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86화 (87/287)

< 겨울의 시작(3) >

몰래 빠져나온 자리를 굳이 뒤따라 나온다?

성민은 바보가 아니었다. 쑥맥 역시 아니었다. 가끔 황색언론이나 부정적인 커뮤니티에 묘사하는 것처럼 밤문화를 즐기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나이에 걸맞는 수준의 경험은 갖고 있는 남자였다.

예슬의 접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영감님.’

-어? 어?

‘뭐 관음증 같은 거 있는 건 아니죠?’

-관음증이라니!! 나를 뭘로 보고!!

‘그러면 여기서부터는 사생활이니까 사생활 보호 모드 좀 작동해 주시죠.’

필 니크로가 닿지 못하는 손길로 성민의 등을 두들겼다.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잠깐만요. 이 손길 뭡니까? 이거 막 결승전 같은 거에서 엄청 감동적인 순간에나 나와야 하는 그런 손길 아닙니까?’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30년간 아껴온 것을 버릴 때가 됐어.

‘아낀 적 없거든요? 엄청 옛날에 그냥 휙 하고 버린 거거든요?’

-알겠다. 힘내고. 처음에는 원래 다들 그런 거니까 너무 실망하고 그러진 말아라.

‘아니라고요!!’

성민의 반박따윈 듣지 않겠다는 자세로 필 니크로의 몸이 허공중에 스르륵 녹아내렸다.

그렇게 언제나 따라붙어있던 귀신이 사라진 지금.

다 큰 어른 남자와 다 큰 어른 여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크기?

강도?

지속력?

기술?

역사 이래, 아니 역사 이전부터 그것은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그런 주장들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것을 한 가지 놓치고 있다.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장비, 피지컬, 기술 모든 것이 갖춰져야 한다. 하지만 최고의 선수 이전에 그냥 선수가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것은 결국 ‘체력’이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진작에 지쳐서 움직임이 둔해질 타이밍이었다.

성민의 몸이 정직하게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확장된 해면체가 마찰 되고 호르몬들이 폭발적으로 분비됐다. 사람들은 종종 그것의 화려한 기술에 대해 착각을 한다. 잘못된 영상 교육의 영향이다.

어디까지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일정 시간 이상의 꾸준한 자극이다.

관련된 논문이 하나 있다.

이런 쓸모 없어 보이는 종류의 논문이 다 그렇듯 영국산 논문으로 성행위를 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 그리고 사용되는 근육에 관한 연구다.

복잡한 숫자를 제외하고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섹스는 운동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장비, 피지컬, 기술이 모두 갖춰져야 하지만 그 이전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결국 체력이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아마추어와 프로는 급이 다르다.

성민은 분명 기술적인 부분에서 부족했다.

하지만 프로야구에서 야수를 뛰던 선수도 아마 야구에서는 0점대 투수로 활약할 수 있는 것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다.

오랜 운동으로 단련된 성민의 단단한 코어와 지구력. 그리고 높은 심폐기능과 투수 특유의 유연함이 빛을 발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어느 유명한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3번 이상을 한다는 것은 글쎄요. 체력적인 부분으로 봤을 때 높은 확률로 조루일 겁니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성민은 프로 선수다. 그것도 최상위권의 엘리트급 프로 선수다. 체력의 질이 다르다.

아이돌이라는 것은 본래 극한 직업이다. 예슬 역시 보이는 것보다는 제법 운동을 많이 한 몸이었다. 체지방은 극도로 부족했지만, 기본적인 근력만 따진다면 동나이의 여성들보다 오히려 훌륭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민에게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른 밤에 시작된 만남이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본래라면 각자의 차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예슬은 매우 취해있던 상태였다.

이른 아침, 분위기에 취해 일을 벌이는 모든 남녀가 그렇듯 어젯밤의 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금 뻘쭘하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물론 시간을 두고 각자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것은 기본이었다.

“저기, 성민 오빠.”

“어, 어.”

“숙소 바로 근처는 위험하니까 조금만 이따가 여기서 내려주시면 될 것 같아요.”

“여기? 괜찮겠어?”

“네, 매니저님 불러 놨거든요.”

“매니저?”

성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회사에 비밀로 하는 것보다 다 알려주는 게 나아요. 안 터지는 게 좋긴 하지만, 그래도 괜히 나중에 터졌을 때 복잡해지기만 하니까요.”

