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에이스(5) >
7회.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미쳤네. 이틀 쉰 투수한테 경기를 계속 맡긴다고?-
-이틀을 쉬었건 사흘을 쉬었건 지금 투수가 퍼펙트를 하고 있는데 계속 맡겨야지. 그러면 이만 내려오세요. 이러냐? 심지어 이거 한국 시리즈 7차전 끝장 승부인데?-
-성민이 재작년에 팔꿈치 수술한 투수임. 메이저도 팔꿈치 수술한 투수 복귀 해에는 180이닝 이상 잘 안 맡김. 근데 성민이는 정규시즌에 포스트시즌까지 하면 무려 231이닝째 던지는 거야.-
-지금 언제 적 소리 하는 거야? 빅리그도 재활기술 발달하고 최근에는 1년 재활하고 복귀해에 200이닝 던지는 애들 엄청 많거든? 거기다가 성민이는 재작년 9월 수술이라 실제로 재활 1년 6개월에 가까웠음.-
-뭐가 어찌 됐건 중요한 건 우승 아니겠냐. 팀에서 선수 팔꿈치 아끼는 것도 다 우승하려고 아끼는 건데, 지금 김성민 내리는 건 말이 안 되지.-
-에이스 팔꿈치 갈아서 우승하는 전통을 언제까지 가져가려고?-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그 선택을 놓고 갑론을박했다.
김규찬이 이를 악물었다.
세 번째 타순.
이틀을 쉬고 7이닝째 던지는 선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불펜이 올라와 주는 쪽이 더 쉬울 것이다. 그것은 마린스의 불펜이 10 구단 최약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마린스의 야수들에게서 묘한 여유가 느껴졌다.
7차전, 끝장 승부에서 여유라니.
‘젠장.’
7차전 끝장 승부.
퍼펙트.
야수들이 긴장으로 몸을 딱딱하게 굳히기 딱 좋은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그런 긴장감이 아닌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압도적인 에이스가 주는 힘이었다. 그것은 연패의 와중에도 그것을 끊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김규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다. 점수 차이는 고작 2점.
여섯 개의 공이 들어왔다.
3개의 공을 커트했고 3개의 공을 흘려보냈다.
그리하여 볼카운트 2-2
분명 야구에서 2점은 그리 큰 점수가 아니었다. 누군가 출루를 하고, 누군가 담장만 넘겨준다면 바로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 차이다.
바로 지난 5차전 성민이 내려갔을 때 그들은 불과 5이닝 만에 12점을 뽑아냈다.
성민은 이틀을 쉬고 6이닝을 던졌다. 지금 그가 마운드에 계속 올라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퍼펙트를 기록 중이기 때문이다.
그것만 깰 수 있다면.
성민이 마운드를 지키지 않는 마린스가 과연 지금과 같은 힘을 낼 수 있을까?
천만에.
김규찬이 성민의 일곱 번째 공을 기다렸다. 성민의 손끝을 떠난 공이 두둥실 날아들었다.
98.7km/h의 느린 너클볼.
김규찬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빗맞은 타구.
하지만 코스가 괜찮다. 1루 라인을 따라 공이 흘렀다.
대부분 일루수가 그렇듯 현정현은 뚱뚱했다. 사실 그는 전성기에도 수비가 그리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삼루수도 못 볼 수비라는 평가를 받자마자, 그는 안 그래도 커다랗던 몸을 더 크게 만들었다. 일루수에게 요구되는 것은 커다란 한방이지 날렵한 주루나 수비는 아니었으니까.
그의 몸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반응했다. 물론 그것은 빈말로도 날렵하다는 말을 할만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뒤뚱뒤뚱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몸과 엉망진창의 수비 범위에도 불구하고 현정현은 지명타자가 아닌 일루수였다.
또한, 그는 마린스 내부 비주류 계파의 수장을 맡을 만큼의 실력과 실적을 쌓아온 남자였다. 범위는 좁았지만, 그는 일루수의 미덕인 안정적인 포구만큼은 확실한 남자였다.
