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섞여들다(3) >
케빈 체임벌린과 일단 친해진 이후부터 다저스의 선수단에 섞여 들어가기는 한층 쉬워졌다. 아니, 쉬워진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선수들 쪽에서 먼저 성민에게 접근해왔다.
“오늘 저녁 끝나고 마르타 집에서 비디오 게임 할 건데 참가할 생각 있어요?”
“비디오 게임?”
“네, 게임도 하고 가볍게 맥주도 한잔하려고요.”
남자들끼리 가장 쉽게 친해지는 것은 역시 게임이다. 그것은 수백억을 벌어들이는 스포츠 스타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플레이되는 언어는 달랐지만, 비디오 게임의 조작 자체는 다르지 않다.
산만 한 덩치의 야구 선수들이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축구게임을 즐기며 웃고 떠들었다.
“와우, 한국인들이 게임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는데요?”
“글쎄, 내가 잘한다기보다는 페데리코 네가 너무 못하는 게 아닐까?”
“뭐라고요?”
마르타 블랑코의 집에 정기적으로 모이는 선수들의 페데리코를 포함해서 다섯 정도.
성민이 판단하기에 이들은 특별한 리더는 없지만, 케빈 체임벌린과는 조금 결이 다른 다저스의 주축 선수들이었다.
-특별히 나쁜 말을 하고 있진 않아. 얼추 페데리코가 전해주는 말과 비슷해.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너를 자신들과 동류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
‘케빈이랑 사이는 좀 어떤 것 같아요?’
-너희 마린스처럼 막장은 아닌 것 같군. 그냥 조금 따로 놀기는 하지만, 그래도 특별히 상대방을 싫어하는 기색은 없어. 따로 노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언어 때문인 것 같고.
라이브 볼 시대 이후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보면 크게 두 번의 질적 성장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45년 재키 로빈스의 등장으로 대두되는 흑인들의 참가. 두 번째는 1958년 펠리페 알루 이후 급증한 중남미 라티노들의 참가가 그것이다.
현재 메이저리그에 소속된 선수의 37%가량이 라티노다. 다저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 모인 다섯 명의 선수들이 다저스의 라티노 전원이 아니다. 이들은 다저스의 라티노 가운데서도 절대 25인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선수들이다.
‘뭐, 그렇다면 굳이 한 쪽만 고를 필요는 없겠네요.’
-왜? 또 뭘 하려고?
‘별 건 아니고. 이것 좀 알려주세요.’
케빈 체임벌린으로 대표되는 영어권 선수들, 그리고 마르타 블랑코로 대표되는 히스패닉계 라티노들.
성민이야 어차피 언어는 전용 통역사나 마찬가지인 필 니크로의 도움을 받는 처지였다. 굳이 어느 한쪽만 친하게 지낼 이유는 없었다.
“자, 한 판 더 하자고.”
외국인이 자기 나라말을 해줄 때 환영하는 것은 영어권을 제외한다면 세계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성민의 어설픈 스페인어에 마르타 블랑코를 포함한 라틴계 선수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뭐야? 스페인어 할 줄 아는 거야?”
“할 줄 알았으면 진작 이야기하지 그랬어.”
“잘은 아니고 조금. 알아듣기 힘드니까 천천히. 오케이?”
성민이 히스패닉계 선수들의 호감을 단단히 샀다.
***
시범 경기 일정이 거듭될수록 라커룸을 떠나는 선수들이 늘어났다.
스프링 트레이닝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74명에 달하던 인원은 어느새 46명까지 줄어들었다.
“뭐야? 오늘은 게일이야?”
“월쳐도 함께야.”
“휘유, 월쳐라면 그래도 작년 확장 로스터에서 제법 잘했는데 가차 없구만.”
“아무래도 그 녀석은 아직 옵션이 남았으니까. 뭐 만약 올린다고 해도 8월 이후 아니겠어?”
복작복작하던 라커룸이 제법 한산해졌다.
‘게일의 라커가 빠졌다고?’
