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터 미팅(3) >
FA 선수의 몸값이라는 것은 본래 묘하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는 성적의 선수들도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각 팀마다 성적을 분석하는, 그리고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른 덕분이다. 또한, 당 해에 얼마나 많은 선수가 나오느냐 역시 주요한 요소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FA 시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니까.
결국, 어느 한 팀이 크게 미쳐서 지를 때 시장은 들썩이기 마련이다.
덕분에 그 성적에 그만큼이나 받아? 라고 하는 경우가 생기고, 그 성적에 그것밖에 못 받아? 라고 하는 경우도 생긴다.
성민의 경우는 전자였다.
기본적으로 보스턴 레드삭스는 명문이다. 다저스나 양키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상위를 다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런 명문이 무려 몇 년 동안이나 굴욕을 감내했다.
거액의 FA가 몇 번 실패한 이상 현대 야구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저스나 양키스같은 터무니없는 팀들 조차도 그런 실패를 경험하면 팀이 휘청인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천문학적인 돈으로 메워나가며 순위를 유지하고 팀을 정비하지만, 레드삭스는 그 정도까지 돈을 막 쓸 수 있는 구단은 아니었으니까.
4년.
그들이 참았던 시간이었다. 물론 그들도 올해처럼 뒤에서 2등의 승률까지 내려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어쨋거나 그들은 빅마켓이고 빅마켓은 최소한의 성적은 내야 하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보스턴이 성민에게 제시한 총액 1억1천만 달러의 제안은 놀랍지만 그래도 그들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을 불러왔다.
“미쳤군. 6년 1억 1천만? 심지어 4년 이후 옵트아웃?”
“명백하게 오버 페이로군요.”
“아무리 프론트라이너급 투수가 필요하다고 해도 아무것도 증명된 게 없는 투수에게 6년짜리 계약으로 연평균 1833만짜리 계약이라니. 존 맥도웰이 단단히 미쳤군요.”
“아무래도 지난 몇 년간 성적 때문에 압박이 컸으니까요.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저희로서는 다른 옵션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영입 경쟁에서 한 걸음 슬쩍 물러났다.
만약 비슷한 수준의 금액을 오퍼할 수 있다면 필리스가 위치한 펜실베니아 주의 소득세가 레드삭스가 위치한 매사추세츠 주보다 낮았던 만큼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지만, 6년 1억1천만 달러는 그 비슷한 금액조차 제시할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심지어 세부 옵션에서 옵트아웃이라니.
“존이 정말 급하긴 급했나보구만. 그나저나 올리버와 게일이라면 뇌가 있다면 무조건해야만 하는 거래였단 말이지. 우리로서는 성민을 데리고 올 생각으로 거절했던 건데. 이렇게 되면 상당히 아쉽게 됐군.”
“지금이라도 제시를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보스턴이 아직 너클볼을 잡을 만한 포수를 충원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글쎄, 아직은 조금 이른 것 같군, 일단 오늘 일정에 빅터와의 미팅이 있었지?”
“네, 오후 4시부터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일단 좀 분위기를 살펴 보자고.”
***
윈터 미팅은 MLB만의 문화는 아니었다. KBO 역시 지난 2015년 이후로 민간에게 윈터 미팅을 공개하고 있었고 성민 역시 2026년에 이벤트성 행사를 위해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거 규모가 상당하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전국의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야.
‘전국이라, 뭔가 같은 단어인데 한국에서랑은 느낌이 확 다르네요.’
기자, 에이전트, 구단 관계자. 노트북을 챙겨 든 수많은 사람이 행사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물 건너 이역만리 타향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대부분은 성민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억 1천만이다.
메이저리그가 크다고는 하지만 1억이 넘어가는 선수가 흔한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팀에 2, 3명? 스몰마켓팀의 경우는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몇몇 사람은 빅터 모리츠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성민을 힐끔거렸다.
“여어, 빅터 오래간만이야. 옆에 그 친구가 그 유명한?”
“김성민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민이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에이전시, 기자, 구단 관계자 누구라도 좋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 특히 모리츠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야구계에 자기 위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첫인상을 나쁘게 만들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서글서글한 미소와 어설프더라도 자신감 넘치는 발음. 무엇보다 1억 1천만 달러라는 금액 정도는 당연하다는 당당한 눈빛까지.
