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82화 (83/287)

< 세 번째 에이스(4) >

‘지금?’

공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진섭은 놀라운 재능을 지닌 유망주다.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한 호섭과 비교했을 때, 어쩌면 진섭 쪽이 이미 더 좋은 타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절함이 다르다.

돈과 명예는 언제나 강력한 동기다.

적은 연봉을 받는 진섭에게 우승 보너스는 간절하다. 하지만 이제 기량이 꺾이기 시작하여 경쟁력이 떨어져 가는 선수에게 우승의 명예는 그 보너스 이상으로 간절하다.

그걸 공 감독이 어떻게 아느냐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젊은 시절의 그도 역시 그러했었는데.

호섭이 타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의 눈에 마운드에 우뚝 선 슈미트 노이만이 보였다.

좋은 투수다.

하지만 그가 상대했던 수많은 투수 가운데 슈미트 노이만보다 훌륭했던 투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타자라는 직업은 패배를 감내할 줄 알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애초에 타자와 투수의 싸움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10번 중 4번을 이기는 것으로 ‘전설적인’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고, 10번 중 3번을 이기는 것으로 시대를 풍미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타자다.

그렇기에 패배를 잊지 못하는 자는 절대 좋은 타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패배에 익숙해지는 사람도 역시 좋은 타자는 될 수 없다.

패배를 잊을 수 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그 절묘한 어느 지점. 오직 그 지점에 남을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좋은 타자로 남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섭은 좋은 타자가 될 정신적인 자질을 타고 태어났다.

물론 호섭이라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마추어를 거쳐 프로가 됐을 무렵 호섭은 열 번을 싸워 일곱 번을 져도 괜찮은 직업은 개이득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호섭은 그렇게 좋은 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타석을 코앞에 둔 호섭이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열 번 중에 세 번을 이기는 것만으로도 좋은 타자는 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타자가 됐다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 투수의 공을 치지 못하면 화가 나서 잠도 자지 못했던 시절의 김호섭을 떠올렸다.

아마추어 시절 수많은 패배를 통해 닳고 닳아 사라졌던 그 어린 호섭이 타석에 들어왔다.

전성기에 비하자면 많이 부족하지만, 초등학생 시절 처음 방망이를 잡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량, 그리고 육체적 능력이었다. 하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 역시 초등학교 시절 비리비리하던 그런 녀석이 아니었다.

초구.

146.7km/h의 속구.

호섭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높게 뜬 타구가 일루 파울라인을 아득히 벗어났다.

완벽하게 방망이가 밀렸다.

‘젠장.’

타이밍을 조금 더 빠르게 가져가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을 끝까지 보기 힘들다. 게다가 슈미트 노이만의 경우 디셉션도 꽤 좋은 편에 속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역시 1루에 박동엽이 서 있다는 점이었다. 와인드업 포지션에 비해 세트 포지션에서 던지는 공의 구위가 확실히 떨어진다. 1루의 동엽이 네 걸음까지 걸어 나와 슈미트 노이만을 자극했다.

호섭이 고민하는 사이, 두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슬쩍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뻐엉!!

긴가민가 싶었지만, 방망이를 내밀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그리고 슈미트 노이만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호섭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어렸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공을 쳐 낼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호섭은 그렇게 해도 괜찮은 타자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27세를 기점으로 점점 하락하기 시작한 육체적인 기량을 대신하는 것은,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정교한 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10번 중에서 3번. 그것도 슈미트 노이만 같은 상위선발을 상대로는 한 두 번 정도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열 번 중 두 번을 쳐내는 베테랑 타자 김호섭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공을 쳐 내려는 젊은 시절의, 아니 어린 시절의 무모했던 김호섭.

마운드의 슈미트 노이만이 세 번째 공을 뿌렸다.

147.1km/h의 속구.

호섭의 다리가 평소보다 조금 덜 올라갔다.

타격은 매우 정교한 톱니바퀴와도 같다. 어느 부분이 일그러지면 전체에 영향을 준다.

