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캑터스리그(2) >
MLB 역시 스프링 트레이닝의 메뉴 자체는 KBO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체 훈련 시간이 좀 짧은 감은 있었지만, 그 부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만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근데 쟤들은 몸이 엉망인데 단체훈련 이렇게 대충 해도 괜찮을까요? 비시즌 중에 저렇게 퍼졌는데 자율에 맡긴다고 제대로 될 것 같지가 않은데.’
-제대로 못 하면 도태되는 거지.
‘재능이 있다고 해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뭔가 역시 천조국. 이런 느낌이네요.’
-그것보다는 구단에서 억지로 시켰을 때, 얻는 이득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는 쪽이 맞는 말이겠지.
‘에이, 그것도 천조국이니까 가능한 기상이죠. 어차피 대체할만한 재능은 넘쳐난다 이거 아닙니까.’
-뭐, 고만고만한 재능이라면 확실히 그렇지. 그리고 진짜배기라면 몸이 좀 덜 만들어졌어도 상관없이 뚫고 나오는 재능일 테고 말이야.
몇몇 선수의 경우 몸이 아직 부족한 것이 확실히 눈에 띄었다. 뭐 KBO에서도 종종 그런 인간들이 있었던 만큼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KBO의 경우 스프링캠프 등을 통해 그런 선수를 강제로 교정해준다면 여긴 조금 더 자율에 맡긴다는 차이 정도다.
놀라웠던 것은 따로 있었다.
“휘유, 성민 대단한데?”
“대단하기는. 저기 저런 몸으로 저렇게 하는 애들도 있는데.”
“쟤들?”
그 지방이 출렁거리는 녀석들이 기초적인 운동능력에서 성민 본인보다 훨씬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기본적으로 성민은 엘리트 체육인들 가운데서도 특출난 편에 속했다. 마린스에 있을 당시, 성민의 운동능력은 야수까지 모두 포함해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껏해야 중위권 수준에 불과했다.
디아고 헤밍턴이 출렁이는 뱃살로도 누구보다 빠르게 셔틀런을 완료한 선수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운동능력으로 쟤들 이기려면 보통으로는 힘들지. 근데 알잖아. 야구는 그게 다가 아닌 거.”
“그야 그렇지만. 나도 어디 가서 운동능력으로는 져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조금 자존심이 상해서.”
“하긴, 너나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 하지만 여기 메이저리그잖아.”
굳이 뒷말까지는 필요 없었다.
이곳은 메이저리그.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괴물들만이 모이는 곳이다.
성민은 분명 KBO를 기준으로 역사에 남을 투수였다. 하지만 여기 모인 투수라면 누구나 KBO에서 에이스 소리를 듣지 않을 녀석이 없다.
아직 야수들이 소집되지 않은 만큼 PFP(Pitchers' Fielding Practice)훈련은 없었다. 곧바로 연습용 마운드로 이동했다.
훈련 첫 날인 만큼 전력으로 던지는 일은 없었다.
가벼운 하프 피칭이다.
-뻐엉!!
그 가벼운 하프 피칭도 확실히 메이저는 메이저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상체만 이용해서 휙 던지는 것 같은데 공이 날아가는 느낌이 달랐다.
-왜 겁나냐?
‘겁이요?’
필 니크로의 질문에 성민이 웃었다.
겁이라니.
‘겁이 왜 납니까. 쟤들은 애초에 경쟁상대도 아니잖아요. 그냥 든든한 겁니다. 내 뒤를 받쳐줄 불펜들이 허접하지는 않겠구나 하고요.’
여기에 모인 투수들 하나하나가 KBO를 기준으로는 에이스 놀이를 할만한 투수들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성민은 이미 그런 투수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고 메이저로 날아온 몸이다.
달리기가 조금 늦다고? 날아오는 공에 반응하는 속도가 조금 늦다고? 하프 피칭으로 던지는 공의 구위가 조금 나쁘다고? 애초에 그런 것에 겁을 먹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투수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빠르게 달리고 기민하게 반응하며 세게 공을 던질 수 있느냐가 아니었으니까.
-뻐엉!!
성민의 말처럼 애초에 저들은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성민의 시선이 디아고 헤밍턴을 훑었다. 앞서 공을 던지던 다른 투수들과는 또 달랐다. 순수하게 손끝을 채는 감각만을 끌어올린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굳이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투수의 품격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성민에게 쏠렸다.
무언가를 보여줘야 할까?
-뻐엉!!
그럴 리가.