마이크 올리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게일 윌콕스라면 팀의 네 번째 포수다. 아직 40인에도 포함되지 못한 것은 자신과 같았지만, 그는 작년 상반기 BA 포수 부문 20위에 이름을 올린 제법 괜찮은 유망주였다. 물론 그가 마이너로 먼저 떠나고 마이크 올리버 자신이 남은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었다.
시즌 중에 올라올 것이 분명한 월쳐 역시도 이번에 같이 내려가지 않았던가. 기량은 충분하지만, 아직 팀의 사정상 빅리그에 뛸 수 없는 녀석들은 종종 이렇게 마이너 캠프로 먼저 보내서 더 많은 경험을 쌓게 해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았다.
지금까지 성민이 등판했던 경기는 총 네 번. 그리고 마이크 올리버는 성민이 등판한 모든 경기에 포수 마스크를 썼다. 성민이 평범한 투수라면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너클볼 투수다.
‘분명 R.A 디키의 전담포수인 조시 톨 리가 토론토에서 0.200/0.275/0.248로 4년을 버텼었지.’
그것도 R.A 디키가 은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더 긴 시간 빅리그에 엉덩이를 비볐을 것이 분명했다.
마이크 올리버는 자신의 수준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앞으로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쉽게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확실하게 인식했다.
성민과 친해져야 한다.
‘그런데 영 힘들단 말이지.’
성민은 일반적인 동양인들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사교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언어적인 능력 역시 대단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영어와 스페인어 모두 상당한 수준의 의사소통을 해내고 있다. 비록 발음은 조금 어눌했지만, 외국인치고 그 정도면 훌륭하다.
고작 3주 남짓한 시간 만에 성민은 팀의 주전급 선수들 사이로 훌륭하게 섞여들었다.
‘그렇다면 역시.’
마이크 올리버가 결심했다.
공짜 저녁을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의 작년 수입은 고작 2만 7천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감하게 돈을 사용할 때였다.
“성민, 혹시 시간 괜찮아?”
“어? 무슨 일인데?”
“아니, 같이 저녁이나 할까 해서. 내가 살게. 4경기나 함께 뛰었는데 아직 밥 한번 같이 먹지 못했잖아.”
“저녁을 사겠다고?”
“왜? 시간 안 돼?”
“아니, 뭐 괜찮아. 그러면 근처에 내가 잘 아는 집이 있으니 거기로 하자. 거기 맛이 괜찮더라고.”
“어? 어. 그래.”
스톡 야드는 오늘도 훌륭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식당의 주방장은 미디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흔치 않은 주방장이었다.
“왜? 별로야?”
“아니, 훌륭하네.”
하지만 고기를 씹는 마이크 올리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미 사라진 메뉴판. 거기에 적혀있던 숫자가 아직도 눈앞을 아른거린다.
‘미친, 1인분에 180달러라고? 2인분이면 360달러?’
고기 2인분이 마이크 올리버 한 달 생활비의 10%가 넘는 금액이다.
그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잔고는 3,700달러. 당장, 이 밥값 정도는 충분하다.
‘그래, 다 투자라고 생각하자. 메이저에 붙어만 있어도 그게 얼만데.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통 누가 음식을 산다고 했다고 이렇게 비싼 집을 턱턱 오는 게 말이 돼?’
올리버가 속으로 투덜댔다. 그의 기준에서 이런 식당은 정말 특별한 날에나 와야 한다. 너무 비싼 음식값 때문인지 고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뭔가 답답했던 식사가 끝났다.
올리버가 웨이터에게 계산을 위해 영수증을 요청했다.
“계산은 아까 이쪽 분께서 끝내셨습니다.”
“네?”
마이크 올리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순식간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비싼 밥값을 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 자신을 무시하는 건가 싶은 자존심의 울컥거림. 그의 시선이 성민에게 향했다.
“이봐, 마이크. 너희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원래 선배가 밥을 사는 거야. 뭐 엄밀히 말하자면 나도 아직 메이저에 데뷔하지 못한 선수지만, 그래도 난 프로에서 11년을 뛴 선수고, 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년밖에 안 된 선수잖아.”
“하지만······.”
