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터 미팅(4) >
“현대의 발달한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반쪽짜리라니. 인상적인 이야기로군요. 확실히 남들은 다 강철검을 들고 싸우는데 혼자 청동검을 들고 싸워서야 이길 수가 없죠.”
시작은 칭찬부터.
물론 안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김성민 선수?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너무 실례되는 이야기를 했군요.”
“아닙니다. 실례라뇨. 그렇게 믿고 계신다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당연하죠. 믿음은 자유니까요.”
“잠깐만요. 믿음이라고요?”
그냥 냅다 집어 던지는 것은 그리 큰 충격을 주지 못한다. 요령은 높게 들어 올렸다가 내려치는 것. 간단하지만 항상 통하는 방식이다.
물론 상대는 케빈 맥밀란. MIT 출신에 전력분석팀을 거쳐 다저스의 단장 자리까지 오른 수재였다. 그저 그런 책상물림이 아니다. 단순한 말장난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발달한 관측장비와 그 관측된 쓸데없이 거대한 데이터를 연산해줄 장치의 발달. 그를 통해 축적된 데이터가 야구를 바꿨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전히 그것은 야구를 바꾸고 있죠.”
케빈 맥밀란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2032년 현재 선수 대부분은 주어진 정보를 잘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것은 주어진 도구를 더 잘 사용하려는 일에 불과했다. 수없이 많은 정보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도구인지를 신경 쓰는 이는 여전히 소수다. 그리고 30대 중반을 넘어서도 성공하는 선수 대부분은 그런 이들 가운데서 나왔다.
저 한 마디로 성민이 그런 이들에 속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왜 그런 데이터를 써야 하는지 이해 못 하고 사용하는 머저리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성민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제 이야기를 믿음이라고 폄훼하는 겁니까.”
“두 가지는 무관하니까요.”
“네? 무관하다니요. 분명히 말하지만, 너클볼은 던지는 본인도 어디로 갈지를 알 수 없는 공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 공은 현대 야구의 발달한 데이터 분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구종이라는 뜻이죠.”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단장님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틀렸습니다.”
“두 가지?”
“우선 첫 번째. 투수가 활용하는 그 발달한 데이터 분석은 공을 어디로 던지느냐와는 거의 무관합니다.”
케빈 맥밀란의 표정이 굳었다.
“하, 하지만.”
“사실 전력으로 던지는 공을 원하는 곳에 꽃을 수 있는 투수는 극히 드뭅니다. 메이저에 통하는 구속으로 그런 커맨드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규격 외의 투수죠.”
성민의 말처럼 애초에 타자의 약한 코스 같은 정보를 토대로 거기에 원하는 대로 공을 집어넣을 수 있는 투수는 ‘거의’ 없다. 대부분 투수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느니 그냥 최대한 좋은 공을 던지는 편이 더 낫다.
“애초에 투수가 활용해야 하는 데이터는 공을 어디로 던질지가 아니라, 내 공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그것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타자를 상대로 어떤 수 싸움을 가져갈 지입니다.”
케빈 맥밀란이 답하지 않았다.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너클볼이 사장된 것은 말씀하신 것 같은 이유가 아닙니다. 너클볼이 사장된 것은 데이터 때문이 아닌, 그 데이터를 활용함으로 인해 생긴 야구계의 변화 때문이죠.”
“야구계의 변화?”
“네, 평균구속의 상승이요.”
분명 너클볼은 알고도 치기 힘든 공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최소한의 구속은 필요하다. 그것은 필 니크로의 시대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시대와 지금 시대가 다른 점은 그의 시대에는 리그의 평균구속이 87마일이었다면 지금은 93마일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km/h로 따졌을 때 거의 10km/h의 차이다.
“아무리 변화가 심한 공이라도 빅리그의 타자라면, 그 타이밍만 잡을 수 있다면 쳐냅니다. 사실 그건 디키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R.A 디키가 최후의 너클볼러인 이유죠. 2012년의 그는 필 니크로 시대 투수들의 평균에 육박하는 속구. 어지간한 슬라이더만큼 빠른 고속너클볼과 평범한 너클볼을 두루 갖춘 투수였으니까요.”