디아고 헤밍턴처럼 MLB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연 2,200만 달러는 그 자체로 훌륭한 타이틀이다. 성민 역시 고작 이런 캠프에서 무언가를 증명해야 할만한 위치가 아니다.
‘뭐야? 별거 아닌데?’
‘너클볼 투수라잖아. 다른 공까지 좋을 수는 없겠지.’
물론 그를 지켜보는 선수들의 수군거림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 정도는 각오를 했다.
무엇보다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씁니다. 어차피 떠드는 애들 중에서 2/3는 저랑 같이 안 뛸 애들이잖아요.’
스프링 트레이닝이 흘러갔다.
이틀, 사흘, 그리고 나흘 째.
“여어, 왔어? 뭐야, 비시즌 중에 누텔라라도 퍼먹은 거야? 몸이 왜 이렇게 불었어.”
“불은 게 아니라 벌크업을 한 거지.”
“벌크업 같은 소리 하네. 옆구리에 살이 이렇게 생생한데.”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덩치의 흑인이 캠프에 등장했다.
“아, 맞다. 이쪽은 성민. 뉴스를 봤으면 알고 있겠지?”
“당연하지. 내가 벌크업하느라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팀 소식 정도는 다 듣고 있었다고. 반가워, 성민. 난 에드라고 해. 별일이 없다면 이번 시즌 네 공을 받을 사람이지.”
에드 맥밀런. 8년 2억 1천만의 대형 포수가 성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었다.
“괜찮겠어?”
“뭐가?”
성민이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웃음에 에드 맥밀런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이봐, 나 에드 맥밀런이야. 현역 최고의 포수.”
“현역 최고?”
“지금 혹시라도 에두아르도 자식 생각하는 거라면 머리에서 빨리 지워라.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훨씬 나아.”
에드 맥밀런과 에두아르도 크루즈.
이 시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두 명의 포수다. 두 사람 모두 공격과 수비 딱히 부족함이 없는 완성에 가까운 포수들이다. 물론 그 성향은 조금 다르다. 에드 맥밀런이 공격이 6 수비가 4라면 에두아르도는 수비가 6 공격이 4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내가 공 받는 거 보고 놀라 자빠지지나 말라고.”
“오, 에드. 자신 있나 봐?”
디아고의 이야기에 에드 맥밀런이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몸 잘 풀고 이따 실내 마운드에서 보자고.”
+++
-허······, 이거 대단하긴 대단하군. 톰 시버, 밥 깁슨부터 드와이트 구든까지 내 시대에도 대단한 녀석들이 많았지만 이 녀석 만큼은 아니겠는걸?
‘시대가 다르잖습니까. 시대가. 영감님 뛰던 시절은 벌써 60년 전이잖아요. 지금 저도 그 시대로 가면 사이영 위너 아닙니까.’
-웃기지 마라. 넌 기껏해야 그 시대 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야. 뭐 운 좋으면 한, 두 번 정도는 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전성기의 밥 깁슨이나 드와이트 구든처럼 시대를 초월했던 괴물들과 비교하면 아직 한참 애송이라고.
‘그러면 쟤는요?’
-글쎄. 지금 당장은 전력으로 던지는 게 아닐 테니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최소한 드와이트 녀석의 전성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 같구나.
성민이 아래턱을 긁적였다.
-왜? 이번에도 너무 든든하냐?
‘든든하겠습니까?’
-동료가 잘 던지면 든든하다며.
‘그거야 내 뒤를 받쳐줄 불펜들 이야기고요. 쟨 내 경쟁자잖아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무럭무럭 솟구치네요.’
디아고 헤밍턴은 과연 디아고 헤밍턴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단했다.
아직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속구, 슬라이더, 커브까지 모든 공이 흠잡을 곳 없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바로 뒤에서 공을 지켜봤음에도 속구와 커터를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다저스에서 내야를 수비가 괜찮은 녀석들로 채운 이유가 있긴 하네요.’
-그래, 이런 공이라면 땅볼 유도용으로 제격이지. 게다가 저 슬라이더나 커브는 모두 삼진을 잡기 충분한 공들이고.
‘저한테도 매우 좋은 일이죠.’
30개가량의 공을 던진 디아고 헤밍턴이 마운드를 내려왔다.
마운드로 올라가는 성민을 바라보는 필 니크로의 시선이 따듯했다.
현역 No.1 투수의 공을 지켜 보고도 감탄하기보다 경쟁심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그 경쟁심이 완전히 어림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운드로 올라가는 성민을 바라보는 것은 필 니크로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성민과 함께 훈련했던 다저스의 다른 선수들 역시 흥미로운 눈빛으로 성민을 지켜봤다.
