. 그러면 과연 얼마나 큰 차이가 날까요? 물론 성민은 좋은 투수입니다. 하지만 글쎄요. 자 김성민 선수의 타석이 이어지는군요. 이제 이걸로 이번 이닝의 득점은 물 건너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타석에 성민이 올라왔다.
마운드의 투수는 휴스턴의 3선발인 알렉스 다니엘. 최고 94마일의 속구와 87마일의 슬라이더 그리고 75마일을 오가는 체인지업.
그는 어딜 가건 간에 선발의 한 자리 정도는 맡아줄 수 있을 솔리드한 투수였다.
초구 92.7마일의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자 보세요. 제 예상 그대로죠? 지금 보시면 존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는 공인데도 방망이가 따라 나오거든요. 하지만 뭐 이건 김성민 선수에게 뭐라고 할 문제는 아니죠. 사실 특별한 투수 몇몇을 제외한다면 투수에게 타격을 기대하면 안 되는 거니까요. 지금 리그에는 김성민 선수를 제외하고도 0할 타율의 투수가 무려 27명이나 됩니다. 물론 김성민 선수는 0할 타율의 투수 중에서 가장 많은 타석을 소화하긴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민이 장갑을 동여맸다.
‘이거 잘 안 되네요.’
-고작 며칠 방망이 좀 휘둘렀다고 메이저 투수들 공을 뻥뻥 두들기면, 다른 타자들이 너무 슬프지 않겠냐?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머신이나 배팅볼 투수 상대로 속구 공략할 때는 뭔가 좀 감이 오는 것 같았거든요. 구속만 보면 그쪽이 훨씬 빨랐는데 말이죠.’
-그거야 걔들은 존 안으로 정직하게 넣어줬으니 그렇지. 게다가 속구라도 메이저에서 선발을 뛰는 녀석이다. 무브먼트가 다르지.
두 번째.
92.1마일의 속구.
-뻐엉!!
“스트라잌!!”
성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진짜 무브먼트가 다르긴 다르네요. 뭔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는데 이게 안으로 들어오네요.’
-저 녀석도 나름 9년 동안 74승이나 올린 투수다. 그 정도 역량은 있다는 말이겠지.
볼카운트 0-2
그래, 고작 며칠 방망이 좀 휘둘렀다고 메이저 투수의 공을 쳐 낸다는 것은 욕심일 수도 있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속구만 주야장천으로 던지는 데 이걸 건드리지도 못하는 건 좀 짜증이 나는데요.’
-뭐, 그래도 스윙폼 자체는 많이 나아졌다. 체중 이동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말이야.
성민이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하나는 빼겠죠?’
-글쎄다. 네가 지금 마운드에 있다면 어쩔 것 같으냐.
0할 타자. 존 밖으로 속구를 던져도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고 존 안으로 집어넣어도 지켜볼 만큼 엉망진창이다. 공 하나가 아깝다.
‘그냥 냅다 집어 던지겠네요.’
-그렇겠지.
투수 와인드업.
마운드의 알렉스 다니엘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성민이 왼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92마일 중반의 구속에 타이밍을 맞추는 법 정도는 알 것도 같다. 다만 그 타이밍을 맞추려면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어디로 향할지를 지켜볼 시간이 없을 뿐이다.
야구공이 알렉스 다니엘의 손을 떠나기 무섭게 성민이 들어 올린 왼쪽 다리를 힘차게 내디뎠다.
어설픈 힙턴.
그것은 수만 번씩 방망이를 휘두른 타자들의 그것에 비하자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스윙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번 시즌 김성민 선수는 평균보다 약 1.7점 정도의 점수지원을 덜 받을 겁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차이죠. 평균자책점 2점 중반대의 투수가 4점대 투수가 돼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어?]
-딱!!
높게 치솟은 타구가 좌측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공을 얻어맞은 알렉스 다니엘의 얼굴이 꿈틀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한 필 니크로와 성민 역시 잠깐 당황했다. 그리고 두 사람 중 조금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필 니크로 쪽이었다.
-달려!!
성민이 1루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스타트는 조금 늦었지만, 성민의 속도는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손에 감각이 없어요.’
-뭐? 손에 감각이 없다고?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이야기냐?
‘아뇨, 치는 순간 손에 충격이 거의 없었다고요. 이거 설마?’
프로 짬밥만 12년째다. 야구를 한 기간은 20년이 넘는다. 완벽하게 스윗 스팟에 맞췄을 때 손바닥에 충격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 정도는 너무 많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그리고 그런 타격은 대부분 홈런으로 이어진다. 년에 홈런을 5개도 못 치는 멸치조차도 말이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니까 얼른 뛰기나 해라.
성민의 로우파워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로우파워를 전달할 타격 스킬에는 문제가 많았다. 게다가 밤의 다저 스타디움은 마운드에 선 성민에게는 같은 편이었지만, 타석에 선 성민에게는 적이었다.
타구가 좌측 담장을 넘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공정한 중계인 척 성민을 비난하던 토니 이시카와가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루타!! 이루타입니다. 김성민 선수, 드디어 메이저 마수걸이 안타가 나왔습니다.]
[빅리그 마수걸이 안타가 장타라니. 이거 대단한데요?]
[사실 김성민 선수 같은 경우 고교졸업 이후 11년이나 타격을 하지 않던 선수거든요. 하지만 역시 야구는 잘하는 사람이 잘한다고 하죠? 재능이 어디 가지를 않습니다.]
분명 행운의 안타였다.
공이 오는 코스를 제대로 지켜보고 휘두른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 스윙을 했는데 운 좋게 공이 알아서 방망이로 날아와 부딪혀 줬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행운도 93마일짜리 공에 타이밍을 맞출 스윙을 갖추지 않았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행운이기는 하지.
‘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혼잣말이니까 주루에나 신경 써라.
‘제가 신경 쓸 게 뭐 있습니까. 아직 연습도 제대로 안 됐는데. 그냥 3루에 더그웰 코치님이 시키는 대로나 움직여야죠.’
타격에 신경을 쓰겠다고 결심을 하고 고작 닷새였다.
심지어 그것도 본래 하던 훈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방망이를 휘둘렀다. 기껏해야 스윙 연습 1,000번이나 했을까?
필 니크로가 생각했다.
이 새끼 이거 정말 노력과 끈기 빼고는 부족한 게 없는 놈이구나.
그리고 같은 시간.
[아하하, 그게 그러니까. 아무리 최악의 타자라고 해도 공을 아예 못 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건 우연, 그래, 우연이죠. 아니,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성급하게 종료하지 말아 주세요. 두고 보시죠. 오늘 김성민 선수의 행운도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요.]
< 국적 없는 기레기(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