R.A 디키 이후로 지금까지 빅리그에 너클볼 투수가 없는 이유?
간단하다.
너클볼은 전통적으로 실패한 자들의 공이었기 때문이다. 성공할 수 있는 투수는 굳이 너클볼을 던지지 않는다.
너클볼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성공 가능성 역시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애초에 150중 후반을 던질 수 있는 투수라면 굳이 그런 모험을 할 이유는 없다.
예전이라면 팔꿈치가 망가진 투수가 적당히 60마일 초중반의 너클볼을 던져도 괜찮았다. 87마일 시대에는 70마일 중반대의 속구와 함께하는 60마일 초중반의 너클볼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더 빠른 공을 치기 위해 발전한 타자들의 반응속도와 배트 스피드는 60마일 초중반의 너클볼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두들길 만큼 발전했다.
그렇기에 필 니크로는 성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성민은 실패의 과정에 있는 투수였지 완전히 실패한 투수는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환경 역시 완벽했다. KBO는 20세기 후반의 너클볼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리그였다. 그곳에서 차근차근 성장한다면 그리고 성민의 재능이라면 충분히 현대에 통할만한 너클볼 투수가 될 수 있었다.
다만 필 니크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성민의 성장 속도가 그의 생각보다 매우 빨랐다는 점이었다.
성민이 선언했다.
“물론 R.A 디키의 시대 이후로 야구는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의 너클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최고 94마일짜리 속구를 던집니다. 그리고 74마일짜리 고속너클볼과 62마일짜리 너클볼을 던지죠. 감히 장담하건대 저는 이 발전한 시대에 어울리는 너클볼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너클볼 투수입니다.”
다저스 관계자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야야, 잠깐만 그건 아니지. 너클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너클볼 투수라니. 그리고 너 요즘 너클볼에 더 손이 익은 이후로는 94마일까지는 안 나오잖아.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저번 시즌에 그렇게 던진 적 있다는 게 중요하죠. 어차피 쟤들이 당장 94마일 던져보라고 할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케빈 맥밀란이 그 침묵을 깨트렸다.
“그러니까 애초에 94마일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멀쩡한 팔을 가지고 너클볼 투수가 됐다 그 말이로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너클볼을 손에 대지 않고 속구에만 전념했다면 100마일도 던질 수 있었을 투수가 보통이라면 10년쯤 연습해야 간신히 던질 수 있는 수준까지 너클볼을 익혔다고 봐야겠죠.”
성민의 말이 그들을 설득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 역시 성민이 좋은 투수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오늘 그들이 성민의 가치를 낮춰 말한 것은 그저 협상의 전략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성민의 말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냐 하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성민의 이야기는 분명 그들을 자극했다.
또한,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성민이 생각을 할 줄 아는 투수라는 점이었다.
***
“클럽 옵션 없이 3년 6,000만. 그리고 이닝 옵션 300만과 올스타, 골드글러브, 사이영 옵션으로 300만. 총액 6,600만입니다.”
다저스가 자신들이 내밀 수 있는 최대한의 오퍼를 내밀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1.5배쯤 높은 액수였다.
물론 그래 봐야 보스턴의 6년 1억 1천만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했다.
“사소한 옵션들만 조정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빅터 모리츠의 흔쾌한 대답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옵션이요?”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사소한 옵션들이니까요.”
“뭔지 일단 들어나 보죠.”
빅터 모리츠가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선발 보장.”
어렵지 않은 조건이다. 애초에 3년 최대 6,600만이나 주는 투수다. 선발일 수밖에 없다.
“마이너 거부권.”
이건 조금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감수했던 조건이기도 하다. 케빈 맥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번째.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
“빅터씨, 지금 미쳤습니까?”
대답까지 0.1초의 고민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마이너 거부권은 메이저에서 5년을 뛰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권리다. 물론 성민과 같이 메이저에서 증명된 것이 없는 선수에게 대뜸 마이너 거부권을 주는 것은 부담이다.
