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적 없는 기레기(2) >
많은 유명인이 그렇듯 성민 역시 유튜브 혹은 포털 검색창에 종종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본다.
덕분에 유튜브의 정교한 알고리즘은 추천영상의 최상단에 김성민과 연관된 최근 가장 뜨거운 영상을 올려주었고 그렇기에 그가 토니 이시카와의 영상을 보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재밌네요. 일리도 있어 보이고.”
-이딴 영상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고?
“쿠어스가 어려운 건 사실 아닙니까. 제가 홈 경기 등판해서 이득 보는 건 사실이죠 뭐.”
-하지만 그게 네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 이건 그럴싸한 결과만 가지고 과정을 추측하는 쓰레기 영상이야. 그런데 뭐? 재미?
“네, 뭐 거기다가 대충 말하는 거 보니 야구도 제대로 모르는 허섭스레기 같은 놈인데, 80만 뷰. 뭐 보니까 조만간 몇백만은 그냥 찍겠네요. 말하는 게 제법 자극적이고 재밌어요.”
솔직히 말해서 국적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 도발적인 이야기도 아니었다. 비속어도 없고 부모님 안부도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야구를 모르는 놈이 야구 전문가인 척하는 티가 너무 났다.
-댓글들이 어마어마하군.
“영리해요. 일장기라던지, 노골적으로 중간중간 노모 히데오 선수가 쿠어스에서 노히트 한 이야기만 안 섞었어도 이 정도로 터지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죠.”
한국과 일본어의 욕설들이 난무하는 댓글창을 대충 훑어보는 성민에게 필 니크로가 물었다.
-너도 뭐라고 한 마디 남길 거냐?
“에이, 뭐 하려고요. 이거 제가 남겨주면 그게 오히려 이 녀석이 바라는 일일겁니다. 그런 멍청한 수작에 놀아나고 싶지는 않네요.”
스크롤을 내려보던 성민의 손이 어느 한 댓글에서 잠시 멈췄다.
-김성민 선수면 쿠어스고 어디고 다 폭발시켰을 거다. 야구도 제대로 모르는 자식이 헛소리 지껄이기는 pdy2007-
“아, 이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뭔데?
“있긴 하네요, 바라는 대로 놀아 나주는 어떤 멍청한 녀석이.”
***
다저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1차전.
평일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저스의 팬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삼삼오오 모인 팬들의 손에는 작은 쓰레기통이 들려 있었다. 몇몇 팬의 경우 휴스턴 유니폼에 trash can을 마킹한 채 경기장을 찾기도 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
“저 자식들은 아주 부숴버려야 해.”
메이저의 어느 커미셔너가 정의 내리기를 그저 ‘금속 쪼가리’.
다저스 팬들은 자신들이 그 ‘금속 쪼가리’를 휴스턴에게 강탈당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밝혀진 이후 다저스는 휴스턴의 가장 격렬한 안티가 됐다.
사실 야구에서 사인 훔치기는 잘못이 아니다. 당하는 쪽이 멍청한 일이다. 하지만 전자기기의 사용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난 2001년 MLB 부회장이 전자기기를 이용한 상호 통신행위를 금지하는 지시서를 통보한 이후 전자기기를 이용한 사인 훔치기는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벌써 10년도 더 이전의 월드 시리즈에서 휴스턴은 다저스를 상대로 그 규정 위반을 저질렀다. 그들은 외야 센터필드의 카메라로 사인을 훔치고 그것을 덕아웃의 모니터에 전달했으며 복도의 쓰레기통을 두들겨 그것을 선수에게 전달했다.
평범한 경기라고 해도 그런 규정 위반으로 승리를 뺏겼다면 화가 날 일이다. 하물며 그들이 뺏긴 것은, 누군가에게는 ‘금속 쪼가리’였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표로 하는 최고의 트로피였다.
규정 위반 때문에 우승을 강탈당했던 다저스 입장에서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와우, 사람들 진짜 많네?”
“상대가 휴스턴이니까. 3년 만에 돌아오는 매치잖아. 저 자식들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할 리는 없으니까 말이야. 이 정도면 거의 축제지 뭐.”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 간에 인터리그는 매년 시행하는 라이벌 매치, 그리고 격년으로 시행하는 스플릿 라이벌 매치와 3년을 주기로 돌아가는 디비전 단위의 경기로 구분된다.