“그래?”

“아, 그리고 제가 그때 드렸던 번호 그거 개인번호니까 걱정 같은 거 하지 마시고 연락 주셔도 돼요. 저도 이제 슬슬 재계약 다가와서 회사에서도 함부로 못 해요. 어, 매니저님 왔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알겠어. 그러면 조심히 들어가고.”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쓴 예슬이 검게 코팅 된 대형 밴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제법 귀여웠다. 흐뭇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성민의 귓가에 누군가 속삭였다.

-좋으냐?

“아, 깜짝이야.”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필 니크로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좋았나보구나.

“좋긴 뭐가 좋습니까.”

퉁명스러운 성민의 대답에 필 니크로가 음흉하게 웃었다.

-으음, 좋지 않았다니. 그래도 괜찮다. 처음에는 다들 그러니까. 뭐 체력적인 부분이야 내가 어마어마하게 단련을 시켰으니 그건 괜찮았을 테고. 역시 기술? 뭐 그것도 괜찮다. 기술적인 부분은 내가 언제든지 지도를 해줄 수가······.

“영감님!!”

-아니, 거 뭐 처음이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그렇게 소리를 지를 것까지야.

“헛소리는 그쯤 하시고, 슬슬 야구 할 준비나 시작하시죠.”

필 니크로의 시선이 성민의 몸을 살폈다.

어깨, 팔꿈치, 허리, 골반.

-그러고보니 슬슬 때가 되긴 된 것 같군.

“때는 진작 지났죠. 제가 배운 대로면 보통 시즌 피로 푸는 데는 보름 정도 푹 쉬어주면 된다고 알고 있는데 전 지금 거의 삼 주를 쉬었잖아요.”

성민의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코웃음을 쳤다.

-정작 훈련을 시키면 매일 뺀질거리기나 하는 녀석 주제에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구나.

“메이저가 코 앞이잖아요. 그리고 요새는 뺀질 거린 적도 없거든요.”

성민이 필 니크로를 만난 지도 1년 하고 2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기본적으로 성민은 재능이 넘치는 인간이었다. 남들은 열 번을 해야 하는 일을 한두 번 만에 해낸다. 그렇기에 서너 번 정도 반복을 하면 만족을 해버리는 습관이 들었다. 한두 번, 서너 번을 할 때는 쑥쑥 늘던 기술이 그 이상의 반복에서는 그처럼 쉽게 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2개월 동안 필 니크로는 그런 성민의 근성을 기본부터 뜯어고쳤다. 지난 3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아온 사람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필 니크로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

인간은 충격적인 일을 경험할 때 변화한다.

그리고 성공의 경험은 그 자체로 커다란 충격이다.

일정 이상의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느끼던 천재가, 임계점을 넘어가는 노력을 했을 때 더 커다란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제 성민에게 노력은 커다란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로 자리 잡은 셈이다.

-그래, 이제 훈련을 시작하자.

***

야구가 모두 끝난 겨울.

메이저리그 사무국 직원들을 비롯한 30개 구단의 단장과 프런트들과 마이너리그의 관계자들. 그리고 에이전트, 언론인 등이 모이는 자리가 있다.

기간은 3박 4일. 총 참가 인원은 약 4천여 명. 야구에서 선수가 아닌, 선수 외의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가장 큰 축제인 윈터 미팅이다.

리그의 이슈들을 논의하고, 앞으로 리그를 어떤 식으로 끌어나갈지를 논의한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서로 얼굴 보기 힘든 넓은 미국 대륙의 30개 구단 단장들이 모두 모인 만큼 트레이드에 대해 가장 활발한 이야기가 오간다.

에이전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자리인 것은 마찬가지다. 무명의 에이전트들은 이 자리에서 수천 장의 명함을 뿌린다. 당해 S급 FA를 보유한 에이전트들은 분위기를 살피고 조금이라도 비싼 값에 선수를 팔아먹기 위해 애를 쓴다.

빅터 모리츠 역시 본래는 그것에 맞춰 일정을 계획했다.

물론 언론이나 구단 등에 떡밥은 쉴새 없이 풀었다.

그리고 기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를 잡아갔다. 목표는 윈터미팅에 맞춰 사인하고 전국의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12월 첫째 주에는 출국을 해야 한다 이 말이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흐음······.”

