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92화 (93/287)

< 캑터스리그(1) >

10시가 살짝 넘어가는 조금 늦은 아침.

하지만 1월. 이곳 애리조나에서는 아침 조깅을 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낮 기온은 보통 20도를 넘어서지만 해가 떨어진 이후로는 6도까지도 떨어진다. 적당히 해가 뜨고 기온이 따듯하게 올라간 이 시간이 딱이다.

“Hi.”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이제는 제법 혀가 굴러간다. 물론 여전히 혀가 굴러가는 소리는 가벼운 인사 정도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늙은 백인 남자 둘이 그렇게 달려가는 성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잡담을 나눴다.

“저 친구가 그 친구인가? 이번에 다저스에 새로 입단했다는 그 동양인.”

“어, 거의 매일 아침 이 시간에 러닝을 하더라고. 성실한 것 같아.”

“이거 미리 싸인이라도 받아둬야 하는 거 아닌가?”

“나중에 공 가지고 와서 받아 두던지. 하지만 자네도 잘 알잖아. 저렇게 열심히 한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 말이야.”

“하긴, 저렇게 매일매일 성실하게 훈련하던 친구가 몇 경기 나와보지도 못하고 망하고, 체중도 못 지키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한 녀석이 올스타가 되기도 하는 게 이 바닥이지.”

모르는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떠들건, 성민은 정해진 훈련량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기량을 끌어올렸다.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공을 던지고 몸을 회복시키고 코어를 강화했다.

“어휴, 이 꼴을 좀 봐라. 이게 사람 사는 집인지, 돼지우리인지. 아니 내가 미국에 와서 너랑 같이 살 수도 없고.”

“아, 뭐가. 이 정도면 깔끔하지. 그리고 미국까지 왔으면 관광이나 좀 다니세요. 집 청소는 어차피 하우스 키퍼가 해주는 거니까.”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어디 엄마처럼 꼼꼼하게 해주는 줄 알아? 여기 먼지 시커멓게 쌓인 것 좀 봐라.”

“아, 그만하시고, 그냥 저기 나이아가라 폭포나 가서 헬기 타고 사진 찍고 어? 그랜드 캐니언 가서 인스타용 사진도 좀 찍고 그러시라니까요.”

“인스타 사진은 너랑 찍은 거 올리는 게 더 인기 있고, 거긴 5년 전에 희진이랑 태자랑 하는 계모임으로 한 번씩 다 가봤던 곳이야.”

계약상 성민에게 주어진 것은 1년에 왕복 비행권 10매.

4장은 1등석이고 6장은 비즈니스다. 권여사는 아직 시즌이 시작도 안 했는데 굳이 그걸 써서 성민을 만나러 찾아왔다.

물론 그렇게 찾아와서 하는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잔소리였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만리타향에서 익숙한 얼굴이라고는 귀신 하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스트레스를 불러왔을 권여사의 잔소리가 미국에서는 괜히 정겨웠다.

그렇게 2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메이저리그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 리그는 두 개로 나뉜다.

플로리다의 그레이프푸르트 리그. 그리고 애리조나의 캑터스 리그.

성민이 애리조나에서 훈련한 거로 미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성민이 소속된 LA다저스는 캑터스 리그에 소속돼있다.

야수보다 일주일 빠른 소집일.

LA다저스 소속의 투수들이 모여들었다. 아직 연봉 협상 자격조차 얻지 못한 애송이들과 스플릿 계약을 받아낸 늙은 투수들과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에 서있는 아슬아슬한 투수들. 그리고 몇 명의 메이저 계약자들.

그들 사이에서도 성민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확실히 단단해 보이기는 하네.’

‘젠장, 메이저에서 한 번도 안 던져본 애송이한테 연 2,200만짜리 메이저 계약이라고? 아주 리그가 숫자쟁이들의 숫자놀음으로 미쳐 돌아가는군.’

‘아, 오늘 저녁은 쿵파오치킨으로 할까?’

‘저 녀석만 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어쩌면 올해는.’

그를 바라보는 선수들의 시선에 각자의 생각이 묻어났다.

성민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선수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호의적인 시선, 불만 가득한 시선, 혹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시선.

그 수많은 시선을 뚫고 자신의 라커로 걸어갔다.

딱히 본인의 라커가 어디 있는지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는 2,200만 달러짜리 투수였다. 선수들의 몸값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2,200만 달러짜리 선수는 흔하지 않다. 그것은 메가마켓인 다저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번 시즌 LA 다저스의 연봉 총액은 2억8천4백만 달러. 사치세 라인인 2억 5천만 달러를 3,400만 달러 넘어갔다. 로스터의 모든 선수가 그 2억8천4백만 달러를 나눠 갖는다.

연봉협상 자격을 얻지 못한 선수는 50만 달러 남짓을, 최고의 FA 선수는 4천만 달러를.

성민은 다저스 전체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리고 프로의 세계에서 연봉은 곧 입지로 연결된다.

하나의 라커룸을 70명이 넘는 선수가 사용해야 하기에 중간에 커튼을 친 라커를 공유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성민에게 할당된 라커는 가장 좋은 자리, 가장 커다란 라커 바로 옆에 위치한 제법 괜찮은 라커였다.

-KBO에서 뛰다 온 것도 대우를 해줄 생각인가 보군.

‘일단은 NPB나 KBO도 프로리그고, 전 몸값도 있으니까요.’

미리 걸려있던 빳빳한 새 유니폼 사이에 몇가지 짐을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사이 누군가가 성민에게 다가왔다.

“안녕.”

199cm, 117kg.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을 잘 알지 못하는 성민이었지만, 그래도 이 남자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디아고 헤밍턴.

