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84화 (85/287)

< 겨울의 시작(1) >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지금까지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의 술과 음식은 무제한입니다. 모두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파크 하얏트 부산.

미리 준비된 샴페인들이 거품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 샴페인들 대부분이 향한 곳은 고글을 뒤집어쓴 성민이었다.

“새끼, 고생했다.”

“선배님, 고생하셨습니다.”

“성민아, 고맙다.”

머리카락부터 새로 갈아입은 우승 기념 티셔츠까지 모두 샴페인으로 흠뻑 젖었다. 성민을 축하하는 것은 선수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시즌 초에 공 감독이 딱 그러는 거야. ‘사장님께서 저를 믿고 맡겨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우승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래요, 올해는 일 한 번 내봅시다.’ 그리고 내가 어? 외부에서 부는 바람을 아주 싹 막아줬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시즌 끝날 때쯤에 공 감독이 또 그러더라고. ‘모두가 한 끗 차이였습니다. 우리가 우승한 결정적 이유는 사장님의 도움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이야.”

“어휴, 이봐. 김 사장. 그 이야기 벌써 열 번도 넘게 들었거든? 그보다 우리도 얼른 김성민 선수랑 사진 한 장 박게 해달라고. 그리고 거 사인볼도 몇 개 좀 해주고. 오늘 여기 간다고 하니까 우리 손녀가 아주 난리도 아니야.”

“커험. 사인?”

“왜? 힘들어? 하긴 오늘 우승한 날인데 사인 같은 거 하긴 좀 힘들겠지. 거기다가 듣기로는 오늘 경기를 끝으로 성민 선수는 이제 마린스 소속도 아니라고 하더만.”

“아니, 힘들긴 뭐가 힘들어. 내가 어? 사장이야. 사장. 내가 김성민 선수랑 얼마나 친한데.”

큰소리를 빵빵 친 사장이 슬쩍 성민에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성민은 마린스의 사장이 하는 부탁 정도는 거절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기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당연히 해드려야죠. 사장님 지인이신데요. 애 이름이 뭔가요?”

“김진주라고.”

“여기 있습니다. 핸드폰도 이리 주세요. 제가 팔이 길어서 사진도 잘 찍습니다.”

야구와 큰 관계도 없으면서 이 자리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몇 초 안 되는 일을 하는데 그런 사람들과 척을 질 이유는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치진, 프런트, 감독, 사장. 그리고 구단의 높은 분들까지. 특히 높은 사람일수록 꼭 성민과 사진 한 장을 찍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귀찮았지만, 기꺼이 웃으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게 다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맥들이다.

한참 사진을 찍던 성민에게 선수들이 또다시 다가와 술을 퍼부었다.

-야, 핥지 마라.

‘네?’

-의뭉 떨지 말고. 한 방울도 안 되니까 그냥 물만 마셔. 아니면 저기 무알콜 샴페인 마시고 취한 척하던지.

‘아니, 샴페인이 무알콜이면 그게 샴페인입니까?’

-탄산이라도 마시게 해주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이틀 쉬고 등판해서 9이닝을 던진 놈이 당장 집에서 쉬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깨 아이싱하고 마사지 좀 받았다고 시상식이니 축승회니 뭔지 참가하는 것부터가 에러야.

‘그야 우승이니까.’

-그래, 우승이니까 특별히 허락해주는 거다. 알콜은 금지야.

심한 운동 이후 알콜을 섭취하면 안 되는 것은 상식이다. 단순히 근육이 지친 정도라면 뭐 근섬유의 회복을 조금 늦추는 효과 정도니까 오늘같이 좋은 날 술 좀 마시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투수, 그것도 성민처럼 많은 공을 던진 투수의 경우는 곤란하다. 알코올이 혈관을 확장해 손상 부위를 더 붓게 만든다. 연조직 역시 예외는 아니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

가장 축하받고 즐겨야 하는 선수인 성민은 술 한 모금 하지 못한 채, 마치 팬 사인회에 온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즐거웠다.