턱을 긁적이는 성민에게 한센이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뇨, 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고요.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12월 둘째 주에 있어서 말이죠. 아마 골든글러브랑 MVP를 줄 것 같은데, 좀 아쉽네요.”

“둘째주라면, 만약 계약이 빠르게 성사가 된다면······”

성민이 한센 릴로우의 말을 끊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뭐 그건 대리 수상 맡기면 되는 문제니까요.”

“다행이군요. 그러면 비행기 티켓은 준비해두겠습니다. 협상을 진행 중인 구단의 조건과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를 해뒀으니 이걸 살펴보시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김성민, 드디어 미국으로 출국?]

[KBO의 정복자 김성민, 다음 목표는 MLB다!!]

[11월 29일 출국 예정!! 과연 김성민이 선택할 팀은 어디가 될까?]

[김성민!! 현재 링크 중인 구단만 11개. 이번 시즌 투수 FA 2순위.]

[게리 빌로우, 필리스에게 쓴 소리. ‘메이저 경험이 한 번도 없는 AA리그의 너클볼 투수에게 1,600만은 너무 과다하다.’]

[12월 둘째주 골든 글러브. 과연 김성민은 MVP를 무사히 수상할 수 있을까?]

-MVP를 무사히 수상할 수 있냐는 말은 또 무슨 개소리지?-

-그냥 기레기가 트래픽 받아먹으려고 하는 개소리지. 상 안 받고 미국 간다 뭐 그런 소리 하는 거잖아.-

-개소리 소름 돋네. MVP 대리 수상이 처음도 아니고. 올해 성민이 반이라도 한 선수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반 넘게 한 선수는 좀 있지. 성민이 WAR이 11.74잖아. 당장 마르타 노엘도 9.71이나 했음.-

-근데 계약도 중요한 건 알겠는데, 굳이 저거 시상식 일정이랑 겹치게 가야 하나?-

-메이저 윈터 미팅 시즌이잖아.-

-게리 빌로우 쟨 뭐하는 놈이냐? 지금 메이저 구단들이 성민이를 최소 프론트라이너, 최대 사이영 컨텐더 급으로 보고 있는데 지가 뭐라고 1,600만이 많다고 헛소리임?-

-꽤 유명한 야구 평론가임. 그리고 빅리그에서는 증명한 거 없는 너클볼 투수라는 거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지.-

-할 수 있는 말? 어처구니가 없네. 그리고 필리스? 그거 MLB의 마린스 아니냐? 성민이가 KBO에서 당한 게 있는데 1,500만이 아니라 2,000만을 줘도 거긴 안 갈 듯.-

-가만히 있다가 불의의 공격을 당한 마린스. 지못미 ㅠㅠ-

-우리 마린스 함부로 까지 마라. 까도 내가 깐다.-

***

“젠장, 미치겠군. 필리스 이 미친 놈들은 대체 어디까지 가격을 올릴 생각인 거야.”

“왜 또, 얼마까지 비딩을 했다는데?”

“4년 7천만.”

“4년 7천만? 맙소사.”

“물론 2,000만에 대해서는 20년짜리 디퍼가 들어가긴 했지만, 이건 이미 예상했던 금액보다 훨씬 높은 금액이야.”

“빅터 모리츠쪽 반응은 어때?”

“디퍼를 가지고 트집을 잡고 있기는 한데, 일단 4년 7천만 정도면 금액적으로는 만족스럽다. 이런 느낌이야.”

보스턴의 단장 존 맥도웰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기간을 늘리고 AVV를 낮추자.”

“이봐, 존 아무리 세부 지표가 좋다고 해도 빅리그에서 보여준 게 없는 투수잖아. 4년 이상은 부담스럽다고.”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분위기에서는 어쩔 수가 없잖아. 우리도 당장 내년부터는 슬슬 시동을 걸어봐야 해. 쓸만한 에이스급 투수를 픽 손해 없이 데려올 수 있는 기회야. 게다가 생각해보면 나이도 그리 많지 않잖아. 5년 8천만으로 가보자.”

윈터 미팅까지 남은 날짜는 이제 닷새.

떡밥용으로 남겨둔 두 팀이 있는 힘을 다해 성민에게 달려들었다.

< 겨울의 시작(3) > 끝

ⓒ 묘엽

작가의 말

지온공님 후원금 고맙습니다.

너클볼은 전체관람가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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