10년을 한 세대로 봤을 때, 이 세대 최강.

20년을 한 시대로 본다면 시대의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그리고 100년을 하나의 역사로 본다면 역사에 이름을 새길 가능성이 있는 남자다.

21세기 최고의 투수였던 클레이튼 커쇼의 적통 후계자로 최고 96마일의 빠른 공과 90마일의 슬라이더. 속구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94마일의 커터. 그리고 83마일의 체인지업을 던진다.

게다가 심지어 좌완 투수였으며 그 모든 공을 스트라이크 존의 안팎에 자유자재로 꽂아 넣을 수 있는 컨트롤까지 갖추고 있었다.

팀 내 최고 거물의 등장에도 성민은 딱히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가장 좋은 라커 옆에 자신의 라커를 뒀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성민은 비싼 투수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를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이방인이다. 팀 내에 융화되지 못한다면 비싼 돈을 투자한 구단으로는 곤란하다.

마린스도 외국인 용병이 입단하면, 일단 태경이나 호섭 같은 팀 내의 실세가 붙어서 어느 정도 케어를 해준다. 메이저도 사람 사는 곳이다. 다를리 만무했다.

성민은 11년 동안 KBO에서 뛰면서 많은 용병들을 봐왔다.

누군가는 적응에 성공했고, 누군가는 실패했다.

물론 기본적인 실력의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슷한 실력일 때, 팀 내에 융화되는 선수와 융화되지 못하는 선수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야구는 멘탈 게임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용병으로 오는 선수의 상당수는 KBO를 AA급 리그라고 얕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숨긴다고 생각하지만, 행동에서 나오는 그 모습을 감출 수는 없다.

그리고 자기가 뛰는 리그를 얕보는 사람에게 호의적이기는 힘들다.

반면 KBO를 존중해주는 용병들이 있다. 물론 그 녀석들도 어느 정도 하위리그라고 얕보는 기색은 보인다. 하지만 가식으로라도 KBO를 존중해주는 녀석에게는 선수들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을 연다.

닉 해리슨처럼 정말 특출한 놈이 아닌 이상에서야 KBO에서 용병으로 오래 살아남는 것은 보통 후자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고, 그것은 메이저리거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반갑다. 매일 TV로 보던 선수를 이렇게 직접 보니 느낌이 이상하네.”

성민이 일단 은근하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었다.

디아고 헤밍턴이 멋쩍게 웃으며, 하지만 확실하게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상할 것도 없어. 이제 네가 상대해야 하는 선수들도 그렇게 매일 TV로 보던 선수들일 테니까 말이야. 메이저리그에 온 걸 환영해.”

“그 인사는 조금 이른 것 같은데? 스프링 트레이닝은 이제 시작이잖아.”

“아, 내가 너무 성급했나? 흐흐, 우승 때문에 우리 팀을 선택했다는 네 이야기에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21세기 가장 위대한 투수가 클레이튼 커쇼라는 것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가끔 맥스 슈어저를 들고 오는 녀석들도 있지만 여러 가지 지표로 봤을 때 클레이튼 커쇼를 능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약점이 존재 한다.

우승.

아무리 투수가 미쳐 날뛴다고 해도 투수 혼자서 팀을 우승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클레이튼 커쇼의 경우는 그런 변명으로 무마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회를 스스로 망쳤다.

디아고 헤밍턴은 클레이튼 커쇼의 후계자 소리를 듣는 투수다.

그는 여러 가지에서 커쇼를 닮았다. 아쉬운 점은 약점 역시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디아고에게는 아직 기회가 많다. 그는 아직 26세에 불과하고 현역 최고 투수 소리를 들은 것도 3년밖에 되지 않았다.

디아고 헤밍턴이 성민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성민이 적당히 그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이곳의 분위기를 익혀나갔다.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깨달은 점은 미국이라고 해서 마냥 자유로운 분위기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몇 가지 부분에서는 KBO보다 더 꼰대스러운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연습은 5년 차 이상 선수들 먼저 할 수 있단 말이네. 근데 디아고 너도 올해부터 메이저 5년 차잖아. 작년까지는 그렇게 못 했던 거야?”

“으음, 나 같은 경우는 30년에 첫 사이 영을 받았잖아. 그리고 31년이 3년 차였고. 그때부터 좀 예외였던 것 같아. 처음에는 그냥 연습할 때 불러내더니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먼저 연습할 수 있게 됐지.”

“그렇구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이제 메이저 1년 차인가?”

디아고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봐, 넌 이미 한국에서 11년이나 프로 생활을 한 베테랑이잖아. 게다가 FA 자격을 얻어서 MLB에 진출한 선수고. 아무도 너를 1년 차 애송이로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영감님. 저 김성민이에요.’

필 니크로가 바로 납득했다.

성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디아고 헤밍턴처럼 저렇게 생각할 리는 만무했다.

디아고 헤밍턴은 바닥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선수다. 그는 풀타임 2년 차에 사이 영을 타낸 슈퍼 루키다.

바닥부터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성민은 AA 리그를 박살 냈다고 연 2,200만 달러나 받으며 내려온 낙하산일 것이다.

물론 실력을 보여준다면 그들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당장 시범경기, 혹은 정규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 실력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도 힘들다.

‘일단은 디아고랑 좀 붙어 다니면서 호가호위 좀 해주다가 슬슬 실력을 보여주면 다들 인정하겠죠. 짬밥도 중요하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건 현재 폼 아니겠습니까.’

성민의 자신감에 필 니크로가 엄지를 치켜드는 것으로 답했다.

지난 72일간의 훈련.

성민은 그런 자신감을 보일 자격이 있었다.

< 캑터스리그(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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