평소와 명백하게 다른 타격 폼.

하지만 호섭의 몸은 그것을 부드럽게 소화했다.

33세.

처음 야구 배트를 잡은 이후로 23년. 프로에 입단하고도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재능 넘치는 선수였지만, 어느 누구처럼 10년, 혹은 100년에 한 번 나올만한 천재는 아니었다. 그래, 굳이 이야기하자면 6개월에 하나 나올 정도의 어중간한 천재다.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과정에 아마 이와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딱!!

낮게 깔린 타구가 2루와 3루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재규어스의 유격수가 빠르게 공을 쫓았지만 늦었다. 1루에 서 있던 동엽이 어느새 2루를 밟고 3루를 향해 질주했다.

-뻐엉!!

“세이프!!”

노아웃 주자 1, 3루.

1루에 선 호섭이 멋지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와!!!!!!””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 속에서 공 감독이 움직였다.

“진섭아, 준비해라.”

4회 말, 마린스가 2점을 가져왔다.

-맙소사, 마린스가 짜임새 있는 공격으로 점수를 가지고 왔어.-

-이거 실화인가?-

-1년 144경기 + 6경기를 삽질했으면 한 경기 정도는 잘할 수도 있지.-

-이 와중에도 폭삼당한 권혁준 어쩔?-

-혁준이는 그냥 성민이 공 뒤로 안 흘리는 거로 만족하자.-

-이제 남은 건 성민이가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인가?-

-불펜 중에 믿을 만한 애는 원직이 뿐이니까 성민이가 8회까진 버텨줘야 안전함.-

-근데 원직이도 이번 시리즈에서는 영······. 그냥 빠따들이 점수를 조금만 더 내줬으면 좋겠는데.-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을 소망하자.-

-그러면 성민이가 9회까지 버텨주기를 소망해야겠네.-

-그게 더 현실적인 소망이라는 사실이 절망적이군.-

마운드의 성민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4회 말의 공격이 너무 길었다. 투수용 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10월 말의 쌀쌀한 날씨가 몸을 약간 굳게 만들었다.

-2점이라. 나쁘지 않군.

‘이제 와서 냉정한 척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아까 호섭 선배가 홈플레이트 밟을 때 달려, 아니 날아가서 호섭이 형 헬멧 같이 두들기셨잖아요.’

-아니, 그건 호섭이 주제에 안타 친 게 기특하니까.

‘저 미국 갈 때 따라오시는 건 맞죠? 사직 지박령으로 업종 변경하신 건 아니죠? 막 마린스가 다음에 또 우승할 때까지 성불 못한다든지. 그런 거요.’

-그 무슨 끔찍한 소리냐!! 다음번 우승할 때까지 사직 구장의 지박령이라니!!-

마크 톰슨부터 시작되는 5회 초 재규어스의 공격.

타석에 들어서는 마크 톰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젠장, 한 몫 단단히 챙기나 싶었는데.’

17년간 여덟 번의 우승을 했던 재규어스인 만큼 우승을 했다고 해서 모기업에서 큰돈을 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승이다. 최소 10만 달러 이상은 기대할 만하다. 반면 준우승을 한다면 2만 달러나 건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더욱더 의욕을 내서 이기기 위해 점수를 뽑아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까마득한 절벽 위의 꽃을 보고 그것을 꺾기 위해 절벽을 오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물며 마크 톰슨은 빅리그에 남아 계속 도전하는 대신, KBO에서 조금 더 편하게 돈을 버는 것을 선택한 남자다. 애초에 그가 그런 정신이 있었다면 지금 그는 KBO가 아닌 AAA와 메이저를 오가고 있었을 것이다.

-부웅!!

“스트라잌!!”

마음이 꺾인 타자의 방망이가 그저 훈련된 대로 움직였다.

“스트라잌!! 아웃!!”

오늘 경기 세 번째 삼진.

5회, 그리고 6회.

성민의 피칭이 이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점 켜졌다.