‘이 친구 성적만 어느 정도 나와준다면 꽤나 화제를 불러올 수 있겠는데?’
짧게나마 성민을 지켜본 기자들이 눈을 번쩍였다. 특히 성민이 자기 지역에 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보스턴 지역의 기자들은 어떤 식으로 이 선수를 다뤄야 더 많은 트래픽을 가져올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보통의 선수였다면 몇몇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자기 방으로 훌쩍 떠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성민은 보통의 선수가 아니었다. 마치 선거철의 정치인이 사람들과의 악수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성민이 행사장의 기자들과 인사 나누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기, 성민 이제 슬슬 이동해야 합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지 않았나요?”
“그래도 조금 여유를 두는 편이······.”
성민이 아쉬운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계약이다. 3층에 마련된 장소로 이동했다.
-어쩔 생각이냐?
‘뭐를요?’
-1억 1천만. 심지어 4년 차에 옵트아웃. 여러모로 최고의 조건이지.
‘최고는 뭐가 최곱니까. 돈이야 솔직히 일정 단위 넘어가면 그게 그겁니다. 쓸 만큼만 있으면 나머지는 그냥 통장에 찍힌 숫자에 불과해요. 야구하는데 진짜 중요한 조건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액수가 적더라도 다른 팀을 가겠다고?
‘그건 또 아니죠. 아무리 그래도 그 숫자는 구단에서 생각하는 내 가치고, 주변에 알려진 제 이미지니까요. 오늘도 사람들이 그렇게 들러붙은 거 오퍼액이 1억을 넘어간다는 이야기 때문이었잖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대체 어쩌겠다는 소리냐.
‘일단 1.1억까지 끌어냈으니 이제는 야구 할만한 팀을 상대로 협상을 좀 해봐야죠. 오늘도 그러려고 온 거 아닙니까.’
제법 넓은 미팅룸에는 다저스 측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단장을 비롯한 여섯 명의 사람들.
그 앞으로 성민과 빅터 모리츠, 한센 릴로우,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한 두 명의 직원이 자리를 잡았다.
‘뭐지? 왜 선수가 직접?’
‘LA를 선호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이미 보스턴과는 오퍼 자체에서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는 상황이다. 이렇게 만나는 것 자체도 어제의 오퍼가 있기 전 약속이었던 탓이 큰데, 그런 약속에 선수 본인이 직접 나타나다니. 성민의 등장에 다저스 쪽 사람들이 당황했다.
“이거, 김성민 선수 본인이 나오실 줄은. 조금 놀랍군요.”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오늘 프랑코 로드리게스 선수의 공개입단식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같이 나왔는데, 시간이 조금 애매해서 말이죠.”
“아아, 그렇군요.”
프랑코 로드리게스라면 8년 2억7천만에 양키스에 입단한 이번 FA 최대어였다. 양키스의 팬이라면 보고 싶은 행사일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굳이 김성민 선수가 그 행사를? 사실일까? 다저스의 단장 케빈 맥밀란이 성민을 힐끔 바라봤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우선 제시하셨던 2년 3,500만 말인데요······”
케빈 맥밀란이 슬쩍 손을 들었다.
“저희도 듣는 귀는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그걸 계속 주장하는 건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말이나 다름없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 저희 측 제안입니다.”
케빈 맥밀란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2년에 클럽 옵션 1년 포함 6천만. 그리고 옵션으로 540만.
빅터 모리츠가 고개를 저었다.
“듣는 귀가 있으시다고 하셔서 조금은 기대했는데, 이걸 보니까 소식을 못 들으신 것 같군요. 보스턴에서 저희에게 제시한 오퍼는 옵트아웃 포함 6년 1억 1천만입니다. 2+1년 6천만이라니. 이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자는 이야기밖에 안되는 것 같은데요.”
“정확히 말하면 옵트아웃 포함 6년 1억에 옵션 1천만이죠. 저희는 3년 6천만에 옵션 540만이고요.”