하지만 다저스와 같이 큰 팀이라면 최악의 경우 적당한 연봉보조를 통해 다른 팀에 트레이드로 넘기는 것도 가능하다. 속은 좀 쓰리지만 그래도 적절한 유망주를 확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은 다르다.
이건 최악의 경우 연봉을 그대로 다 포기하던지 로스터 한자리를 버리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농담입니다. 농담. 뭐 15개 팀 대상 트레이드 거부권 정도면 적당하겠군요.”
“불가.”
“유망주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으로 잘하는 선수를 팔아넘기려는 시도를 막으려는 조건입니다. 애초에 가격 적인 부분에서 이 만큼이나 양보를 했는데 이 정도 안전장치는 있어야죠.”
“우리는 10년 전에도 컨텐더였고 지금도 여전히 컨텐더 팀입니다. 목표는 언제나 우승이죠. 우승에 도움이 되는 선수를 팔아넘길 일은 절대 없습니다.”
“글쎄요, 어디서 괜찮은 투수를 저렴하게 업어온다든지, 투수들은 빵빵 터지는데 야수들이 죽을 쑤는 상황이 온다고 가정했을 때, 상대적인 계산으로 성민 선수를 팔아넘기지 말라는 법은 없죠. 아무리 잘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연 2,200만 달러짜리 선수에게 15개 구단을 대상으로 트레이드 거부는 안 됩니다. 그건 사실상 트레이드 자체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만한 선수를 감당 가능한 팀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에이, 다저스만한 팀에서 이 무슨 엄살입니까. 연봉보조도 가능하고 계약 자체도 고작 3년에 불과한데요.”
한참의 설전이 오갔다. 하지만 애초에 다저스로서는 이기기 힘든 싸움이었다. 만약 다저스가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면 트레이드 거부권 따위는 제시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민이 다저스를 선호한다고 해도 6년 1억 1천만. 5년 차 옵트아웃 조건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오늘 낮에도 그들은 보스턴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더 좋은 조건을 거절하고 오는 투수가 트레이드 거부권을 요구하는데 그것을 끝까지 완벽하게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겠습니다. 12개 구단, 12개 구단을 대상으로 트레이드를 거부할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이건 저희 구단주님 성격을 생각할 때 최대치라는 것 빅터씨도 잘 아실 겁니다.”
빅터 모리츠가 성민의 눈치를 살폈다.
-끄덕.
3년. 옵션 포함 6,600만. 선발 보장, 마이너 강등 거부, 12개 구단 트레이드 거부.
빅터 모리츠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이제 진짜 세세한 조건들을 좀 체크해보실까요?”
“이젠 조금 무서워지려고 하네요.”
케빈 맥밀란의 이야기에 빅터가 선량한 얼굴로 웃었다.
“이번엔 정말 세세한 조건입니다.”
집, 항공권, 티켓 그리고 기타 2,200만 달러 투수에게 어울리는 부대조건들.
성민이 케빈 맥밀란의 손을 맞잡았다.
***
그리고 같은 시간 1억 1천만을 제시한 보스턴.
“이제 김성민 선수가 우리 팀에 온다면 남은 조각은 괜찮은 마무리 정도겠군요.”
“글쎄, 일단은 체임벌린에게 조금 더 기회를 줘 보고 안된다면 이제 슬슬 유망주를 카드로 써서라도 부족한 조각들을 채워 넣어야겠지. 김성민의 2년 차, 혹은 3년 차. 이제 우리도 다시 우승에 도전할 때가 됐어.”
[김성민 윈터 미팅 사흘 차에 기습적인 계약 완료!! 행선지는 LA 다저스.]
[닭 쫓던 개가 돼버린 보스턴 레드삭스. 더욱 격렬해지는 선발 투수 영입 전쟁!!]
[김성민 ‘다저스는 좋은 구단. 우승할 수 있는 구단에서 뛰게 되어 기쁘다.’]
< 윈터 미팅(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