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의 시작(2) >
성민에게 각종 행사에 초청장과 CF 제의, 방송 출연 요청이 쏟아졌다.
“감독님, 김성민 선수 일정상 어렵다고 그러는데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지금 막 한국 시리즈 끝나서 그거 특수로 그런 것 같은데, 차라리 12월 이후는 어떨까요?”
“뭐라는 거야. 이 멍청한 새끼가? 너 그 머리로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냐?”
“아니, 물론 지금보다는 조금 덜 핫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야 이, 멍청아 덜 핫하기는 뭘 덜 핫해. 그때 되면 김성민 한국에 없을 걸 생각해야지. 걔가 뭐 다른 선수들처럼 다음 스프링트레이닝까지 시간이 비는 줄 아냐? 걔 미국 갈 거잖아. 미국.”
“아!!”
“아는 무슨. 어휴, 진짜 이 돌대가리 새끼가. 야 너 당장 꺼져. 그리고 김성민 잡아 올 때까지는 내 눈앞에 나타나질 마. 알겠어?”
기본적으로 야구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다. 국가대표 축구를 제외한다면 야구의 인기를 누를 수 있는 종목은 없다. 하물며 성민의 경우는 거기서도 한층 더 특별했다.
본래 10 구단의 팬 모두가 사랑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 아무리 시대를 지배하는 선수라고 해도 자기 팀을 폭발시킨 선수를 사랑하기는 힘든 법이니까.
예컨대 올 시즌 재규어스는 성민만 없었으면 14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역대 최다 우승팀이 될 수도 있었다. 성민에게만 3패를 헌납한 돌핀스 역시도 성민만 아니었다면 재규어스와 정규시즌 우승을 다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원한에도 불구하고 KBO의 팬들 다수는 성민을 응원했다.
시기와 질투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드는 법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제 성민이 마린스의 선수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메이저 가겠지?”
“그러면 안 가겠냐?”
“그래도 우리가 막 4년 200억 이런 거 부르면······.”
“넌 기사도 안 보냐? 성민이 지금 미국 가면 연평균 천만달러에서 시작이라고 하던데 너라면 한국에 남겠냐?”
“그러면 4년 하면 480억이네. 휘유. 세금이고 뭐고 다 해줘도 이건 답이 없는 차이 구만. 아니 근데 뭐 KBO에서 잘 뛰긴 했지만, 메이저 경력도 없는데 뭘 믿고 그렇게 많이 주는 거야?”
“그 경력 없는 것 감안 해서 조금 주는 거라고 하더라. 애초에 빅리그에서도 지금 성민이 최소 프런트라이너, 최대로는 올스타급까지도 본다더라고. 그냥 어지간한 팀이면 1선발급이라 이 말이지.”
“어휴, 연 120억이 조금이라니. 무시무시하긴 하네.”
“너클볼 투수라서 금액적으로 더 깎인 것도 있다더라고. 어쨌거나 이번 시즌은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였어. 25인 들락날락하는 애들이 와서 폭발시키는 리그인데 무슨 메이저 1선발급이 더해졌으니 별수 있어? 그냥 메이저 1선발급이 KBO에서 뛰면 이렇게까지 나오는구나 체험한 셈 쳐야지.”
그들의 머릿속에서 성민은 이미 메이저리거다.
즉 자기가 응원하는 팀을 쳐부술 선수가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여 미국에서 양키들을 쳐부숴 줄 선수인 셈이다.
“성민, 일단 여기 CF와 방송 출연 섭외 목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토크쇼보다는 이쪽에 몸을 쓰는 프로그램들을 추천합니다. 아무래도 말보다는 몸을 쓰는 쪽이 편할 테니까요. 보통은 스포츠 특집으로 다른 선수들과 묶어서 출연이지만, 이번 경우는 특별히 단독게스트로 해주겠다는 확답을 받아왔습니다.”
한센의 제안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성민이 목록을 찬찬히 살폈다.
물론 몸을 쓰는 프로그램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프로그램은 단순히 얼굴을 알리는 용도에 가깝다. 그리고 성민이 생각할 때 현재 성민의 유명세는 그런 프로그램에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으음, 글쎄요. 그보다는 차라리 이쪽을 나가고 싶은데요.”
“토크쇼를요?”