“야,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우리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냐. 그냥 응원 하는 거지.”

“아니, 그거야 당연하고. 지금 공 감독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성민이 투수용 점퍼를 걸쳤다.

공감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렵군.’

6이닝 동안 0출루.

그래, 퍼펙트다.

5차전 4이닝 동안 퍼펙트 하던 투수를 내린 것은 그것이 우승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6회 말 마린스의 공격. 2:0 상황. 그들의 에이스는 6이닝을 퍼펙트로 틀어막고 있다. 구속은 평소보다 늦지만, 제대로 된 타구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투구 수 역시 양호하다.

우승을 위해서라면 그냥 성민을 이대로 마운드에 두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재작년에 팔꿈치 수술을 받은 투수다. 고작 이틀을 쉬었다. 게다가 내년이면 빅리그로 가는 것이 거의 확정적이며 너클볼 투수의 특성상 40대까지 빅리그에서 던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잘못된다면 메이저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투수의 팔을 갈아서 우승을 가져온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퍼펙트를 기록 중인데.’

이번 시즌 성민은 KBO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를 기록했다.

그것만으로도 불멸의 기록이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 한국 시리즈 퍼펙트라는 기록이 더해진다면? 이건 어쩌면 선수 본인도 탐나는 기록이 아닐까?

공감독의 시선이 성민을 훑었다.

‘어떻습니까?’

-뭐가?

‘팔이요. 얼마나 괜찮겠습니까?’

-평소로 치자면 8회까지 공을 던졌을 때 정도? 아직 위험한 곳은 없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도 없지.

‘그래도 꽤 힘을 빼고 던진 것 같은데 그 정돕니까?’

-꽤 힘을 빼고 던졌으니 이 정도인 거지.

‘저 근데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퍼펙트를 하고 싶은데요.’

-아직 3이닝이나 남았어. 벌써부터 퍼펙트 생각하는 건 이르지. 게다가 다음 타순부터는 다시 상위 타순이고. 김규찬이나 주은철은 꽤 위험한 타자야.

‘만약 7회까지도 퍼펙트로 막아낸다면요?’

-그러면 네 팔은 완투했을 때만큼 지치겠지.

‘그렇다면 역시 그만해야 할까요?’

-내가 이야기한다고 들을 생각은 있고?

‘지금까지 꼬박꼬박 착한 어린이처럼 잘 들었잖습니까. 투정이야 조금 부리긴 했지만 말이죠.’

-그게 투정 조금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성민의 시선이 그라운드를 향했다.

슈미트 노이만은 여전히 140 중후반대의 공을 뿌려대며 마린스의 타선을 틀어막고 있었다.

‘솔직하게 마린스 우승시키고 싶다는 팬심은 빼고 말씀해주세요. 저 9회까지 던져도 괜찮은 몸입니까?’

-힘들지.

‘젠장. 팬심 빼라고 했다고 갑자기 그렇게 솔직해지시는 게 어딨습니까.’

-단.

필 니크로가 성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오늘 경기를 끝으로 한 달 정도 푹 쉰다면 글쎄다.

‘지금 그 말씀 마린스 우승시키고 싶으신 팬심 뺀 거 확실하죠?’

-흥, 애초에 그런 팬심따윈 존재하지도 않는다. 다만.

‘다만?’

-현역시절의 나였다면은 어깨가 부서진다고 해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진행 중인 퍼펙트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 같구나.

필 니크로의 손바닥은 분명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영혼의 손바닥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성민은 그 손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근데 전 어깨가 부서질 정도면 그냥 포기하고 싶은데요?’

-이놈아. 말이 그렇다는 소리다. 말이. 네 어깨 잘못될 것 같으면 9회 아웃 하나 남긴 상황이라도 절대 못 던지게 할 테니까. 넌 너클볼로······

‘세계 최고가 돼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 바로 그거다.

< 세 번째 에이스(4) > 끝

ⓒ 묘엽

작가의 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다음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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