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뷔전(3) >
내셔널리그는 지명타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딱!!
[페데리코 수 쳤습니다!! 우익수 달려봅니다만 늦습니다!!]
6번 타자의 이루타.
타석에 들어서는 7번 타자.
그리고 아웃 카운트는 아직 1개.
‘이거 나까지 오는 상황 맞죠?’
-그러게. 최소한 대기 타석까지는 들어가야 할 것 같구나.
내셔널리그의 투수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타격을 연습하는 투수들도 있다.
물론 소수다. 대부분은 팀 차원에서 아주 짧게 하는 타격 훈련에 만족한다. 애당초 팀에서도 투수들이 타격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을 기껍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뻐엉!!!
볼넷.
주자 1, 2루.
타석에 8번 타자인 마이크 올리버가 들어갔다.
딱딱한 플라스틱 헬멧과 어색한 방망이.
물론 성민도 한때는 4번 타자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8년쯤 전? 초등학교 3학년 때? 대부분 프로 선수가 그렇듯 그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성민 역시 에이스와 4번 타자를 겸임했었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18년쯤 되면 나무 방망이도 썩어 문드러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서 기본적인 타격 연습을 했지만, 방망이를 손에 쥐는 것 자체가 여전히 어색하다.
성민이 자신의 타석을 준비했다.
‘후, 진정하자.’
마이크 올리버가 자기 자신에게 되뇌었다.
오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린 곳은 2,200만 달러짜리 투수의 메이저 데뷔전이었다. 하지만 오늘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것은 성민만이 아니었다. 작년 연봉 총액 2만7천 달러를 받았던 어떤 포수 역시 오늘 경기가 생애 최초의 메이저 경기였다.
조금 전 1회 초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사람. 날아오는 공과 박수 소리 밖에는.
마운드의 에드윈 로페즈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부웅!!
“스트라잌!!”
야구공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이크 올리버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1사 주자 1, 2루의 상황이다. 공격의 흐름을 이렇게 끊어먹을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꽉 찬 코스다.
-부웅!!
“스트라잌!!”
착각했다. 존 밖으로 완전히 빠지는 슬라이더였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그 순간까지 구분할 수 없었다. 마운드의 에드윈 로페즈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1회에만 4실점. 숨이 턱턱 막히게 강력한 다저스 타선다웠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녀석은 다르다. 너클볼용 포수라고 하더니 메이저 수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애송이다.
‘숨 돌릴 틈을 주는구만.’
어떻게 할까? 그래 땅볼로 병살을 유도하자. 체인지업이다.
세 번째. 72.1마일의 체인지업.
에드윈 로페즈의 의도처럼 마이크 올리버의 방망이가 망설임 없이 따라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생각과 달랐다. 마이크 올리버는 에드윈 로페즈의 예상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타자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
성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긴장하지 말고.
‘긴장은 무슨, 제가 지금 그런 걸 왜 합니까.’
타석에서 바라보는 경기장의 풍경은 특별했다. 저 멀리 흩어져있는 일곱 명의 야수들. 마운드에서 볼 때는 너무 가깝게 느껴졌는데, 타석에서 볼 때는 또 너무 멀어 보인다. 그리고 남들보다 10인치 높은 곳에서 그를 바라보는 투수.
투수의 높이는 생각보다 높았다. 다른 타자들이 성민 자신을 볼 때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일까?
마운드의 투수가 힘차게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빠르다.
방망이를 내밀었을 때 이미 공은 포수의 미트를 두들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공이 빠르네요.’
-저게?
필 니크로가 전광판을 힐끔 바라봤다.
91.7마일.
147.6km/h. 성민이 헛웃음을 지었다.
‘제 공이 이렇게 빨랐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이건 애초에 빠른 공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메이저 평균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구속.
하지만 전문적인 타자가 아닌 성민이 느끼기에는 너무 빨랐다. 에드윈 로페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그런 투수들이 있다. 마치 전문적인 타자들 만큼이나 방망이를 잘 휘두르는. 그런 투수들은 보통 스윙부터가 범상치 않다.
하지만 오늘 마운드에 오른 저 동양인 투수는 그런 종류의 투수는 아닌 것 같았다.
‘쉬어가는 턴이 두 턴이라니 나쁘지 않군.’