“네, 뭐 이 프로그램 같은 경우 MC님도 게스트 배려를 잘 해주는 편이고 악의적인 편집도 거의 없는 프로그램이니까요. 게다가 기획도 꽤 재밌어 보이네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성민을 대신하여 필 니크로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오늘은 정말 귀한 분을 모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퍼펙트라는 단어 아시나요?”
MC의 질문에 평소 무식을 컨셉으로 잡는 보조 MC 정완이 콧대를 높이 세웠다.
“재호 형님. 제가 대학을 못 나왔다고 지금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닙니까? 저도 고등학교 때 영어 83점까지 받아 봤거든요. 퍼펙트. 완전한. 이 정도는 기본 아닙니까.”
“아이참. 이봐요, 정완 씨.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딱 봐도 지금 이거 그거네.”
“그거요?”
“눈치하고는. 지금 퍼펙트 하면 생각나는 사람 없어요? 정완 씨 한국 사람 맞아?”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남리 1883-4. 박정완. 군대는 32사단 백룡 부대. 김효정 씨 지금 저 무시합니까?”
“자자, 지금 뒤에서 귀중한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두 분 진정들 하세요.”
MC가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보조 MC를 중재했다.
“손님이면 정말?”
“네, 맞습니다. KBO 50년 역사 최초로 퍼펙트게임. 완전시합을 달성한 투수. 심지어 한 번이 아닙니다. 지난 5월 12일 정규시즌에 한 번. 그리고 10월 31일 한국 시리즈 7차전에서 또 한 번. 무려 1년에 두 차례나 기록했죠. 김성민 선수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성민입니다.”
“맙소사. 진짜 김성민 선수야. 대박.”
“뭐죠? 효정 씨 혹시 김성민 선수 팬이었어요?”
“KBO 보는 사람이면, 아니 야구를 보는 사람이면 김성민 선수 팬 안 할 수가 없죠. 지금까지 야구 역사에서 퍼펙트게임을 두 번 했던 투수는 김성민 선수가 유일해요. 심지어 그걸 1년 사이에 두 번이나 하고, 게다가 한국 시리즈 7차전에서 해버리다니. 아아. 진짜 PD님. 김성민 선수가 출연하면 출연한다고 미리 말을 했어야죠. 오늘 화장도 평소 화장에 머리도 대충했는데.”
성민이 호들갑을 떠는 보조 MC에게 슬쩍 웃어주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 드라마나 영화의 서브 주인공 정도는 너끈히 할만한 외모라 평가받는 성민이었다. 서브 MC인 정완과 효정 모두 배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외모에서 밀리지 않는다.
“와우, 직접 이렇게 뵈니까 정말 훤칠하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정완 씨 평소에 운동 열심히 한다고 엄청 자랑했는데 지금 성민 선수 옆에 앉으니까 완전 멸치 된 거 아시죠?”
“아니, 물론 제가 열심히 운동하긴 합니다만 어떻게 프로 선수랑 비교를 합니까. 아 근데 오늘 왜 내 자리가 여기지? 재호 형님 저랑 자리 바꾸실래요?”
평소라면 게스트에게 조금 짓궂게 굴었을 보조 MC들 역시 성민을 상대로는 감히 그러지를 못했다. 현재 성민의 인기는 그야말로 최고조다. 괜히 헛소리했다가는 본인들 이미지만 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참에 걸쳐 성민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신인왕 시절 이야기부터 아시안게임. 그리고 올해에 대기록까지. 마린스의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지만, 애초에 오늘 방송은 전국으로 나가는 방송이다. 아무리 야구가 한국 최고의 인기스포츠라고 해도 선수 개인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것은 대본의 문제가 아니다. 말이라는 것은 실로 오묘하다. 그것은 단순히 단어의 조합이 아니다. 그사이에 적절한 악센트, 제스쳐, 표정 등이 포함될 때 더 강한 설득력을 줄 수 있다. 그 증거로 사람은 문장보다는 연기, 연기보다는 노래에서 더 강한 감동을 받는다.
성민의 경우도 그랬다. 그는 제대로 말을 할 줄 알았다. 그것은 성민의 선천적인 재능, 그리고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함양된 풍부한 감정표현. 그리고 마린스에서 지내온 11년의 줄타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풍부한 표정과 제스쳐 그리고 적절한 MSG가 더해졌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성민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사람들이 좀처럼 채널을 움직이지 못했다.
12.3%, 12.7%, 13.1%, 14.4%.