“그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클럽’옵션 포함 2+1년이죠.”
2+1년과 3년은 완전히 다르다.
클럽옵션의 경우 결국 구단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겠다는 의사 표현이나 마찬가지다. 보스턴이 제시한 옵트아웃의 정반대 버전인 셈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물론 단순히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싸움은 아니었다.
“김성민 선수가 대단한 선수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리그간의 격차를 생각해야죠. 저희 쪽 변환식에 따르자면 김성민 선수의 예상 성적은 187이닝 3.26입니다.”
“만들어진지 30년은 된 데이븐포트 변환식이라도 들고 오셨나봅니다? 뭐 업데이트는 꾸준히 됐지만, NPB와 MLB라면 몰라도 KBO는 적용하기 좀 곤란하다는 점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아뇨, 소꿉장난도 아니고 설마 그런 걸 자료라고 들고나왔을 리가요.”
맥밀란이 제시한 자료는 리그를 이동한 선수들의 스탯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데이븐포트 변환식과는 차원이 다른 자료였다. 그것은 구속, 공의 변화량, 회전수, 타자의 배트 스피드, 타구 속도, 야수들의 움직임까지 그들이 수집한 KBO와 MLB의 모든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압도적인 귀납형 모델이었다.
-허, 20년 전부터 구단에서 선수 출신이 아닌, 아이비리그의 공 한번 잡아보지 못한 녀석들을 고용한다고 할 때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훨씬 터무니없구나.
‘메이저리그, 메이저리그 하더니 이건 진짜 규모부터가 터무니없긴 하네요. 우리도 나름대로 스탯캐스트 이용한 자료로 야구 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모리츠 역시 쉽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전형적인 평균의 함정이로군요. 그것보다 이걸 좀 봐 주시죠.”
모리츠가 제시한 자료는 성민의 시범경기와 정규시즌 전반기, 하반기 그리고 포스트시즌의 데이터였다.
“그리고 여기. 이건 조금 아쉬운 자료로군요. 아무래도 대만 쪽은 스탯캐스트가 아직 도입이 안 되서 말이죠.”
거기에 작년 마무리 캠프에서 있었던 경기의 자료들까지.
그 자료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다.
“김성민 선수는 재작년에 팔꿈치 수술을 했고, 그 이후로 너클볼을 접한 선수입니다. 그리고 고작 1년 만에 이렇게 폭발적인 성적을 기록했죠. 시즌 초부터 워낙 대단한 활약을 해서 묻힌 감이 있지만, 세부지표로 살펴보면 김성민 선수는 명백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성장이라······. 지금 제가 30세의 연 2천만 달러짜리 FA 선수를 두고 협상하는지, 아니면 이제 막 드래프트 된 유망주를 계약하려고 하는지 헷갈리네요.”
“필 니크로는 40대 이후에 121승을 거뒀고 RA 디키는 만 38세에 첫 사이 영을 얻었죠. 너클볼 투수의 서른은 다른 투수들의 스물이나 마찬가지니, 이제 막 드래프트 된 선수만큼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통역해주던 필 니크로가 자신의 이야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들었냐? 내가 이 정도다.
‘네, 네.’
케빈 맥밀란이 답했다.
“RA 디키에, 필 니크로라. 정말 그리운 이름들이로군요. 참 원시, 아니 낭만적인 시절이었습니다. 레이저 관측도 없고, 수비 시프트를 데이터가 아닌 감독의 ‘감’으로 했었죠. 타자들의 버릇요?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투수들의 경험으로 가는 거죠. 하지만 현대 야구는 다릅니다. 너클볼의 불확실성은 큰 무기죠. 하지만 동시에 가장 발달된 현대 야구의 관측을 무기로 사용할 수 없는 반쪽짜리입니다. 2012년 디키 이후로 제대로된 너클볼러가 없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지금 너클볼러를 영입하러 나온 자리에서 할 이야기치고는 꽤나 부적절한 이야기 같은데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죠.”
통역을 해주면서도 부들거리는 필 니크로에게 성민이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그래서 지금 저딴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냐?
‘설마요.’
성민이 입을 열었다.
< 윈터 미팅(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