“내 공을 받아주느라 수고했는데, 안 그래도 밥이나 한 끼 먹여야겠다고 생각했었어. 요즘 내가 조금 바빠서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가 권유해준 덕분에 이렇게 사게 됐네. 고마워.”
비싼 밥을 사고도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성민의 모습에 울컥거리려던 마이크의 자존심이 쥐죽은 듯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진한 감동이었다.
가끔 리햅을 위해 마이너에 내려오는 빅리거들이 있다.
그들 역시 마이너리거들에게 기꺼이 좋은 음식을 산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음식을 먹으며 감동할 일은 없었다.
“나도 마이너 시절에 참 힘들었다. 너희도 열심히 노력하면 빅리거가 될 수 있을 거다.”
격려?
천만에. 그것은 시궁창을 탈출한 쥐새끼가, 아직 시궁창에 사는 쥐새끼를 향한 거들먹거림이다.
물론 고맙기는 하다.
가끔 진짜 개자식 중에서는 거들먹거리기만 하고 햄 한 조각 사지 않는 놈들도 널린 세상이다.
기껏해야 잼과 피넛 버터를 바른 샌드위치나 먹는 마이너리거들에게 빵 사이에 끼울 두툼한 고기를 주는 사람들이 어떻게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단언컨대 그 모든 사람 가운데 성민과 같은 이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앞으로도 쭉 내 공을 받느라 고생해야 할 텐데, 종종 이런 자리 갖도록 하자고.”
마이크 올리버가 고개를 숙였다.
***
사람은 당연하지 않은 호의를 받았을 때 더 크게 감동한다.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투덜거렸다.
-이 가식적인 자식. 이왕이면 에드 맥밀란이 공을 받는 게 좋겠다며 매일 그렇게 연습을 시키는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에이, 그게 무슨 가식입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마이크가 공을 받을 확률이 높은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리고 또 이왕 비싼 돈 들여서 밥 사는 건데, 뽕은 뽑아야죠.”
-뭐, 확실히 감동을 진하게 받은 얼굴이긴 하더구나. 뭐 그 직전까지 너무 사색이 되어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저도 조금 미안하긴 했죠. 일찍 말해줬더라면 편하게 비싼 저녁을 즐겼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지금과 같은 효과는 없었을 거라 그런 이야기겠지?
“원래 감정이라는 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방향이 휙 바뀌면 반대쪽 극단으로 가기 쉬운 법이니까요.”
가치의 크기는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 150달러짜리 고기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그냥 고기일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150달러짜리 고기는 손을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큰 가치를 지닌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더하기는 매우 쉽다. 성민이 한 일은 단지 천 냥 빚을 더하지 않은 것뿐이다.
오늘 성민이 한 일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180달러의 조금 비싼 저녁 한 끼가 팀 내에 성민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를 만들어냈다.
[김성민 아쉬웠던 4회의 백투백 홈런. 5이닝 4피안타 4실점.]
[시범 경기 지금까지 실점은 오직 피홈런뿐, 숙제는 피홈런 억제?]
[마운드를 내려가는 성민에게 달려오는 다저스의 선수들.]
[케빈 체임벌린 ‘루키요? 그는 이미 11년의 프로 생활을 경험한 베테랑입니다. 클럽하우스의 선수들 가운데 그를 루키라고 생각하는 선수는 없습니다. 아, 물론 루키 헤이징은 흐흐흐.’]
[김성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5이닝 퍼펙트!!]
[마이크 올리버 ‘그는 내가 지금껏 공을 받아본 투수 가운데 가장 완벽하다.’]
[LA 다저스 감독 팀 베이크 ‘너클볼 투수에게 홈런은 일종의 세금과 같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성민이 보여준 모습은 기대를 아득히 넘어섰다. 그는 충분히 사이 영에 도전할만한 투수다.’]
성민이 다저스의 선수들과 친해지고, 몸의 기량을 끌어올리고, 메이저리그의 타자들에게 적응하는 사이 캑터스 리그의 시범 경기들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3월 28일.
2033시즌 메이저리그가 개막됐다.
< 섞여들다(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