지난 쓰레기통 사건 이후 다저스가 휴스턴에 갖는 감정은 어지간한 라이벌 매치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격렬했다. 하지만 사무국 입장에서는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계기로 하는 라이벌 매치를 만들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다저스가 휴스턴에게 분풀이를 할 기회는 오직 3년마다 순환하는 디비전 단위의 인터리그뿐이었다.
“축제가 되려면 일단 이겨야겠지?”
“당연하지.”
선수들 역시 휴스턴을 상대로 하는 만큼 그 각오가 남달랐다.
사실 현재 팀의 로스터에 당시 휴스턴에게 우승컵을 뺏겼던 멤버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다저스의 멤버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해도 그들이 남긴 정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휴스턴에 별다른 원한이 없는 성민마저도 휴스턴을 상대로는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는 것은 휴스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벌써 10년도 훨씬 지난 일이었다.
당시 휴스턴에서 뛰었던 선수는 남지 않았다. 당시의 감독과 단장은 진즉에 짤렸으며 당시 사건을 주도했던 선수 가운데 휴스턴에 남아 있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휴스턴에서 뛰는 선수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먹을 이유가 없는 욕을 먹는 상황이었다.
“하여간, 저 새끼들은 지겹지도 않은가? 아니 쓰레기통을 우리가 했어? 그 사람들은 전부 은퇴하거나 다른 팀에서 뛰고 있는데 왜 우리한테 저러는 거야. 내가 이래서 진짜 다저스 원정이 싫다니까.”
“그냥 내버려 둬. 흥분할 이유 하나도 없어. 저 자식들 진짜 열받게 해주는 건, 우리가 흥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오늘 경기에서 이겨버리는 거야.”
휴스턴의 타자들이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경기장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타석에 1번 타자, 아론 브라이언, 아론 브라이언 선수가 들어옵니다.]
[아론 브라이언, 젊지만 참 대단한 선수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오늘 김성민 선수가 가장 주의해야 할 선수라고 봅니다.]
한국 중계진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성민 역시도 오늘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 가운데 아론 브라이언을 가장 위협적인 선수로 꼽고 있었다.
쓰레기통 스캔들 이후로 휴스턴은 꾸준히 하위권을 맴돌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2년 연속 드래프트 1, 2라운드 권을 박탈당했고 현대 야구에서 그 드래프트권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그들은 쓰레기통 스캔들 직후 전체 승률 29위와 28위를 했기에 드래프트권 박탈의 여파는 더 심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FA 선수들 역시 휴스턴으로 가는 것을 꺼려했다. 터지기 시작했던 휴스턴의 선수들 역시 휴스턴에 남는 것을 꺼려한 것은 기본이다.
아론 브라이언은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하위권을 전전하던 휴스턴이 만들어낸 희망이었다. 올해로 24세. 데뷔 2년 차였던 2032시즌부터 작년까지 2년 연속 3할 타율에 4할 출루율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그는 스타성이 있었다.
과거 스카우트들 사이에는 파워, 스피드, 컨택, 수비, 어깨의 5툴에 이어 6툴 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handsome blonde(잘생긴 금발)
아론 브라이언은 그 여섯 번째 툴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야, 얘 무슨 모델이야? 왜 혼자 얼굴에서 빛이 남?-
-아론 브라이언 모름? 메이저리그 최고 미남. 거기다가 야구까지 잘해서 차세대 원탑 스타로 유명하잖아. 아마 패션잡지나 화보 같은 거 엄청 찍었을걸?-
-우리 성민이도 어디 가서 딸리는 얼굴이 아닌데, 쟨 뭔가 격이 다른 느낌인데?-
-근데 양키들 보기에는 성민이도 만만치 않을걸? 성민이는 무쌍에 좀 귀엽게 잘생긴 얼굴이잖아. 그런 주제에 피지컬은 저 모양이고. 우리야 서양적인 얼굴 좋아하니까 그렇지. 양키들은 또 성민이 같이 생긴 거에 환장할 거임.-
-에이 그것도 정도가 있지. 양키들도 금발에 전형적인 미남 스타일을 최고로 치긴 함.-
-근데 뭐가 어찌됐건 진짜 야구 빠따 들고 있는데 그냥 화보네.-
-됐어, 야구 선수는 야구 잘하는 게 잘생긴 거야. 그러니까 얼평은 이제 그만하자.-
-근데 아론 브라이언은 야구도 잘하는데?-
엉망진창이 된 휴스턴의 이미지를 쇄신해줄 차세대 스타.
