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터 미팅(1) >
11월의 마지막.
부경고 출신의 선배가 운영하는 한 연습장.
-뻐엉!!
성민이 가볍게 내던진 공이 그물망을 흔들었다.
필 니크로가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엉망이야. 다시.
침착하게, 손끝에 집중해서
-뻐엉!!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성민이 투덜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데요? 공이 너무 미끄러워요.”
-뭐, 롤링스의 공이 조금 그런 감이 있긴 하지. 그래도 매직 머드까지 발랐으니 충분히 던질만한 공이다.
“매직 머드는 개뿔. 이거 그냥 침이랑 흙 섞어서 발라놓은 공이잖아요. 거기다가 이 공은 가죽이 문제가 아니라 실밥이 문제라고요. 이거 가격도 우리 거보다 비싸더만 공을 뭐 이리 대충 만드는 겁니까?”
-크흠, 거 대충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러니까 전통적인 방식에 입각해서.
“미국은 전통적으로 코스타리카에서 야구공 만들었습니까? 게다가 솔직히 인건비도 코스타리카랑 중국이랑 별로 차이도 안 나는데 생산단가 2배 차이에 이 퀄리티 차이 뭡니까?”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면서 달라진 가장 큰 부분은 역시 공인구였다.
일본과 한국의 공인구는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미국의 공인구는 다르다. 약간이지만 더 크고 가죽의 종류 또한 다르다. 게다가 실밥 역시 더 넓은 폭에 더 밋밋하게 퍼져있다.
“슬라이더를 던지려는데 공이 손에서 쑥 빠져버리는 느낌이에요.”
“포심은 컨트롤하기 너무 어려웠고, 체인지업은 오히려 너무 잘 들어가더라고요.”
“투심은 어렵지만 그럭저럭? 스플리터는 기존 공보다 훨씬 많이 떨어진다.”
KBO와 NPB의 공인구를 쓰던 선수들이 MLB의 공인구를 사용했을 때 보였던 반응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성민이 롤링스의 공을 처음 사용해보는 것은 아니었다.
성민의 국제전 경험은 2026아시안게임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WBC에서는 전통적으로 롤링스의 공을 공인구로 사용한다.
그리고 성민은 2025년 제6회 WBC에 출전했던 경험이 있었다.
3경기 13이닝 4실점 평균자책점 2.77
당시 성민이 거뒀던 성적이었다.
-불평할 시간에 공에 적응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라. 그리고 성민이 너 분명 WBC로 공인구를 미리 경험했을 때는 엄청나게 잘했었다고 이야기했잖아. 메이저 공인구 적응에는 자신 있다고.
“아니, 그러니까 분명 그때는 괜찮았는데······.”
과거 6회 WBC 시절 성민은 분명 다른 투수들보다 공인구에 쉽게 적응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투수 중에 손이 작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성민은 그중에서도 특히 손이 크고 손가락이 긴 편에 속했다.
KBO의 공인구 둘레는 231mm. MLB의 경우는 233mm다. 고작 2mm가 얼마나 큰 차이냐 싶겠지마는 10년 이상 같은 규격의 공을 만져온 투수들에게 그 2mm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온다.
게다가 6회 WBC 당시 성민은 포심과 슬라이더 그리고 서클 체인지업을 구사했었다. 그리고 당시 성민은 서클 체인지업으로 생각보다 크게 재미를 봤다. 물론 바로 그 해에 KBO 공인구로 똑같은 재미를 보려다 폭망하긴 했었지만 말이다.
“실밥을 밀어내는 감각이 묘하게 달라요. 하던 대로 밀어내면 덜 밀리고, 힘을 조금 더 주면 너무 밀려나고 말이죠.”
-사실 그게 정상이다. 솔직히 올해는 네가 너무 날로 먹긴 했지. 설마 그거 한 번 해줬다고 그렇게 쉽게 적응할 줄이야······.
“너클볼로 세계 최고가 될 재능인데 그 정도는 해야죠.”
-하여간, 말은.
“그래서 말인데, 저기 그때 그거 또 안 됩니까? 이 공으로도 한 번만 더 해주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거기다가 지난 일 년간 해온 경험도 있으니까요.”
-성민아.
“네.”
-인생을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는구나. 자 쉴 만큼 쉬었으면 다시 던져보자. 이제 하프 피칭으로는 슬슬 적응할 때도 됐다.
