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섞여들다(1) >
“좋은 수비였어.”
“유격수가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죠. 솔직히 타구도 완전 쉬운 타구였어요.”
경기를 끝내고 자신에게 음료 하나를 건네는 성민에게 페데리코 수가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칭찬은 이런 당연한 거 말고, 좀 대단한 거 했을 때를 대비해서 아껴 두세요.”
“이것만 해도 훌륭한데, 대단한 거라니. 좀 설레는데?”
“흐흐, 오늘처럼 누구나 잡을 수 있는 빗맞은 타구 말고, 진짜 제대로 된 녀석으로 몇 번 정도는 잡아드릴게요.”
“좋았어. 정말로 그런 근사한 걸 해준다면 그때마다 내가 끝내주는 저녁을 사도록 하지.”
“오, 공짜 저녁이라. 좋죠. 안 그래도 LA는 물가가 너무 비싸서 힘들단 말이죠. 저도 얼른 연차를 채워서 빵빵하게 좀 받아야 할 텐데 말이에요.”
“지금 3년 차였나?”
“네, 닷새 차이로 슈퍼2 대상자도 되지 못했죠.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하다니까요.”
“그래도 페데리코 너 정도라면 올해 끝나고 장기 계약도 가능하겠던데?”
“네, 뭐 안 그래도 에이전시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긴 하더라고요.”
성민의 첫 번째 등판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봤던 것은 안타가 없다는 사실보다, 질 좋은 타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성민은 흔히 말하는 배럴 타구로 구분되는 타구를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다. LA의 언론들은 하나 같이 그것을 중요하게 다뤘다.
메이저에 아무것도 보여준 것 없이 2,200만 달러를 받았다며 성민을 질투하던 투수들은 고작 한 경기일 뿐이라며 그것을 애써 폄훼했다.
물론 성민은 여전히 그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자리가 확실한 주전급 선수들도 아니다. 성민이 신경 써야 할 것은 현재 팀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선수, 혹은 앞으로 팀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해질 선수들이었다.
하루 3시간 30분가량의 합동 훈련.
그리고 시범경기 혹은 개인적인 훈련이 이어졌다.
여느 날처럼 퇴근하는 길, 디아고 헤밍턴이 성민에게 물었다.
“이봐, 성민. 그런데 너 지금 피칭 훈련은 어떻게 하고 있어?”
“어? 그냥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데 왜?”
“아니, 우리 회사가 지금 인력에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혹시 관심 있으면 주선해주려고 그러지.”
“회사? 디아고 네가 피칭 훈련 맡긴 회사면?”
“맞아. 웨이트 드라이브. 업계 최고의 회사야.”
과거 투수 코칭은 훌륭했던 전직 투수 출신 코치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각에 의존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조금 달라졌다. 물론 현대에도 그들의 경험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관적인 감각이 아닌 과학적인 측정을 통해 그들의 경험을 체계화시킨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바이오메카닉 이론이라고 부른다.
웨이트 드라이브는 그 바이오메카닉 이론을 활용하는 회사 가운데서도 가장 선진적이고 발달한 시스템을 갖춘 곳이었다. 코넬대학 출신의 스포츠 생리학자 조지 모간을 필두로 세계 유수의 석학들을 직원으로 갖췄다. 게다가 전직 사이영 위너도 둘이나 사외 이사로 도움을 주고 있다.
“아냐, 괜찮아.”
“괜찮다고?”
괜찮다는 성민의 이야기에 디아고 헤밍턴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메이저의 투수라고 해도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하는 곳이 웨이트 드라이브다. 물론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그만한 돈값을 해낸다. 하지만 성민에게는 굳이 필요가 없었다.
“어, 어차피 난 너클볼 투수잖아. 뭐 거기가 많은 데이터도 있고 장비도 좋고 하다지만 너클볼에 관해서는 내가 더 잘 알아.”