그리고 그런 종류의 투수를 상대로는 굳이 어려운 승부를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속구
-부웅
“스트라잌!!”
볼카운트 0-2.
2구 연속 헛스윙. 과연 상대 투수가 어떻게 나올까?
‘일반적이라면 공 하나 빼겠죠?’
-일반적이 아니라도 그렇겠지. 지금 너를 보면 치겠다는 의도가 너무 훤히 보이니까. 굳이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지. 눈먼 타자의 방망이라도 일단 맞아 나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니.
결정구로 슬라이더를 가진 투수다.
밖으로 슬쩍 빠지는 슬라이더가 나올 타이밍이었다.
성민이 세 번째 공을 참았다.
-뻐엉!!
“스트라잌!!”
존의 복판에 틀어박히는 92.1마일의 시원한 속구였다.
‘이거 지금 그거 맞죠?’
-어. 그거네. 유인구 하나 던질 힘도 아까운 그거. 왜? 기분 나쁘냐?
‘기분 나쁠 게 뭐 있습니까. 어차피 난 투수인데. 거기다 저라도 이렇게 던졌을걸요?’
-그래, 그러면 됐다. 어차피 넌 투수야. 마운드에서만 자기 할 일을 다 하면 된다.
‘그래야죠. 어휴, 괜히 대기 타석부터 여기까지 어깨만 식었네요. 얼른 몸이나 풀어야겠어요.’
[김성민 선수, 루킹 삼진. 하지만 아쉬워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 점수는 4:0이고 굳이 투수가 출루해서 체력을 소비하는 것보다 피칭에 집중하는 쪽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되거든요.]
[그보다 전 조금 걱정인 것이 고등학생 때야 타석에도 서고 마운드에도 섰다지만, 지금 김성민 선수가 투수로 출장해서 타석을 소화 안 한 것이 벌써 11년이거든요. 이게 루틴이라는 것이······.]
[아, 하긴 그렇죠. 가만히 덕아웃에서 몸을 데우다 나오는것과 저렇게 찬바람을 쐬고 다시 마운드에 나오는 건 또 다르죠.]
한국의 해설자들이 전지적 김성민 시점의 해설을 이어갔다. 물론 이들의 해설이 송출되는 것은 오직 한국이었기에 그것에 태클을 거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설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팬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이렇게 공중파에 경기가 중계되는 것 자체가 김성민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2회 초.
마운드에 성민이 다시 올라왔다.
가벼운 피칭.
5개의 연습구가 오고 갔다.
한국에서 뛰던 시절에도 공격이닝을 길게 가졌던 적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타석에 섰다가 곧바로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느낌은 또 남달랐다.
-어깨와 팔꿈치의 근육이 딱딱하다. 몸을 다시 푼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기어를 올려. 너무 성급하게 가지 말고.
필 니크로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성민 스스로도 영점이 조금 흐트러졌음을 느꼈다. 타석에 파드리스의 4번 타자. 에드가 드로고가 올라왔다. 이 남자야말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로베르토 부시의 남은 계약 기간 동안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돈을 쓴 증거였다.
7년 2억 1천만.
최근 총액 3, 4억짜리 계약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탓에 조금 적어 보이기는 했지만 파드리스만한 팀에서 7년 2억 1천만은 절대 쉬운 금액이 아니었다.
에드가 드로고는 그를 케어하는 에이전시의 광고처럼 우익수와 삼루수 일루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최근 경향에 맞는 멀티 포지션 플레이어라는 말은 완벽하게 헛소리였다. 그가 평균 수준으로 소화할 수 있는 포지션은 오직 일루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절대 2억 1천만이라는 금액이 아까운 선수가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자면 그런 소리가 헛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2억 1천만이 아까운 선수가 아니라는 부분이 그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작년 그의 wRC+는 무려 144. 양대리그를 통틀어 그보다 높은 조정 득점 창출력을 기록한 선수는 오직 여덟 명뿐이었다. 계산식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그가 타격으로 팀에 더해준 승리는 4승가량.
수비를 포함할 경우 약 3.4번의 승리를 팀에 더했다.
스타일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최소한 타격에 있어서만큼은 에드가 드로고는 로베르토 부시에 뒤지는 남자가 아니었다.
