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섞여들다(2) >
케빈 체임벌린은 메이저 최고 연봉을 받은 적이 있는 원클럽맨이다. 그 말은 즉, 그가 야구로는 못 이룬 것이 없는 남자라는 말이나 진배없다. 일반적으로 야구에서는 원클럽맨이라는 것이 그만큼이나 힘들다.
야구를 잘하면 잘하는 만큼 많은 돈을 받는다. 물론 MLB는 팀 간의 형평성을 위해 샐러리캡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래도 팀 간 자금력에 차이는 상당하다. 또한, 서비스 타임을 진행 중인 선수와 최고 연봉을 받는 선수 간의 연봉 차이는 더 거대하다.
당장 케빈 체임벌린의 연봉만 하더라도 서비스 타임을 진행 중인 선수들 80명분에 달한다. 어지간한 스몰마켓 총 페이롤의 절반이 케빈 체임벌린 하나의 연봉이다.
즉 케빈 체임벌린과 같은 선수를 계속해서 사용하려면 최소한 ‘빅마켓’으로 구분되는 팀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빅마켓’이라는 것만으로 그를 팔아치우지 않고 꾸준하게 팀에 놔둘 수 있을까?
천만에.
아무리 빅마켓이라도 쉬어가는 해는 존재한다. 그것이 현대 야구다. 그리고 그것은 드래프트를 통해 최저연봉으로 싸게 부려먹는 선수들이 존재하는 야구의 시스템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것을 무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빅마켓 중의 빅마켓.
아메리칸리그의 양키스와 내셔널리그의 다저스뿐일 것이다.
케빈 체임벌린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거대한 구단에서 팀의 중심으로 선택했던 남자였다. 그가 다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던 것은 행운이지만, 다저스라는 팀에서 그를 팀의 중심으로 선택했던 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에드,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아이참. 아저씨. 아저씨도 우승하고 싶으시잖아요. 그리고 제가 저 공을 받을 수 있어야 우리가 우승할 확률이 올라가는 거, 아저씨도 잘 알고 계시고요.”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너의 손가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
“거참, 아저씨도 슬슬 뒷방 늙은이 될 때가 되긴 했다지만, 그런 식으로 영감님들이랑 같은 소리 할 거예요?”
“하여간, 말본새하고는.”
마운드의 성민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를 바라보는 케빈 체임벌린의 시선이 뜨거웠다.
그는 야구로는 거의 모든 것을 이뤘다. 보통 이런 선수들이 무언가 못 이룬 것이 있다면 우승뿐이다. 하지만 케빈 체임벌린은 커리어를 통틀어 무려 두 개나 되는 반지를 손에 넣은 남자다.
하지만 우승을 한 번 했다고 해서 우승이 고프지 않다면, 다저스는 그를 팀의 중심으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더 많은 우승을 원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1920년의 루스부터 1964년 M&M까지 이어졌던 그 양키스처럼. 1998년부터 시작됐던 강진호와 프레스톤 윌슨의 메츠처럼. 다저스 역시 시대를 풍미한 왕조로 남기를 바랬다.
디아고 헤밍턴은 최소 10년을 군림해줄 최고의 투수다.
지금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에드 맥밀란 역시 앞으로 5년은 최고의 포수로 남을 것이다. 다른 선수들 역시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케빈 체임벌린 본인은 어떤가?
‘저 녀석 계약이 올해부터 3년.’
케빈 체임벌린은 자신이 리그 정상급 기량을 유지할 수 있는 최대치를 3년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 아니 두 번.
그것을 위해서는 디아고 헤밍턴의 뒤를 이어 리그를 박살 내줄 두 번째 에이스의 존재가 꼭 필요했다.
야구계에 오랜 격언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미친 타자는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지만, 미친 투수는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조심해라. 저 녀석 진짜배기다.
‘저도 압니다. 명전 첫 턴에 이름 박아놓은 타자잖아요.’
73.2마일의 빠른 너클볼.
케빈 체임벌린이 공을 지켜봤다. 지금까지 성민의 공을 관심 있게 보긴 했지만, 타석에서는 처음 보는 공이다. 끝까지 지켜볼 가치는 있었다.