한국을 떠나는 바로 그 직전까지 성민의 땀방울이 마운드를 적셨다.
***
“5년 8천만? 존이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군.”
“선발 자원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 오버 페이라고 생각됩니다.”
“글쎄, 29세 투수의 5년이면 딱 전성기만 뽑아먹는 계약 아닌가. 충분히 질러볼 만하지.”
“그렇다면 저희도?”
“No. 생각을 다르게 해야지. 지금 김성민 선수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빅리그 경험?”
다저스의 단장 케빈 맥밀란이 고개를 저었다.
“비슷은 하지만 틀렸어.”
“그렇다면?”
“그에게 부족한 건 경험이 아닌, 경력과 증명이지.”
“경력과 증명이요?”
“그래, 우리야 그에게 5년 8천만을 투자하는 걸 과감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그의 생각은 다를걸? 지금 그 금액조차도 아마 저평가된 금액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렇다면?”
“기간을 줄이고 AVV를 높인 계약을 원하겠지. 어쩌면 단 년이나 2년 계약을 더 선호할지도 모르겠군.”
케빈 맥밀란의 이야기에 운영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이제 빅리그에 진출하는 선수가 단 년이나 2년 계약을 선호할 리가요. 본인이 어떤 성적을 거둘지 모르는데 세상 어떤 선수가 그런 불안정한 계약을 원하겠습니까.”
“그것도 잘 생각해보라고. 그의 출신이 어디인지를 말이야.”
“출신이요?”
“그래, 출신. 그는 미국을 제외하고 프로리그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둘 밖에 안되는 나라 출신이야. 그곳은 미니멈 사이즈 선수들에게 180만 달러씩 턱턱 안겨주는 나라지.”
“아!!”
그 순간 운영팀장은 자신이 너무 메이저리그의 기준에서 세상을 바라봤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남미 등에서 온 외국인 선수들이라면 어떤 상황이건 간에 장기 계약을 선호한다. 아무리 본인의 실력에 확신이 있더라도, 혹시 모를 부상 등에 의한 실패의 확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민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보통이라면 4년 7천 만과 5년 8천만에서 선호되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4년째에 실패한 선수가 단 년 천만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성민에게는 KBO가 있다.
KBO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다. 설사 그가 메이저에 적응하는 것에 실패한다고 해도 KBO 역시 4년에 연평균 400만 달러의 계약 정도는 너끈히 가능하다.
실패에 대비한 안전한 보험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선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2년. 3,500만.”
“잠깐만요. 단장님. 아무리 그래도 2년 3,500만은. 애초에 필리스에서는 4년 7천만을 불렀습니다. 기간을 줄였으면 AVV라도 높여야······.”
“거기에 옵션으로 500만 정도를 넣어보자고. 300만 정도는 정상적으로 로테이션을 돌면 먹을 수 있게, 그리고 200만 정도는 승부욕을 자극하게 말이야.”
“2년, 옵션 포함 4천만이군요.”
“그래, 뭐 이 정도면 일단 무시를 할 만한 오퍼는 아니지. 최소한 조건을 조절해보려고 노력 정도는 할 거야. 그러면 나머지는 분위기를 봐서 조절을 해보자고.”
***
“뭐? 2년 4천만? 다저스가?”
“네.”
“케빈 그 녀석 지금 제정신인가? 필리스는 4년 7천만, 보스턴은 5년 8천만을 부른 상황에서 고작 2년 4천만이라고?”
“그나마도 옵션이 포함된 금액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쳤군. 그건 그냥 생색내기용이로군. 다저스는 그를 영입할 생각이 없는 거야.”
“그런데, 그것이 또 묘한 게······.”
“묘하다니?”
워싱턴의 단장 제임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빅터 모리츠가 꾸준히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답니다.”
“옵션 포함 2년 4천만짜리 제안을?”
“네.”
“미친, 설마 이거 또 LA 선호인가? 미치겠군. 아니 대체 왜 동양인들은 그렇게 캘리포니아를 선호하는 거지? 쓸데없이 주세만 높은 그 동네를 말이야.”
“아무래도 시차에 따른 경기 방송시간을 생각한다면······. 게다가 그것도 그거지만, 모리츠 코퍼레이션 쪽 직원의 말에 따르면 그가 컨텐더 팀을 원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컨텐더라······.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비슷한 조건이라면 딱히 우리도 꿀릴 게 없다 이 소리겠군.”