떨어질 생각 없이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시청률에 PD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편집 때부터 대박을 기대하긴 했지만, 이건 그 기대조차 넘어선 결과물이다.
사실, 이 토크쇼는 주중에 심야 토크쇼인 만큼 평소 7, 8%만 나와도 대박인 프로그램이다. 시작부터 두 자릿수인 것 자체가 성민의 인기를 대변하는 것이었는데, 스포츠 스타 주제에 말도 흥미롭게 잘해서 채널을 고정하는 힘까지 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이 프로그램에 배정된 시간은 2시간. 앞뒤, 그리고 중간 광고를 빼도 1시간 30분이다. 그리고 1시간 30분은 단독 게스트로 진행하기에 너무 긴 시간이다.
그렇기에 PD는 이야기의 중간에 시청률을 잡아두기 위한 필살기를 준비했다.
“김성민 선수, 사실 저희가 김성민 선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이요?”
“네, 처음에는 그냥 비싼 거로 하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이게 메이저리그에 가면 뭐 일 년에 백억, 이백억씩 벌 예정이라고 하는 이야기에 그 계획은 바로 철회했고요. 그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물이 뭘까를 더 고민해봤습니다.”
“그냥 비싼 선물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일단 뭔지는 들어보도록 하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보통의 운동선수라면 티가 확 나서 적당히 편집해야 할 그 장면조차도 자연스럽게 살아났다.
“자, KBO 최고의 스타. 아니 이제 메이저리그의 스타가 될 김성민 선수의 관심을 받은 행운의 주인공입니다. 장예슬 양 나와주세요.”
“에? 예슬이? 예슬이가 나온다고?”
보조 MC들의 호들갑 속에서 장예슬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장예슬입니다. 김성민 선수 오래간만이에요.”
여전히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주먹만 한 머리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눈코입. 최근 한참 활동기라서 그런지 본래도 성민의 팔뚝보다 얇았던 다리는 한층 더 얇아진 것 같다. 이제는 로우킥이 아니라 아귀힘으로도 부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니, 그러니까 왜 자꾸 부술 생각부터 하냐고.
보조 MC인 정완이 입을 열었다.
“예슬아. 니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리고 네가 왜 선물이야? 재호 형님.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성민 선수가 예슬이한테 선물인 게 맞는 것 같은데요?”
“아이 참. 오빠는 TV도 안 보세요? 한 달 전에 김성민 선수가 제 팬이라고 이야기 했었거든요.”
“예슬 씨, 이해하세요. 제가 이야기 해봤는데, 정완 씨는 자기 나오는 프로그램 아니면 TV도 안 본다고 하더라고요.”
“윽, 김성민 선수. 잠깐 사이에 절 너무 완벽하게 파악한 거 아닙니까?”
성민의 이야기는 재밌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야구라는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재밌는 이야기다. 하지만 연애 이야기는 다르다. 그건 세상 어디, 누가 보더라도 재밌는 이야기다. 사람들의 시선이 토크쇼에 고정됐다.
최고 시청률 21.8%
성민의 토크쇼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
토크쇼가 끝난 회식 자리.
웃고 떠들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성민은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는 어느 유령 덕분에 술 한잔 입에 대지 못했다.
“역시, 이런 자기관리가 있으니까 그런 기록도 세우는 거네요.”
“그러니까, 나도 알고 지내는 야구 선수 몇 명 되는데 시즌이 끝났는데도 이렇게까지 자기관리 하는 선수는 처음이야.”
“역시 메이저리거는 메이저리거네.”
“어휴, 아닙니다. 메이저리거는 무슨. 아직 확실하게 결정 난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제가 시즌이 끝나긴 했지만, FA 팀이 결정 된 것도 아니고 쇼케이스 같은 거 해야 할 수도 있어서 참는 것뿐이에요.”
사람들의 칭찬에 성민이 겸손하게 손을 저었다. 애초에 한국은 잘난 사람이 잘남을 인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잘난 사람이 겸손한 척할수록 더 잘났다고 인정해주는 경향도 아직 남아 있다.
한참 사람을 상대하던 성민이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제법 커다란 마당이 딸린 교외의 고깃집을 통째로 빌린 터라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
“성민 선수?”
“어? 예슬 씨.”
몇 잔을 받아마신 걸까? 얼굴이 빨개진 예슬이 성민에게 다가왔다. 묘하게 고혹적이다.
-꿀꺽.
필 니크로가 침을 삼켰다.
< 겨울의 시작(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