“하긴, 그건 또 그런가?”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성민이 아닌 그의 곁에 있는 유령이 너클볼에 관해서는 가장 뛰어난 권위자다. 또한, 웨이트 드라이브의 관측 시스템들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몸을 마치 표면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그의 눈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으로는 그런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단지 현역 유일의 너클볼러 이야기였기에 굳이 강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하네요.’
-내가 있는데 그게 뭐가 아쉽다는 거냐?
‘아니, 웨이트 드라이브면 업계 탑이잖아요. 저거 통하면 메이저 최정상급 선수들이랑 조금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을걸요. 뭐랄까, 중견기업 이상의 오너들이 명문대 경영대학원에 뭘 배우기보다는 그냥 친목질할 건수 만들러 가는 그런 느낌으로?’
-그러면 그냥 고용하면 되잖느냐. 왜 돈이 아까워서?
‘뭐 그것도 있고, 솔직히 지금 그 친구들 고용하면 도움받는 건 없이 내 데이터만 주는 꼴이 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되면 득보다는 실이 너무 많죠.’
훈련 기간 중에 성민이 주로 살폈던 것은 팀의 여론을 누가 이끌어가느냐였다.
디아고 헤밍턴은 분명 최고의 에이스였지만 커리어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팀을 이끌어가는 것은 선발보다는 야수다.
그렇게 성민이 그렇게 팀의 분위기를 살피는 사이 두 번째 등판이 지나갔다.
[김성민 두 번째 경기 2이닝 1피안타 무실점 2탈삼진!!]
[이번에도 제대로 된 타구는 단 하나도 없었다!! 김성민 메이저에서도 자신의 클래스를 증명하다!!]
그리고 2월의 마지막 날.
세 번째 등판이었다.
‘이게 넘어가네요?’
-성민아, 우리 양심을 좀 갖자. 여기 메이저리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성민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적였다.
너클볼이 쭉쭉 잘 들어가는 날이었다. 타자들은 방망이를 붕붕 휘둘렀고 아주 조금 신을 냈다. 그렇다고 아예 배팅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스핀이 조금 더 들어간 공이 조금 빠르게 움직였을 뿐이었다. 아마 KBO에서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헛스윙, 혹은 운이 좋아야 단타다.
하지만 이곳은 메이저리그.
게다가 하필 상대 타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마이크 무시나.
커리어 14년 동안 427개의 홈런을 쳐낸 거포였다.
확신할 수 있다.
정타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저 괴물은 그런 공을 가뿐하게 담장 밖으로 멀리 날려 보냈다.
-저런 애들이 팀마다 최소한 한 명씩은 있다. 아니지, 저 녀석도 이제 서른여섯이니 기량만으로 따진다면 팀에 서너 명은 저 수준이겠군.
메이저리그는 괴물들이 널려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당하고 나니 확실하게 와 닿는다.
성민은 KBO에서 0점대 후반의 평자책을 기록했다.
물론 마린스의 수비는 엉망진창이었기에 손해를 본 면이 있었다. 하지만 다저스의 훌륭한 수비가 그를 돕는 것 이상으로, 상대 타자들의 수준은 더 크게 올라갔다.
이전까지는 적당히 실투를 던지더라도 그냥저냥 넘어갔다면, 지금은 실투를 곧 실점으로 연결할만한 타자들이 널려있다.
‘뭐, 그래도 실투만 아니면 충분히 통한다는 거 증명되고 있잖아요.’
-아직 상대 타자들 몸 다 올라오려면 멀었다.
‘저도 몸 다 올라온 상태 아닌 건 마찬가지거든요.’
하지만 딱히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물론 KBO의 평균적인 수준은 떨어졌다. 하지만 저만한 타자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다른 선수들이라면 모른다.
하지만 빅터 마르테. KBO에 신처럼 군림했던 그 괴물이라면 충분히 저기에 버금가는 수준의 선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민은 그 괴물을 상대로 너끈하게 승리했다.
다저스 덕아웃의 팀 베이크 감독이 성민을 바라봤다.