-부웅!!
지금까지 성민이 경험했던 가장 위압적인 스윙은 KBO 시절 빅터 마르테의 그것이었다. 여자 허벅지만한 팔뚝으로 휘두르는 방망이에는 빗맞더라도 담장을 넘겨버릴 것 같은 괴력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성민은 에드가 드로고의 스윙에서 빅터 마르테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다.
-조심해라.
‘저도 압니다. 작년에 리그 홈런 4위. 39홈런.’
샌드 에이고 파드리스가 홈으로 사용하는 펫코 파크는 리그에서 순위를 다투는 투수 구장이다. 해발고도 0m. 해안가에서 불어오는 짠 바람과 넓은 외야까지. 에드가 드로고는 그런 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무려 39개의 홈런을 쳤다. 많은 전문가가 입을 모아 말하기를 만약 에드가 드로고가 타자구장을 홈으로 했더라면 50홈런도 너끈했을 것이라 했다.
초구.
72.1마일의 빠른 너클볼.
로베르토 부시에게 던졌던 그 공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비록 구속은 조금 느렸지만 공의 변화 만큼은 그에 뒤지지 않았다.
-부웅!!
에드가 드로고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건드리면 그대로 넘어갈 것 같은 투수를 긴장시키는 압도적인 스윙이다.
필 니크로가 성민을 살폈다. 겁에 질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강력한 집중력뿐이다.
두 번째.
61.7마일의 느린 너클볼.
-뻐엉!!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필 니크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걸 안 잡아 준다고?
‘영감님도 KBO 경기를 너무 오래 보셨네요. 메이저는 원래 좌우로 존이 좀 짜다면서요.’
-그야 그렇지만, 분명 이전 이닝에 에드윈인가 하는 저 녀석은 이 코스로 들어오는 공도 잡아줬잖아.
‘너클볼이라 좀 헷갈렸나 보죠. 그리고 에드윈 로페즈야 짬밥 엄청 되는 베테랑이고, 전 여기서는 루키잖아요.’
아쉽기는 했지만, 필 니크로가 대신 화를 내준 덕분에 오히려 더 침착해졌다. 아슬아슬한 공을 잡아주지 않는 것은 아쉬웠지만 저런 괴물같은 타자를 상대로 복판에 공을 던질 생각은 없었다.
직전 이닝처럼 완벽에 가까운 공조차 담장까지 날리는 게 메이저리그의 괴물들이다. 그리고 지금 타석에 서 있는 에드가 드로고는 파워에 있어서는 그 괴물들 가운데서도 최고봉에 가깝다.
성민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92.3마일.
존을 제법 벗어나는 속구였다.
-딱!!!
높게 뜬 타구가 시원하게 내야 관중석을 두들겼다.
볼카운트 1-2
네 번째.
73마일의 고속너클볼.
‘아!’
약간의 아쉬움. 실투는 아니다. 다만 원하던 ‘잘 던진’ 너클볼 역시 아니었다. 회전수 3.4번. 이번 이닝 던진 너클볼 가운데 가장 덜 변화하는 공이 존의 복판으로 날아갔다.
에드가 드로고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강철같은 근육이 30.5온스. 865그램짜리 방망이를 마치 1그램짜리 이쑤시개처럼 휘둘렀다.
-딱!!
신화 속 영웅을 연상케 하는 괴력의 타자.
날아간 공은 최고라고 하기 힘든 너클볼.
하지만 부족하지 않았다.
빗맞은 타구가 페데리코 수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웃!!”
최고의 공조차도 담장을 넘길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이곳 메이저리그다. 그리고 에드가 드로고는 그런 괴물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마운드에 선 성민 역시 그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가장 많은 괴물을 수집한 팀의 2선발. 사이 영에 도전할만한 자격을 지닌 진짜배기 ‘메이저 리거’였으니까.
[다저스 2차전 11:1 완승. 개막전 이후 쾌조의 2연승.]
[김성민 데뷔전 7이닝 4피안타 1볼넷 1실점. 첫 승 수확!!]
-와, 뭐지? 왜 7회에 내려갔는데 추가점이 없는 거지?-
-뭔가 이상해. 야수는 공을 잡고, 불펜은 스트라이크를 잡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 데뷔전(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