다소 불규칙하게 튕겨 날아오는 파울라인 근처의 타구를 그의 미트가 잡아냈다.
반 바퀴 몸을 돌린 그의 시선에 이미 일루로 커버를 나와 있는 성민이 보였다. 미트에서 뽑아낸 야구공을 던졌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 같은 쓰로잉이었다. 전성기의 현정현이 괜찮은 포구에도 불구하고 삼루수를 볼 수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그가 공을 잡은 곳과 일루 베이스까지는 멀지 않았고, 아무리 송구가 느리다고 해도 사람이 뛰는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뻐엉!!
정현을 향해 쭉 뻗은 성민의 글러브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야구공이 빨려 들어갔다. 정확한 송구였다.
일루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웃!!”
[아, 아웃입니다!! 현정현 선수의 훌륭한 수비. 오늘 마린스의 내야진들 집중력이 대단한데요?]
[타구가 나오는 순간 정말 빠르게 반응을 했어요. 여기서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김규찬 선수의 발을 생각할 때 절대 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마운드로 돌아가던 성민이 잠시 몸을 돌려 현정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현정현이 쑥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경기가 이어졌다.
필 니크로가 감동했다.
-그래, 마린스 너희도 할 수 있는 놈들이었어.
그것은 마치 성민이 정상적인, 아니, 정상보다 아주 조금 더 괜찮은 수비를 만나면 어떤 결과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쇼케이스 같았다.
8회.
그리고 9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성민이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한순간, 관중으로 가득 찬 사직 구장에서 함성이 사그라들었다.
재규어스의 앰프가 그 고요함을 깨기 위해 커다란 기계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재규어스의 팬조차도 그 커다란 앰프 소리에 호응하는 이는 드물었다.
“시발,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솔직히 이건 16이나 27 재규어스는 돼야 상대 가능했겠다.”
“헛소리하네. 16년이랑 27년 재규어스라면 쟤를 상대로 점수를 낼 수 있다고?”
“아니, 16년이나 27년 재규어스였으면 쟤 안 나왔던 경기에서 다 이겼을 거라는 소린데.”
“아, 그거면 인정.”
7번과 8번 그리고 9번으로 이어지는 재규어스의 하위 타순.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재규어스의 팬들조차 그저 기도를 드릴 뿐, 사실상 오늘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이 경기장을 뛰쳐나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무리 상대편이라고 해도, 심지어 그것을 당한 쪽이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이라고 해도. 그냥 경기장을 뜨기에 한국 시리즈 7차전의 퍼펙트라는 기록은 너무나도 위대했다.
이왕이면 우리 투수가 누군가에게 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그 순간을 현장에서 지켜봤다는 것만으로 자자손손 자랑하기에 아깝지 않은 대기록이었다.
7번 타자 초구 내야 뜬공 아웃.
부산의 팬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8번 타자. 수비 포지션이고 뭐고 뒤를 생각하지 않는 대타자로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7구째 루킹 삼진.
이제는 부산의 팬 중에서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키가 작은 어린아이들이 좌석을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마지막 9번 타자.
마린스의 야수들이 몸을 낮췄다.
초구 헛스윙.
두 번째, 현정현의 글러브를 아쉽게 벗어나는 1루 쪽 파울.
세 번째, 존을 벗어나는 느린 너클볼.
그리고 네 번째.
자신을 바라보는 성민을 향해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진하는 몸의 에너지와 꼬여있던 몸의 회전력. 힘차게 내려치는 팔의 스윙.
그리고 그사이에 집중하는 것은 오직 손끝의 감각뿐이었다.
117.4km/h
그리고 2.6회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하지만 평소보다는 확실히 좋은 그 어정쩡한 너클볼이 마지막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바로 그 순간.
사직 구장을 가득 메운 부산의 팬들이,
아니, 사직 구장을 들어오지 못한 채 구장 밖을 지키고 있던 수많은 부산의 팬들이.