[2032 한국 시리즈 우승]

호텔의 벽에 붙어 있는 저 커다란 현수막과 벽 한쪽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번 시즌의 영광스러웠던 순간들.

그것은 성민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가장 완벽한 밤이었다.

***

“생각보다 많은 구단에서 문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하신 조건 말입니다.”

“네, 조건이 왜요?”

한센 릴로우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크게 펼쳐 화면을 넘겼다.

“그러니까 예전에 말씀하셨던 조건이 선발 보장, 마이너 거부,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 즉각적인 컨텐더. 그리고 야수들의 수비수준 그리고 불펜의 질이었잖습니까.”

“그렇죠.”

필 니크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마린스에게 학을 뗀 건 잘 알겠는데 지금 저게 말이 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제가 지금 슈퍼 갑이잖아요. 이럴 때 팍팍 질러봐야죠.’

-아니, 그야 그렇다지만 저건 애초에 뜨거운 얼음이나 차가운 불같은 조건이잖아. 불가능한 조건이라고.

한센 릴로우가 말했다.

“말씀하신 조건을 전부 수용할 수는 있습니다.”

-뭐라고? 저게 다 수용이 된다고?

필 니크로가 경악했다,

‘그러게요. 저게 다 된다네요.’

일단 질러놓은 성민 역시 당황했다.

사실 성민이 말한 조건은 하나하나만 따진다면 가능한 조건들이다. 하지만 그 교집합은 불가능한 조건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성을 만날 때 특정 부분이 좋은 사람보다 모든 부분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애초에 즉각적인 컨텐더 팀이라는 조건 자체가 최소한 지구우승은 도전할 수 있는 팀이라는 말이다. 그것만 해도 30개 구단 가운데 절반은 사라진다. 거기에 평균 이상의 수비를 보여주는 야수라는 조건, 평균 이상의 불펜이라는 조건이 더해진다. 이 정도면 메이저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강팀이다.

그리고 그런 팀이 성민을 원해야 한다. 성민은 좋은 투수지만 너클볼 투수라는 특이한 투수이기도 하다. 성민을 쓰기 위해서는 전담 포수가 필요하다. 그런 최상위권 팀에게 로스터 두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투수는 조금 까다로운 조건이다.

보통이라면 이 정도 조건이면 다 나가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성민이 KBO에서 거둔 성적은 그 까다로운 조건들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성적이었다.

아마 AA리그에서 성민 같은 성적을 거뒀다면(물론 애초에 그 비슷한 성적을 몇 달이라도 냈으면 바로 빅리그 콜업이 됐을 테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무조건 BA 1위는 확정이다.

실제로 성민을 원하는 구단 상당수는 이미 성민의 수준을 최소 프론트라이너. 최대 올스타급 투수 혹은 사이영 컨텐더로까지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최근 MLB의 흐름 속에서 컨텐더 팀이 빅리그 경험이 아예 없는 선수에게 선발 보장과 마이너 거부를 주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전면적 트레이드 거부가 문제다.

이건 성민이 어떤 성적이 나오건 그를 처리하려면 지명할당 말고는 답이 없다. 그리고 지명 할당의 경우 잔여 연봉을 전부 지급해야 한다. 그렇기에 구단에서는 차라리 돈을 더 주면 더 줬지, 마이너 거부면 몰라도, 전면적 트레이드 거부 같은 건 어지간하면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연봉 협상에서 매우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제외해야 하는 구단들도 너무 많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 하자면요?”

“일단 말씀하신 조건에서 팀의 성적 적인 부분만 따진다면, 양키스, 다저스, 컵스, 내셔널스, 자이언츠 정도만이 후보에 속할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저희 쪽으로 제의가 들어온 건 총 세 개 팀입니다.”

“어디 어디죠?”

“다저스, 내셔널스, 자이언츠입니다.”