지난 사흘 동안 성민이 보여준 모습은 그리 인상적이지 못 했다. 운동능력은 딱 중간 정도에 불과했고 하프 피칭 역시 그저 그랬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몇몇 선수들은 성민의 이번 불펜 피칭을 더 크게 기대했다. 다저스의 프런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성민에게 2,200만 달러를 썼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수의 멍청이들은 고작 AA리그에서 거둔 성적으로 2,200만 달러나 받아먹은 투수가 망신당하는 꼴을, 프런트의 숫자밖에 모르는 머저리들이 실패하는 꼴을 기대했다.
‘자 소문의 너클볼이 얼마나 대단한지 똑똑히 지켜보자고.’
‘그래봐야 74마일짜리 변화구라며.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우리도 연습 때 가끔 너클볼 던져봤잖아. 74마일로 던지는 너클볼이 움직여봐야 얼마나 움직이겠어?’
마운드의 성민이 가볍게 호흡했다.
처음은 우선 속구부터.
-뻐엉!!
144.2km/h. 89.6마일의 속구가 에드 맥밀런의 미트를 꿰뚫었다.
89.4마일, 89.7마일, 88.9마일, 89.1마일.
‘별거 아닌데?’
‘뭐 볼 끝이 제법 날카롭긴 하지만, 그래 봐야 마이너에 널린 수준이야.’
아직 2월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경쟁력 없는 구속이었다. 심지어 성민은 우완 투수다. 공을 지켜보던 사람들 대부분이 속구만으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성민의 공을 직접 받았던 에드 맥밀런은 조금 달랐다.
‘미트를 거의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하나, 혹은 두 개 정도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무려 다섯 개 연속이다. 이 정도면 정말 수준급의 제구력이다. 설사 구속이 조금 느리다고 해도 충분히 써먹을 만하다. 2,200만 달러의 가치는 없지만, 리그 평균은 충분히 된다. 거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너클볼 투수라는 점이었다.
“자자, 이제 그걸 한번 시험해보자고.”
투수 코치인 데이빗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에드 맥밀란이 미리 준비해온 거대한 소프트볼용 미트를 꺼내 들었다. 필 니크로가 그 미트를 살피고 말했다.
-묘한 자신감을 보인다 싶더니, 꽤나 준비를 한 것 같구나.
‘그러게요. 너클볼러 찾기도 힘들었을 텐데 용케 연습을 했네요.’
-프로에 뛸만한 수준의 너클볼러가 없을 뿐. 10번을 던져서 7, 8번 제대로 된 공을 던지는 너클볼러는 충분히 찾을 수 있었겠지.
‘아, 그러네요.’
연습의 흔적이 역력한 미트였다.
우선 가볍게 하나.
성민이 115.5km/h. 71.8마일의 너클볼을 뿌렸다. 작년 가장 많이 던졌던 고속 너클볼이다. 두 달 간의 피나는 연습 끝에 롤링스사의 공인구에 적응할 수 있었다.
KBO의 공인구보다 넓고 얕은 실밥을 완벽하게 밀어냈다.
-뻐엉!!
에드 맥밀란이 성민의 공을 받아냈다.
“좋았어!!”
그가 성민에게 공을 던졌다. 미리 훈련을 했던 보람이 있었다. 훈련을 위해 초빙했던 너클볼러보다 훨씬 빨랐지만, 그럭저럭 받아낼 만하다.
에드 맥밀란이 두 번째, 세 번째 공을 연달아 받아냈다.
‘괜찮기는 한데 이게 2,200만 달러짜리 공이야?’
‘솔직히 이 정도면 코리 콜린스 쪽이 더 위협적인 경쟁자겠는데?’
그리고 네 번째.
현장의 분위기를 읽어 낸 성민이 필 니크로를 힐끔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껏 들어 올린 다리의 탄력을 그대로. 단단하게 밟은 디딤발이 대지를 박찼다.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날카롭게 휘두르는 오른팔. 그 힘이 온전하게 실린 손끝의 공을 그와 가장 어울리는 힘으로 밀어냈다.
73.2마일.
종전보다 조금 빠른 공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단지 그뿐이었다.
-뻐억
에드 맥밀란의 미트가 처음으로 공을 잡아내지 못했다. 진흙을 묻힌 누런 공이 그의 가슴 보호대 위를 두들겼다.
‘이건?’
에드 맥밀란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리고 또 하나.
‘설마?’
다저스의 투수 코치 데이빗 스미스가 미리 준비해둔 사람을 불러야 할지를 망설였다.
< 캑터스리그(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