아니, 각자의 사정으로 경기장조차 찾지 못했던 모든 부산 마린스의 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누군가는 평생을 기다려 온,
“그래, 이게 야구지. 내가 이거 보려고 40년을 참았어.”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보다 더 소중했던,
“와, 미친. 김성민!! 김성민!! 새끼야. 너 인마! 내가 와. 진짜. 너. 소개팅. 와. 진짜.”
또 누군가에게는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랑하던 사람이 그토록 바라왔던,
“아부지. 아니, 1년만 더 참지. 준플 진출한 게 뭐라고 고작 그거에 만족하고 가셨소. 마린스가 이렇게 우승을 했는데.”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마린스라는 팀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시부럴.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다.
[한국 시리즈 7차전. 완벽한 투수가 완벽한 게임을 만들다. 부산 마린스 2:0 승리!!]
[40년. 긴 기다림의 끝. 부산 마린스, 마침내 우승!!]
[어메이징 김성민!! 9이닝 퍼펙트!! 부산 마린스를 우승으로 이끌다.]
[그 누가 예상했을까. 부산 마린스의 40년 만의 우승을!!]
[최, 염. 그리고 김. 마린스를 우승시킨 사나이들.]
-허허허, 그러니까 마린스가, 마린스가 통합우승이라고? 우리 마린스가?-
-그러니까, 정규시즌 무패에 포스트시즌 무패. 퍼펙트만 두 번에 총 233이닝쯤 던져주는 투수가 있으면 마린스도 한국 시리즈 7차전 벼랑 끝 승부에서 우승할 수 있다 이 말이네?-
-이번 시즌 김성민은 많은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기록은 마린스를 강제로 우승시킨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마린스 니들이 생각 있으면 김성민 무조건 영결 가자.-
-아직 현역인데 영결은 무슨 영결이야. 거기다가 메이저 갔다가 돌아올 수도 있음.-
-넌 오늘 성민이 던지는 것도 못 봤냐? 얘가 메이저에서 리턴을 한다고? 만약에 그러잖아?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저 갓갓성민······. 설마 진짜로 마린스를 우승시켜 버릴 줄이야.-
-진정하고. 영결은 은퇴할 때 해도 안 늦어.-
-마린스 시부럴 새끼들. 나중에 성민이 은퇴할 때 영결 바로 안 주기만 해봐. 내가 진짜 찾아가서 죄다 불 싸질러 버릴 거야.-
-우승하기 싫다고 발악하는 마린스를 우승시키는 방법. 퍼. 펙. 트. 갓성민 그는 신이야.-
***
“존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군.”
“잠깐만. 케빈. 혹시 내 귀가 고장이라도 난 건가? 지금 내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거절이라니?”
존의 스마트폰 너머 케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 자네 귀는 아주 멀쩡하다네. 회의를 해봤지만, 그 제안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군.”
“메츠? 설마 메츠인가? 메츠에서 내민 제안은 빅터가 메인으로 알고 있는데. 이봐, 물론 빅터 정도면 괜찮은 외야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게일은 작년 전체 51번이었어. 게다가 마이너 성적만 보더라도······.”
“워워, 나도 잘 알고 있어. 빅터보다 게일이 훌륭한 자원이라는 것 정도는 말이야.”
“그러면 대체 왜?”
“트레이드는 하지 않을 생각이야. 우리도 올리버가 필요한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 말이지.”
존이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아니다. 그럴 리가.
“이봐 케빈. 자네 2억 1천만을 주고 에드 맥밀런과 8년 계약을 한 게 바로 작년이야. 게다가 팜에는 올리버보다 우수한 2명의 백업이 대기 중이잖아.”
“그래, 그렇지. 하지만 너클볼을 받을 만큼 포구가 좋은 녀석은 올리버뿐이니 우리로도 어쩔 수 없지 않겠어?”
“맙소사.”
이번 시즌 내셔널리그의 준우승자.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양키스와 함께, 안식년 없이, 매년 우승을 노릴 수 있는 또 하나의 팀.
작년을 기준으로 가장 많은 사치세를 부담했으며,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내년에도 역시 가장 많은 사치세를 부담할 것이 확실한 팀.
LA 다저스가 성민의 영입에 뛰어들었다.
< 세 번째 에이스(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