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99화 (100/287)

< 데뷔전(2) >

이어지는 2번 타자.

60.3마일의 느린 너클볼이 춤을 췄다.

-딱!!

분명 빗맞은 타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구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1루와 2루 사이로 쏜살같이 날아가는 타구. 이루수인 마르타 블랑코가 짐승 같은 감각으로 타구의 방향을 감지하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바닥을 두 번 튕긴 야구공이 그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일루를 향해 공을 던지기에는 조금 늦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저 멀리 있던 페데리코 수가 어느새 그의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으니까.

[페데리코 수, 공 받아서 일루에!!]

“아웃!!”

투아웃.

필 니크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야구지.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의 팬들은 당황했다.

-저거 뭐야? 저 타이밍에 유격수가 저기까지 나와 있는 건 뭐고, 이루수가 그 유격수한테 글러브에서 공도 안 빼고 정확히 토스하는 건 또 뭐고, 그 토스 받은 공을 맨손으로 잡아서 정확하게 일루수한테 던지는 건 또 뭐야?-

-마린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고오급 수비.-

-이분들 시범 경기 한 번도 안 본 분들이구나. 다저스에서는 저게 일상입니다.-

-나도 깜짝 놀랐음. 근데 진짜 일상임. 성민이가 괜히 이번에 실점을 죄다 홈런으로만 한 게 아니라니까.-

-이번 시범 경기에서 실점=자책점이었던 것도 저런 고오급 수비 덕분이지.-

-에이, 이 사람들이 누굴 바보로 아나. 아니 어떻게 저게 일상일 수가 있습니까. 마린스에서는 하이라이트 필름으로도 안 나오는 수비인데.-

-자자, 위에 마린스 팬분 울지 말고 침착하게 말로 합시다.-

타석에 파드리스의 3번 타자 로베르토 부시가 올라왔다. 바로 어제 디아고 헤밍턴을 상대로 3타수 2안타 1홈런을 쳐냈던 그 타자다. 산만 한 덩치와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발. 타고난 툴 자체가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이다.

초구.

73.7마일의 너클볼.

공을 던지는 지금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었지만, 손끝의 감각이 좋았다. 이건 잘 던진 너클볼이다.

MVP급 타자였던 케빈 체임벌린도 뭐 이딴 공이 다 있냐? 라고 했던 바로 그 공이다.

로베르토 부시는 천재였다.

순수하게 운동능력만을 측정했을 때 그의 운동능력은 NFL을 기준으로도 평균에 버금간다. NFL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고작 그 정도로 천재? 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식 축구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에게 NFL 선수들의 평균에 버금가는 신체 능력이라는 말은 괴물의 동의어라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곳은 약물 검사 자체를 제대로 안 하는 곳이다. 1년에 딱 한 번. 그것도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리그 자체적으로 시행한다. 심지어 MLB에서는 금지된 약물 상당수가 아직 금지약물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신체에서 가장 괴물 같은 점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 운동능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협응력.

신체에 두 가지 이상의 기능을 동시에 활용할 때 가장 적절하게 자원을 배분하여 활용하는 일종의 재능이다.

이것은 복합적인 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인데, 로베르토 부시는 이 부분에서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로베르토 부시가 미식축구나 농구 대신 야구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성민의 공을 쫓았다.

오른쪽, 왼쪽, 아래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 아니 덜 떨어진다.

로베르토 부시의 방망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민의 공은 변화를 멈추지 않았다.

단단하게 고정된 머리. 로베르토 부시의 눈이 그 공을 쫓았다. 움직이는 방망이가 미세하게 수정됐다.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고작 3미터 앞에서 움직이던 방향을 휙 하고 틀어버린 공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로베르토 부시의 방망이가 공의 하단을 두들겼다.

-딱!!

타구가 높게 떠올랐다.

빗맞았음에도 타구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우측 방면 빠르고 강한 타구였다. 우익수 세실리아 마토스가 빠르게 질주했다.