제임슨의 시선이 2032시즌 챔피언십 시리즈의 트로피로 향했다.
다저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를 4:2로 제압하고 얻어낸 트로피다.
“3년. 5,000만. 그리고 팀 옵션으로 2천만에 1년 추가. 옵션 행사하지 않을 때는 100만 달러. 이 정도면 금액적인 면에서 다저스를 압도하는 제안이라고 생각되는데.”
“맞습니다. 이런 조건에 같은 컨텐더 팀이라면 다저스보다는 저희죠.”
***
성민이 비행기에서 내린 곳은 모리츠 코퍼레이션의 본사가 있는 로스앤젤레스였다.
이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올해 윈터 미팅이 열리는 곳은 같은 캘리포니아주의 샌프란시스코였고, 윈터 미팅까지 남은 시간 동안 훈련에 매진하기에는 아무래도 모리츠 코퍼레이션의 시설을 사용하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이건 저희 시설의 출입증입니다. 물론 매일 아침 제가 호텔로 데리러 갈 예정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가지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차 키는 여기 있습니다. 일단은 기존의 면허증을 사용하셔도 괜찮지만, 정식으로 계약이 체결된 다음에는 웬만하면 면허 시험을 보셔야 할 겁니다. 원하시는 조건의 팀 중에는 워싱턴 정도만 운전면허 상호인정이 체결되어있거든요.”
“지금은 기존 면허증으로 운전을 할 수 있단 이야기인 거죠?”
“네, 단기 체류의 경우에는 조금 복잡하지만 가능합니다. 대신 경찰에게 잡혔을 때 면허증을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으니, 그냥 저를 불러주세요. 물론 자율주행 모드를 해제하지만 않으신다면 어지간하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한센의 이야기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츠 코퍼레이션에서 성민에게 제공한 테슬라의 신형 모델 X를 타고 도시 외곽의 훈련시설로 이동했다.
“여깁니다.”
필 니크로가 상당히 놀랐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회사라 걱정했는데, 이 정도 시설이라면 생각보다는 훨씬 괜찮구나.
‘이게 고작 괜찮은 정도라고요?’
물론 성민은 필 니크로 이상으로 놀랐다.
일개 에이전시에서 보유한 연습실의 시설들이 프로구단인 마린스의 시설보다 월등하게 좋았다. 각종 관측장비는 말할 것도 없었고, 웨이트 트레이닝를 위한 장비부터 필라테스 도구까지 어느 것 하나 명품이 아닌 게 없었다.
-대형 에이전시들이 시설에 신경 쓰기 시작한 게 1, 2년 전 이야기는 아니니까. 특히 비시즌에 고용하는 인스트럭터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빅리그의 인스트럭터보다 더 뛰어난 경우도 드물지 않지.
‘대단하네요.’
-결국, 다 너희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하는 일이다. 어쨌거나 이 정도 시설이면 훈련하기에는 오히려 한국보다 훨씬 낫구나. 기온도 훨씬 따듯하고.
시설을 살펴보는 성민에게 한센이 말했다.
“아직 12월 초라서 시설을 사용하는 선수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인스트럭터들도 아직 좀 미흡한 상태이기는 한데, 필요하신 부분은 미리 말씀해주시면 단기직으로 고용 가능합니다.”
-으음, 그렇다면 모던 리포머 전문가로 부탁하자꾸나.
성민의 요청에 한센이 고개를 갸웃했다.
“필라테스만으로 괜찮으신가요?”
“네, 피칭에 관한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렇게만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윈터 미팅까지 약 일주일.
모리츠 코퍼레이션의 시설에서 성민이 부지런히 몸을 단련했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뒤.
“어? 김? 김 맞지!!”
“누구?”
예상치 못했던 손님이 찾아왔다.
“내가 누군지 몰라? 끙, 나 그래도 좀 유명해진 줄 알았는데. 좀 섭섭하네. 지금 네가 사용하는 도구들도 태반은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사다 놓은 도구들일 텐데 말이야.”
얼굴만 보고는 쉽게 기억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모리츠 코퍼레이션에 가장 큰돈을 벌어다 준 사람이라면 뻔하다.
“오토? 오토 람머마이어?”
7년 총액 1억 8천만의 대형 삼루수 오토 람머마이어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윈터 미팅(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