‘흐음.’
과연 구위만 따졌을 때 시범 경기에서 그 수많은 타자를 돌려세울 만한 공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에드 맥밀란을 바라봤다.
“뭐요? 내 손가락이요? 허, 진짜. 이 아저씨가? 저 에드 맥밀란입니다. 이 정도 공에 손가락이 나갈 것 같습니까?”
그 정도 공을 제대로 못 잡아서 이렇게 연습을 하는 주제에 큰소리는 여전하다. 케빈 체임벌린이 피식 웃고 다시 타석에 섰다.
너클볼 투수들이 빅리그의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많은 이유가 있다.
구속, 안정성. 하지만 가장 많은 이유는 스트라이크와 볼을 마음대로 던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너클볼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던지는 투수조차 예상할 수 없는 공이다. 즉 너클볼을 존의 안팎에 마음대로 넣을 수 있는 투수라는 말은, 존의 복판에 공을 던지기로 결심했을 때, 그렇게 던질만한 커맨드가 있는 투수라는 의미다.
-부웅!!
61.3마일의 느린 너클볼.
케빈 체임벌린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역시.’
보통의 너클볼 투수들이 메이저의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는 약점들을 모두 극복한 이 투수는 거기에 자신의 무기를 덧붙였다.
두 종류의 너클볼.
물론 누군가는 그냥 너클볼을 빠르게 던지고, 느리게 던지는 차이 아니냐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다른 투수들이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던지는 공의 회전을 억제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내리치는 손의 힘만큼 공을 밀어내줘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그 내리치는 힘의 종류가 두 가지다? 물론 요령은 있겠지만, 힘의 가감 자체를 아예 새로 하나 익혀야 한다는 뜻이다.
가뜩이나 익히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한 너클볼이다. 그런 걸 두 개나 익혀온다? 분명 성민은 메이저에서 뛰기 충분한 투수다.
하지만 케빈 체임벌린이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저 메이저에 뛰기 충분한 투수로는 만족할 수 없다. 물론 이제 막 메이저에 진출한 2,200만 달러짜리 투수에게는 너무 과한 욕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모래시계에 남은 모래는 많지 않았다.
케빈 체임벌린이 기대를 가득 안고 타석에서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부웅!!!
만약 실전이었다면 헛스윙 삼진.
하지만 그것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분명 너클볼을 받는 연습을 겸해서 타석에 서기로 한 것이었는데 지금 들어온 공이 속구였다는 점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에드 맥밀란을 바라봤다.
“이건 10개에서 제외해주기로 한 겁니다. 어차피 아저씨도 저 녀석 진짜로 경험해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저 녀석도 저 녀석 나름대로 메이저 정상급 베테랑 타자 경험해보고 싶은 거고.”
“그렇단 말이지.”
머릿속에 너클볼만 넣고 있었기에 속구에 당했다는 변명은 하지 않았다.
성민의 라이브 피칭이 이어졌다.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타이밍으로 들어오는 공들이 케빈 체임벌린의 방망이를 현혹했다.
-딱!!
“이건 안타로군.”
“웃기지 마십쇼. 페데리코가 저기 서 있었으면 코 파면서 잡았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수비 기준이 페데리코면 너무 빡세잖아.”
“어쩌겠습니까. 우리 팀 유격수가 페데리코인걸.”
변변한 타구를 만들지 못한 채 벌써 투구 수만 13개.
성민이 아홉 번째 너클볼로 73.4마일의 빠른 너클볼을 선택했다.
어려운 공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다리던 타이밍의 공이기도 했다.
메이저 MVP 출신의 타자가 끝까지 공을 지켜보고, 힘차게 방망이를 내밀었다. 느린 너클볼에 비해 변화가 적은 이 공이라면, 그리고 케빈 체임벌린 자신의 힘이라면 적당히 빗맞더라도 충분히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다.
-부웅!!!
“어?”
케빈 체임벌린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이게 대체 뭐지?
“와, 씨. 잡았어. 야 봤냐? 김성민. 나 잡았다.”