4년째 다저스타디움의 외야를 지킨 그의 감각이 소리쳤다.

‘안 넘어가.’

한여름 낮시간의 다저 스타디움이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이라면!!

담장 앞에서 네 걸음.

높게 들어올린 그의 글러브에 타구가 쏙 들어갔다.

아웃!!

1루를 향해 뛰어가던 로베르토 부시가 혀를 찼다.

터무니없는 공이었다. 고작 74마일도 되지 않는 느린 공이 이렇게 까다로울 줄이야. 아니, 어떻게보면 저만한 변화를 보이는 주제에 74마일이나 되는 속도인 것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구단에서 고용했던 너클볼 투수가 던지던 공과 같은 구종이라고 믿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가 던지던 공과 이 공이 같은 것은 너클볼이라는 분류 안에 들어간다는 것뿐이다. 마치 로베르토 부시 자신과 저기 루키리그의 타자 A가 같은 타자라는 분류 안에 들어간다는 것처럼.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로베르토 부시가 속으로 투덜댔다.

‘그 너클볼 투수는 당장 해고하라고 말해줘야겠어. 수준 차이도 어느 정도 나야지 도움이 되지.’

물론 메이저 구단에서 특별히 고용한 배팅볼 투수가 어설픈 수준일 리는 만무하다. 그 역시 독립리그에서 제법 잘 나가는 투수다. 아마 현실적으로 고용 가능한 최고 수준의 투수일 것이다.

단지 그 현실적으로 고용 가능한 최고 수준의 투수와 성민의 격차가 너무 아득할 뿐이다.

마운드 위에서 멋지게 공을 잡아낸 세실리아 마토스를 잠시 기다리던 성민 역시 혀를 내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와, 지금 진짜 엄청 잘 던진 것 같았는데 혹시 제 착각이었나요?’

-아니, 지금까지 네가 던졌던 모든 공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좋은 공이었다.

‘그런데 그런 공을 저기까지 날린다고요? 솔직히 방금 이건 마린스였으면 이거 무조건 이루타인데?’

필 니크로에게 너클볼을 전수 받은 이래, 성민의 적은 실투, 그리고 같은 팀의 수비와 불펜이었다. 완벽하게 제대로 들어간 공이 공략당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물론 방금도 완벽하게 공략당했다고 보기엔 힘들었다. 어쨌든 외야플라이로 끝이 났으니까.

하지만 만약 지금 이 경기가 낮시간 경기였다면? 어제 디아고 헤밍턴이 허용했던 홈런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마린스라면 이루타였다고? 김성민!! 다시는 마린스를 무시하지 마라. 마린스였다면 인사이드 파크 모텔이다.

‘아, 쫌. 저 지금 나름대로 진지하거든요.’

-성민아. 메이저리그를 얕보지 말아라. 설사 내가 보여줬던 그 공을 던질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언제 어떤 괴물이 그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버릴지 모르는 곳이 메이저다.

아무리 잘 던진 공이라도 그것이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또한, 너클볼을 배우기 이전에는 완벽하게 제구된 공이 담장 밖으로 뻥뻥 날아가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해봤다. 하물며 이곳 MLB의 평범한 타자는 당시 그곳에서 성민의 공을 뻥뻥 날려대던 KBO의 가장 뛰어난 타자보다 훌륭하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저는 메이저다. 뭐 그런 거네요.’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너클볼러는 언제나 자신의 공을 믿어야 한다.

‘당연하죠. 그리고 애당초 로베르토 부시 정도면 정말 메이저 최정상의 타자잖아요. 저런 괴물이 해냈다고 제 공을 의심할 필요는 없죠.’

-그래, 바로 그거다.

덕아웃으로 달려오는 세실리아 마토스와 손바닥을 마주쳤다.

“좋은 수비였어.”