사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고작 실투다. 프로에서 11년을 구른 투수가 실투 하나 담장을 넘어가는 것을 견뎌내지 못할리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성민이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73.1마일의 빠른 너클볼.
바로 조금 전에 실투했던 공이었다.
팀 베이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은 너클볼 투수다.
너클볼 투수는 항상 외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삐끗하면 그대로 지옥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반적인 투수들보다 훨씬 터프해야 한다.
지옥을 한 번 경험했다고 해서, 외줄을 타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너클볼 투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일단 합격이군. 부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줘야 할 텐데 말이야.’
[아쉬운 피홈런. 하지만 훌륭했던 투구 내용. 3이닝 4탈삼진 1실점!!]
[시범경기 7이닝 1피안타 1실점 9탈삼진 평균자책점 1.29]
[다저스 감독 팀 베이크 ‘성민은 훌륭한 투수. 그는 한국에서 거둔 것 같은 놀라운 성공을 이곳에서도 재현할 수 있는 기량이 있다.’]
-성민이 홈런 맞는 경기 보신 분? 그거 어디서 해줌?-
-안 해줌.-
-왜 안 해줌? 성민이 경기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mlb.com에서 중계 안 해준 경기라서 그럼.-
-아니,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파견해서 중계해줘야 하는 거 아님?-
-독점 중계권은 방송 송출권이지 제작권이 아니라서 그런 거 불가능함.-
-그게 뭔 말?-
-그러니까 mlb.com에서 쏴주는 영상에 해설만 붙일 수 있고, 월드 시리즈나 올스타전에도 해설들 파견만 가능하지 영상 자체는 걔들이 보내준 것만 쓸 수 있다는 말임.-
-그러면 송출 안 해주는 성민이 시범 경기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애리조나로 가시면 됩니다.-
홈런을 하나 허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성민을 증명한 것 없이 2,200만 달러를 받고 온 행운아 취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누군가 속으로는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공공연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7이닝을 던지는 동안 제대로 된 타구라고는 담장을 넘어간 홈런 하나가 전부다. 눈만 제대로 달렸다면 성민의 2,200만 달러가 행운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성민, 오늘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오늘 또?”
“에이, 그러지 말고 딱 10개만. 내가 저녁 근사하게 살게. 그리고 너도 내가 공을 받아주는 편이 훨씬 좋은 거 잘 알잖아.”
에드 맥밀란은 생각보다 워크에씩이 뛰어난 남자였다.
사실 성민으로서도 마이크 올리버가 아닌 에드 맥밀란이 공을 받아줘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의 표현처럼 마이크 올리버가 성민의 전담포수가 된다는 것은, 성민이 등판하는 날 다저스의 타자는 사실상 일곱 명이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딱 열 개만이다. 저녁은 어디서 살 거야?”
“스톡야드 어때? 거기 스테이크가 죽여준다고.”
“오케이. 아, 그런데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무슨 조건?”
“그냥 공을 던지는 건 재미 없잖아. 타자라도 하나 서 있어야지.”
성민의 이야기에 에드 맥밀란이 잠시 고민했다.
“그래,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안 그래도 네 공을 쳐보고 싶어 하는 녀석들은 제법 되니까.”
“그럼 이왕이면 좀 베테랑으로 부탁해.”
“베테랑이라······. 그렇다면 체임벌린 아저씨가 좋겠군.”
정확하게 원하던 이름이 나왔다.
케빈 체임벌린.
1차전에서 파울라인을 넘어가는 뜬공을 잡아냈던 일루수다.
올해 빅리그 14년 차.
오직 다저스에서만 뛰었던 메이저리그에서 극히 보기 드문 원클럽맨으로 실력은 이제 슬슬 전성기를 지나 하락세에 접었지만, 그 하락세에 접어든 실력으로 작년 올스타에 선정된 진짜배기 괴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케빈 체임벌린은 성민이 그토록 친해지기를 원하는 다저스의 클럽하우스 리더였다.
연습용 마운드.
케빈 체임벌린이 헬멧을 쓰고 타석에 들어왔다.
< 섞여들다(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