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저리거 >
-보스턴은 나쁜 구단. 우승할 수 없는 구단에서는 뛸 수 없다. by 김성민.-
-아니다. 이 악마야!!-
-이봐 어린 친구 보스턴의 불행은 이제 너에게 맡길게 by 강진호-
-근데 진짜 1억 1천만 달러를 까고 다저스에 갈 정도로 보스턴이 싫었던거야?-
-왜 다들 다저스가 좋았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지?-
-근데 성민이는 다저스 가도 에이스인건가요? 연 2천만이면 메이저에서도 거의 에이스급 대우라고 하던데.-
-다저스만한 팀에서는 아님. 그리고 2천만으로는 에이스급 대우라고 보기엔 좀 약하지.-
-성민이 너클볼 투수인 거 생각하면, 그리고 경력 없는 거 생각하면 어지간한 팀이면 에이스급 활약 생각하고 부르는 건 맞음. 아마 보스턴은 1선발 생각하고 질렀을 거임. 근데 다저스에서는 아닐 뿐이지.-
-디아고 헤밍턴 생각하면 에이스 자리 차지하긴 힘들지. 클레이튼 커쇼 이후 다저스 최고 에이스 소리 듣는 친구인데. 사실상 큰일만 없으면 앞으로 4, 5년은 메이저에 원탑으로 군림할 투수임-
계약을 맺었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LA에서 생활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한둘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것을 준비하라고 고용해둔 것이 에이전시였다.
한센이 집과 차, 그리고 각종 생활을 위한 준비에 대해 보고를 했고, 성민이 적절한 것을 선택했다.
“집에 관련해서는 그러면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귀국 일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생각보다 계약이 빨리 끝난 덕분에 빠른 비행기 편을 알아보면 골든글러브 시상식에 참석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스프링 트레이닝 소집까지 이제 두 달 조금 넘게 남았나요?”
“네. 투수조의 경우 야수조보다 일주일 먼저 모이니 정확히 72일 남았습니다.”
“72일이라······.”
필 니크로가 말했다.
-그 정도면 한국을 다녀와도 괜찮겠구나.
‘글쎄요.’
72일.
길다면 긴 시간이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서 상을 타고 축하를 받고 언론에 얼굴을 비추고 지인들과도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C급 FA가 예비된 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3년 6,600만 달러짜리 선수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다.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과연 며칠이 필요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미국과 한국을 왕복하는 데만 이틀을 써야 한다.
지금 미국에 온지 일주일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완전하게 적응 안 된 시차는 또 어떤가.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바로 애리조나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시죠.”
“애리조나요?”
“네, 이제 날도 슬슬 추워지는데 굳이 LA에 계속 있을 이유도 없죠. 아, 그리고 모던 리포머 전문가는 그쪽에서도 계속 부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성민의 선택에 필 니크로가 박수를 쳤다.
‘뭡니까? 그 박수는?’
-작년에 훈련 따위는 필요 없다고 앙앙거리던 어느 철부지가 생각이 나서 그런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냥 대만 애들 상대로는 그렇게까지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죠.’
-그러면 지금은?
‘그때 그러셨죠.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그래, 그랬지. 넌 그때 사자는 토끼를 잡아먹고 살지는 않는다고 대꾸했고.
‘뭐, 이제는 사자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물소 떼들에게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네가 변한 건 아니고? 내 생각에는 예전이었으면 물소 떼고 뭐고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서 자랑 좀 하고, 6,600만 달러면 평생 먹고 살 돈이니 적당히 여유롭게 생활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성민이 대답 대신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시즌 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 관리된 손톱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큐티클 제거만 안했지, 어지간한 여자들보다 훨씬 잘 관리된 손이다.
‘변해야죠. 이제 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게 달라졌으니까요.’
필 니크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
여전히 사람들은 스포츠 선수라면 조금 금욕적으로 운동에 매진하는 것을 좋아했다. 성민이 귀국 대신 훈련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대부분 야구팬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 해봤어?”
“네, 안된답니다.”
“아니, 계약도 잘했다면서.”
“귀국 자체를 안 할거래요. 애리조나로 가서 바로 운동 시작할 거랍니다.”
“아니, 뭐 잠깐 한국 들렀다 간다고 큰일이라도 난데? 앞으로 1년은 한국 못 올건데, 와서 가족도 보고 뭐 행사도 좀 하고 겸사겸사 시상식도 와주고 하면 좀 좋아?”