“좋은 수비는 무슨. 당연히 해야 하는 수비였지. 가만히 보면 성민 너는 너무 당연한 수비에도 과하게 칭찬을 해주는 경향이 있어. 뭐 기분이야 좋지만 말이야.”

당연히 해야 하는 수비라니.

성민이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경기가 계속 됐다.

오늘 파드리스의 선발은 에드윈 로페즈. 커리어 14년 동안 197승을 거둔 선발 투수였다. 물론 이제 슬슬 하락세에 접어들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프런트라이너로 구분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다저스의 타선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오늘 선두타자는 어제 경기 1회 말 동점 솔로 홈런을 쏘아올렸던 마르타 블랑코.

그는 2할 후반대의 타율 4할을 오가는 출루율. 그리고 매년 20개의 홈런을 기대할 만한 파워까지 갖춘 리그 최고 수준의 리드 오프다.

-부웅!!

“스트라잌!!!”

-부웅!!!

“스트라잌!!”

2구 연속 스윙 스트라이크.

필 니크로가 중얼거렸다.

-설마, 또 그 패턴인가?

‘무슨 패턴이요?’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잖아. 네가 잘 던지면, 이상하게 상대 투수들도 잘 던지는 거. 그리고 잘 치던 타자는 갑자기 선풍기가 되지.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적으로는 강하던 녀석들이 같은 편이 되면 귀신처럼 약해지는 것처럼 말이야.

‘언제 그랬었냐!! 고 말하기에는 확실히 좀 그런 감이 있긴 했죠.’

-그래, 아무리 박태경이랑 권혁준 차이가 있다고 해도 평균 득점 지원이 반올림해서 2점이면 그건 심각한 차이였다고.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딱!!

[쳤습니다!! 마르타 블랑코!! 2-유간 밀어친 타구!! 가볍게 일루까지!!]

“세이프!!”

마르타 블랑코가 무사히 일루를 밟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볼넷, 적시 이루타, 희생 플라이,

그리고 케빈 체임벌린의 2점 홈런.

“좋았어!!”

오늘 덕아웃에서 대기 중이던 에드 맥밀란이 덕아웃 입구로 달려가 케빈 체임벌린과 손바닥을 부딪히며 특유의 세레머니를 했다.

그 모습을 촬영하던 카메라가 옆에 앉아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던 성민을 담았다.

1회 말 순식간에 점수는 4:0

아직 아웃 카운트는 하나에 불과했다.

성민의 그 멍한 표정이 TV를 통해 한국까지 중계됐다.

-억, 김성민 문화충격 ㅋㅋㅋ-

-김성민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마르타 블랑코 ‘마 이게 다자쓰의 맛이다.’-

-근데 진지빨고 말하자면 성민이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음.-

-걱정? 갑자기 무슨 걱정?-

-솔직히 KBO 있을 때 마린스도 1회부터 대량득점 했던 적 있긴 있었음.-

-하긴, 그건 또 그렇지.-

-근데 마린스는 1회에 대량 득점하면 보통 둘 중 하나였거든. 2회부터 에러를 겁나 하면서 추가 득점이 없던지, 2회부터 에러를 겁나 하면서 추가 득점도 없는데 불펜이 올라와서 방화까지 하던지.-

-잠깐만, 2회부터 에러를 겁나 하면서 추가 득점이 없는 건 디폴트 값이었던 거야?-

-그렇지. 그건 변수가 아니야. 상수였어.-

-성민아 진정해. 거긴 마린스가 아니야. 다저스라고.-

[타석에 다저스의 6번 타자 페데리코 수 선수가 올라옵니다.]

[저 선수 작년 타격 성적이 0.271/0.349/0.393였죠? 리그의 모든 유격수 가운데 손에 꼽을 만큼 훌륭한 성적입니다.]

[최근 리그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선수가 다저스니까 지금 6번을 치고 있는거지, 다른 팀이었다면 상위 타순이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은 성적이에요.]

성민의 혼란과 함께 다저스의 공격이 계속됐다.

< 데뷔전(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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