다저스, 내셔널스, 자이언츠. 메가마켓, 혹은 빅마켓에 속하는 팀들이다. 다저스야 본래 쉬지 않고 달리는 팀이고, 내셔널스와 자이언츠 역시 앞으로 2, 3년 정도는 꾸준히 윈나우로 달릴 예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을 주장하신다면 사실상 다저스는 최종적인 협상 대상에서는 제외될 겁니다. 다저스는 최근 7년 간 단 한 번도 전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을 준 적이 없습니다. 내셔널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죠. 하지만 거기는 3년 전에 자기 팀의 프랜차이즈였던 오웰에게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을 줬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어차피 3년 뒤에는 자동으로 생길 권리이긴 했지만요.”

“결국 트레이드 거부권이 문제라 이 말이로군요.”

“네, 일부 구단이라면 몰라도 전 구단을 대상으로 한 트레이드 거부권을 요구하신다면 연봉에서 정말 큰 손해를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저희 예상으로는 총액 기준 30%이상 삭감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기간도 많이 짧아질 거고요.”

한센이 많이 망설이며 말했다. 사실 총액 기준 30%에 기간까지 짧아진다는 이야기는 그거 절대 하지 말라는 이야기나 다름 없다.

즉, 한센은 지금 자신의 고객인 성민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적당히 돌려 말하고 있는 셈이다.

애초에 트레이드 거부권의 경우 얻어내기 정말 까다롭다.

물론 특정 팀에서 뛰던 프랜차이즈 스타라면 전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을 얻어내는 것도 여전히 가능 하다. 기본적으로 메이저리그는 1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선수 중에서 같은 팀에서 5년 이상을 뛴 선수에게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민의 경우는 메이저 경험이 전무하다.

“김성민 선수. 그래서 말인데요.”

“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김성민 선수가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거는 것은 이길 수 있는 팀에서 안정적으로 뛰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렇죠.”

“그렇다면 굳이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까지는 필요 없지 않을까요?”

“그러면요?”

“그러니까, 보통 30개 구단 가운데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팀은 지구 우승팀 6팀과 와일드 카드 4팀 해서 10개 팀입니다. 그리고 그걸 다툴만한 팀은 최소 15개 팀 정도는 되죠. 그러니까 15개 팀 트레이드 거부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군. 보통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은 컨텐더 팀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보다는 특정 팀 아니면 뛰기 싫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 받아내는 법이지.

성민이 잠깐 고민했다.

KBO의 경우 트레이드 자체가 매우 드물다. 특히 에이스급 선수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MLB의 경우 팀의 중심 선수조차도 팀에서 ‘나 내년부터 탱킹임.’하는 순간 곧바로 팔려나갈 수 있다.

그건 애써 여러 가지 조건을 맞춰 컨텐더 팀에 들어가더라도 엉망진창의 팀으로 팔려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15개 구단 정도를 제한한다면?

“좋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전 특정 팀에서 뛰고 싶다기보다는 마······, 아니 이길 수 없는 팀에서 뛰기 싫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최대한 많은 팀에 대한 트레이드 거부권을 가져왔으면 좋겠군요.”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죠?”

“만약 더 많은 돈과 다른 조건들이 다 충족되는데 당장의 성적이 조금 안 좋았던 팀이 있습니다. 대신 충분한 빅마켓이고 모여있는 유망주도 많아서 앞으로 달릴 준비도 다 됐다면 그런 팀은 어떠신가요?”

“어딘데요?”

“그러니까 보스턴이라던지 필리스라던지······”

성민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거기 이번 시즌 승률 뒤에서 2등이랑 5등이잖습니까. 몇 년째 유망주들 모아놓고 고사만 지내고 있고요. 게다가 보스턴은 유망주들도 죄다 타격만 보고 뽑아서 수비가 30개 구단 최악 아닌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길 수 있는 팀에 가고 싶습니다.”

한센 릴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 미팅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한 달하고 열흘.

선수들의 싸움은 끝났다.

책상 위에서 돈과 데이터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의 시간이 시작됐다.

< 겨울의 시작(1) > 끝

ⓒ 묘엽

작가의 말

요즘 코로나가 기승입니다.

다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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