프로야구 골든 글러브 시상식은 꽤 큰 행사다. 특히 2027년 이후로는 MVP와 타이틀홀더 시상식까지 합쳐져서 규모가 더 커졌다. 덕분에 공중파에서도 제법 크게 중계를 한다. 물론 중계시간은 평일 오후 5시 30분인 만큼 시청률은 처참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기대를 했었다.
김성민의 존재 때문이다.
2032년 KBO의 1년은 김성민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에는 그 LA다저스와 3년 6,600만 달러짜리 계약을 덜컥 체결했다. 심지어 보스턴 레드삭스의 6년 1억 1천만짜리 계약을 발로 찬 결과다.
미국으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연 1,500이 오버 페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현재 김성민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스포츠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그가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 나오느냐 마느냐로 시청률의 단위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근데요 PD님.”
“아, 왜? 뭐? 김성민 데리고 올 수 있는 아이디어 있는 거 아니면 지금 이야기 하지 마라. 짜증나니까.”
“아니, 데리고 올 수 있는 아이디어는 아닌데.”
“내가 그러면 말하지 말랬지.”
“그냥 저희가 가면 안 됩니까?”
“뭐?”
“수상 소감 들으러 저희가 가면 안 되냐고요.”
조연출의 이야기에 PD가 무릎을 탁 쳤다.
“너, 이 새끼. 너. 와, 너 인마. 천재냐?”
지금까지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해서 대리 수상을 한 선수는 많았다. 그렇다고 굳이 그 대리 수상을 하는 선수에게 촬영팀을 파견하는 경우는 없었다. 시청률 2%짜리 프로그램에 그런 공을 들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게다가 수상에 불확실성도 없다. 아무리 평소 뇌 없는 기자들의 인기투표로 유명한 KBO 골든글러브 투표라고 해도 이번 시즌 투수 골든글러브와 MVP는 무조건 김성민이 될 수밖에 없다.
시상식까지 이틀.
김성민의 참가 여부가 아닌, 방송팀의 촬영 협조가 성민에게 날아들었다.
“O.K랍니다. 근데 한국시간으로 7시면 거기는 새벽 3시라고 녹화방송으로는 안 되냐는 데요?”
“녹화? 아, 이건 생방이 맛인데. 수상 소감을 녹방으로 하면 좀 그렇잖아.”
“에이, 이번 수상은 어차피 누가 봐도 김성민 선수가 확정인데요. 다들 이해할 겁니다. 시차도 있고요.”
“O.K. 대신 너무 홈비디오 느낌 나지 않게, 우리 인원 파견해서 제대로 된 카메라로 찍자. 이왕이면 캐스터도 하나 보내고.”
“그건 지금 곧바로 준비해서 보내면 시간 내로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한 가지 더?”
PD가 대체 뭘 요구하는 건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저기 자기가 비디오로 수상 소감 찍는 건 비밀로 해달라는데요?”
“뭐 인마? 그게 되겠냐? 지금 시청률 때문에 이러는 건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리고 그걸 왜 비밀로 해.”
“그게, 비밀로 해도 어차피 나중에 클립으로는 조회가 될 거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지 않냐고. 게다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고 싶은 거?”
***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
곱게 차려입은 권미영 여사가 자리에 앉아 축하 공연을 하는 가수들을 바라봤다. 이왕이면 동방신기나 엑소 같은 원로가수들이면 더 좋았을 텐데, 이름도 알지 못하는 새파란 아이들이다.
최근 1년은 그녀에게는 꿈만 같은 나날이었다.
얼굴만 보고 결혼했던 허약한 남편은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남편 얼굴을 꼭 닮은 아들놈은, 다행히 체질은 제 아빠를 닮지 않고 엄마를 닮아 듬직하게 자라났다. 아니, 그냥 듬직으로는 부족했는지, 한국에서 손에 꼽힐 만큼 듬직하게 자랐다.
부상으로 빌빌거릴 때는 화도 나고 걱정도 됐다. 자길 닮아 튼튼하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일찍 떠난 남편 생각이 났다. 아직 FA 대박은 없었지만, 계약금이며 연봉까지 모아둔 돈도 꽤 돼서 그냥 은퇴하고 가게나 하면서 장가나 가면 딱 좋겠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 녀석 성격이면 어디 가게를 하나 차려도 야물딱지게 잘 운영할 수 있을 테니까.