에드 맥밀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의 미트에는 분명히 공이 틀어박혀 있었다.
“이봐, 에드 이게 대체 뭐지?”
“뭐긴 뭡니까. 고속 너클볼이지.”
“아니, 그게 앞에서 몇 번 보여줬던 거랑은 좀 다른데?”
“아, 모르셨던 건가? 하긴, 공을 받는 우리나 신경 쓰지 야수들이야 뭐 성민이 공을 상대해볼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야? 저 녀석 너클볼을 세 가지를 던지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뭐라더라? 그냥 잘 던진 너클볼?”
“그냥 잘 던진 너클볼?”
포스트시즌에 가기 위해서는 미친 타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미친 투수가 필요한 법이다.
다저스의 클럽하우스 리더 케빈 체임벌린이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욕심은 그리 과다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
스톡 야드의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식 스테이크이기는 했지만, 주방장의 솜씨가 기가 막혔다. 이 주방장은 미디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스테이크 한 조각을 크게 잘라 꿀꺽 씹어 삼킨 성민이 답했다.
“말 그대로 그냥 잘 던진 너클볼이에요. 항상 그런 공을 던지려고 노력하는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예 다른 공처럼 움직이던데?”
“너클볼은 원래 전부 다 다른 공처럼 움직이죠. 그냥 회전수 억제가 더 잘 돼서 공기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하기에는······.”
성민의 이야기에 케빈 체임벌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심통한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쿡쿡 찌르고 있는 에드 맥밀런을 바라봤다.
“아, 뭐요. 왜요. 그냥 하나 잡고 나서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았던 거거든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더니 포구 감각이 좀 흐트러졌던 것뿐이거든요?”
그는 성민의 열 번째 너클볼을 받아내지 못했다.
“딱히 그립을 다르게 잡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요령의 문제라서요. 사실 그냥 KBO 시절의 공인구로 계속 던졌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빈도로 던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네, 뭐 시즌 동안 계속 던지다 보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의미죠.”
성민의 이야기에 케빈 체임벌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그런데 여기 진짜 맛있네. 에드, 나 스테이크 하나 더 먹어도 괜찮지?”
“네 마음대로 하라고. 그보다 젠장. 내일. 내일 또 10개 어떠냐. 내가 이번에는 더 맛있는 집으로 데려가 주지.”
“이봐, 에드. 나 모레 등판이거든?”
에드와 성민의 대화를 듣던 케빈이 손을 저었다.
“그만. 오늘 이 자리는 내가 살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도록 해. 고기가 마음에 들면 포장을 조금 해가도 좋고.”
“음, 뭐 어차피 집에서 가까운 거리니까 포장은 괜찮고, 그냥 이거 같은 거로 300그램만 더 부탁해요. 그리고 에드, 오늘 여긴 캡틴이 사는 거니까, 네가 사기로 했던 저녁은 다음으로 미루는 거다.”
성민이 케빈 체임벌린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
집으로 가는 길.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물었다.
-성민아, 원래 오늘 저녁은 네가 살 생각이었을 텐데. 네가 그랬잖느냐.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공짜 저녁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뭐, 그건 그렇죠.”
-그런데 왜?
“그냥 그래도 될 것 같더라고요.”
-그냥 그래도 될 것 같다고?
“네, 눈치를 보니까 그 아저씨 이미 저한테 완전히 반했어요. 보내는 눈빛이 거의 한국 시리즈 7차전 등판하기 전에 태경 선배 눈빛 같던데요? 우승도 두 번이나 해봤다는 양반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가 봐요.”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공짜 저녁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부자들에게 그것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돈을 떠나, 상대방이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이기 때문이다.
공짜 저녁이 먹히지 않는 상대는 공짜 저녁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다. 고작 공짜 저녁 정도는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당장 다른 거에 눈이 돌아간 양반한테 돈 낭비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차라리 그쪽에서 베푸는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죠.”
3월 초. 시범 경기가 한창인 시간.
다저스의 리더 케빈 체임벌린이 세운 자신의 은퇴계획 안에 김성민이라는 이름 석 자가 틀어박혔다.
< 섞여들다(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