타석에 선 아론 브라이언이 라미네이트 된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마운드의 성민이 초구를 준비했다.
91.4마일의 빠른 공.
아슬아슬하게 존을 빠져나가는 그 공을 아론 브라이언이 두들겼다.
-딱!!
결과는 1루 내야 관중석으로 들어가는 파울.
+++
[와우, 아슬아슬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지금 이 공, 만약 쿠어스였다면 무조건 담장 넘어갔을 것 같군요. 아, 타구 방향이요? 에이, 다들 쿠어스를 잘 모르시는데 쿠어스가 그러니까 공기저항. 그래 공기저항이 달라서 속구도 덜 떠오르거든요. 그래서 더 쉽게 정타를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면 뭐 쿠어스에서는 그냥 홈런이었다. 그런 이야기죠.]
토니 이시카와는 실시간 유튜브 방송을 시도했다.
물론 메이저리그 경기 영상을 송출하는 미친 짓거리를 벌이지는 않았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멍청한 짓을 벌이는 것이지, 진짜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직접 경기를 관전하고 그 경기 영상은 띄우지 않은 채 해설만을 하는 이상한 짓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한 화면에 두 개의 채널을 띄우는 기술 정도는 일상이었다. 놀라우리만큼 많은 사람이 한쪽 화면에는 경기 영상을 틀어둔 채 음소거를 한 채로 한쪽 화면에는 토니 이시카와의 영상을 틀었다.
+++
아론 브라이언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 있는 코스였는데 아쉽게 빗나갔다. 초구로 이렇게 과감한 공을 던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게다가 성민이 던지는 포심의 경우 평균 미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우완 투수의 91마일짜리 공 치고는 제법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도 계획대로군.
‘마치 영감님이 계획 세우신 것처럼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자신 있는 코스에 살짝 벗어나게 던져서 파울 유도하는 건 제 계획이었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이건 성공한 게 다행인 미친 계획이었다.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갔어도 위험한 코스였어.
‘원래 생각했던 코스보다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저 친구 애초에 기다리던 공이 고속너클볼이었어요. 방망이 타이밍도 늦었고, 아마 안쪽으로 몰렸으면 외야 플라이였을 겁니다. 여긴 마린스가 아니에요. 애들 수비 되게 잘한다고요.’
-뭐, 확실히 그건 그렇지.
수비 믿고 던지면 안 되지. 내가 잡아야지. 내가 이겨야 한다. 이 타자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 삼진으로 무조건 잡아야 한다.
마린스에 있던 당시, 성민은 저런 생각으로 경기를 풀어나갔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저스에 온 직후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었다. 머리로는 물론 다저스는 마린스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쉽게 변하기 힘들고, 성민의 경우 11년에 걸쳐 학습된 일인 만큼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한 달간의 시범경기와 두 번의 경기. 특히 지난 경기에서 신이 들린 것 같았던 야수들의 수비를 지켜보면서 노력을 해서라도 그 마음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메이저리그였다.
다저스의 1선발이자 리그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는 디아고 헤밍턴조차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는 경기를 풀어나가지 않았다.
애초에 삼진에 대한 강박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투수에게는 약점이 된다. 타자가 투수의 선택지를 더 쉽게 추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작 메이저 3번째 등판.
성민이 마린스와는 급이 다른 다저스의 수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민을 경쟁하던 다른 팀들이 예상했던 성민의 최대치에 가장 근접한 결단이었다.
-딱!!
존의 복판으로 들어가는 60.9마일의 느린 너클볼.
아론 브라이언이 1루를 밟지 못했다.
< 국적 없는 기레기(2) > 끝
ⓒ 묘엽
작가의 말
ㅅrㅈr님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100화 기념 후원금 고맙습니다.
이전 글 때부터 항상 보내주시는 응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