“하여간에, 이래서 늙으면 그냥 뒷방에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니까. 애들 하는 일에는 이래라저래라하면 안 돼요.”
하지만 역시 내 아들은 안 해서 문제지 하면 된다. 아니 그냥 되는 것도 아니고 엄청 잘 된다. FA 대박을 치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6,600만 달러란다. 한국 돈으로 하면 780억이다. 그것도 3년 만에 780억이다.
권 여사도 어디서 돈 좀 벌었다고 방귀 좀 뀌는 사람인데 그녀가 평생 번 돈은 성민이의 월급 수준이다.
“2032년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 투수 부문 수상자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부산 마린스의 김성민 선수.”
“오늘 김성민 선수는 개인 사정상 참석을 하지 못해 어머니께서 대리 수상을 해주시겠습니다.”
“보통은 코치나 친한 선수에게 대리 수상을 부탁하기 마련인데, 참 이례적인 일이죠?”
권미영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상대로 나갔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성민이가 저에게 꼭 이걸 부탁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조금 걱정했어요.”
“네? 무슨 걱정을?”
“우리 성민이가 친구가 없는 게 아닌가. 뭐 그런 걱정이요.”
오늘 시상식에 온 선수들은 대부분 한 다리만 건너도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다. 김성민이 친구가 없다니. 권 여사의 농담에 관객석에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나와보니 생각보다 많은 선수가 인사도 해주고, 성민이 안부도 물어주더라고요. 성민이 이 녀석, 저한테는 마냥 어린 아들인데 그래도 야구는 참 열심히 했구나 싶어서 다행이네요. 성민이가 감사할 명단을 저한테 적어줬어요. 공필승 감독님······(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닉스의 김수현 선수까지. 모두 고맙답니다. 참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많네요, 이름만 부르는데 거의 3분은 쓴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녀석, 이 와중에 또 엄마 이름은 빼놨네요. 하여간 이래서 자식놈은 키워봐야 하나도 소용없다고 하나 봅니다. 큰 상 주셔서 감사하고, 이 글러브는 저희집 장식장에 잘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상 소감보다 감사 인사를 건넬 사람의 명단이 더 길었던 수상 소감이 끝났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보통은 같은 팀 선수나 코치 감독님 정도인데, 이렇게 기자와 다른팀 선수까지 아울러서 감사하는 경우는 정말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자, 이제 마지막 MVP 수상만이 남았는데요.”
김성민, 마르타 노엘 등 이번 시즌 KBO 최정상의 활약을 보였던 선수들의 사진이 차례로 지나갔다. 물론 시상식을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김성민의 수상을 확신했다.
“2032년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 MVP. 축하드립니다. 부산 마린스의 김성민 선수.”
“이번에도 김성민 선수의 어머니께서 대신 수상해 주시겠습니다.”
권미영 여사가 이번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위로 올라갔다.
골든 글러브와는 다른 상패를 품에 안고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준비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아, 아. 잘 보이시나요?”
등 뒤의 커다란 스크린으로 성민의 잘생긴 얼굴이 펼쳐졌다.
“이것 참, 영상으로 수상 소감이라니 좀 오글거리는 느낌이네요. 그래도 이렇게라도 인사를 드릴 수 있다니 참 다행입니다. 부산 마린스 소속의 김성민입니다. 아, 지금은 LA 다저스인가? 에이, 근데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제가 부산에서 태어나서 다대포 짠물을 마시면서 자라난 부산 싸나이라는 점이죠.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40년이나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이렇게 제가 큰 상을 받았습니다. 아마 엄마라면 감사 인사에 엄마가 빠져있다고 투덜거렸을 것 같은데요.”
영상 속의 성민이 멋쩍게 웃으며 코끝을 문질렀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제가 MVP를 받을 수 있도록 그 긴 시간 동안 부산 마린스를 포기하지 않고 응원해주신 모든 팬 여러분. 그리고 내가 빌빌거릴 때마다 등짝을 때려준 엄마. 마지막으로 너클볼 그 자체인 필 니크로 옹에게 이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응원해주셨던 모든 마린스의 팬 여러분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얄미웠을 KBO 아홉 개 구단의 팬 여러분. 이제부터 당분간 저는 부산 마린스가 아닌 메이저리그의 김성민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 메이저리거 > 끝
ⓒ 묘엽
작가의 말
이태원닝겐님 후원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