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에이스(3) >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잠깐 주문한 치킨이 도착해서 계산하고 왔는데 왜 재규어스가 공격을 두 번 연속하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설마 잠깐 사이에 야구의 룰이 바뀐건가?-
-야구의 룰이 바뀐 건 아니고, 내가 볼 때 마린스 특별룰이 제정된 듯.-
-으아아아아!! 이 시부럴 놈들. 대체 왜. 어째서. 성민이가 입안까지 친절하게 떠먹여 주는데 그냥 씹어 삼키면 되는데, 그걸 왜 뱉어내냐고!!-
-초구 병살에 루킹 삼진이라니. 이게 야구냐?-
-역시 이 팀은 안 돼. 성민이가 9이닝 퍼펙트를 해도 못 이길 팀이야.-
그 광속의 공수교대에 필 니크로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성민이 네 어깨가 식을까봐 걱정이라도 됐나보군. 아주 따듯한 마음이야.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뭐 야구 하다 보면 저럴 때도 있죠. 아시잖아요. 병살도 나오려면 주자도 나가야 하고, 후속 타자가 공도 쳐야 하고, 나름대로 공격력이 있어야 나오는 거.’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이상하게 납득하고 싶지 않군.
4번 타자 마크 톰슨이 타석에 들어왔다.
그의 입장에서는 직전 이닝, 성민이 던졌던 빠른 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빠른 공을 선택지에서 지우지 않은 타자를 상대로 느린 너클볼.
-뻐엉
“스트라잌!!”
마크 톰슨이 건드려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 공을 흘려보냈다.
볼카운트 0-1.
두 번째, 115.7km/h의 빠른 너클볼.
마크 톰슨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완전히 건드리지 못할 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쳐낼만한 공도 아니었다.
-딱!!
빗맞은 타구가 2-유간으로 쏘아졌다. 위치상으로는 정엽에게 조금 더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바짝 긴장하고 있던 동엽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크게 세 걸음. 그리고 몸을 던져 팔을 뻗었다.
동엽이 글러브 안에 회전하고 있는 공의 묵직한 감각을 느꼈다.
공을 친 마크 톰슨이 1루를 향해 질주했다.
그것은 미리 훈련을 통해 약속된 동작이 아니었다. 생각을 하고 이뤄진 일도 아니었다.
그저 본능.
글러브 안의 공은 아직 완벽하게 죽지 않았다.
동엽이 쭉 뻗었던 왼손을 튕겼다.
그의 글러브 안에서 야구공이 튀어 올랐다.
설명은 길었지만, 상황은 한순간이었다.
행동을 끝낸 동엽이 아차 했다.
시즌 중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정엽은 이렇게 토스한 공을 받지 못 했다. 하물며 지금은 더 힘든 상황이었다. 회전이 죽지 않아 제 멋대로 날뛰는 공을 과연 정엽이 받아낼 수 있을까?
[김정엽!! 공을 받아 가볍게 1루에. 1루에서!!]
“아웃!!”
[아웃입니다.]
정엽이 손을 내밀어 동엽을 일으켰다.
“쫌 하는데?”
“겉멋 단단히 들어서 자기 마음대로 멋이란 멋은 다 부리는 놈 뒤치다꺼리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겉멋이라니. 적절한 수비였다고.”
“흥, 가만히 내버려 뒀더라면 내가 알아서 잘 잡아서 1루로 송구했을거다.”
“그랬으면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였겠지.”
앞으로 팀을 이끌어나갈 성골 출신의 이루수와 비주류 계파의 유격수가 티격태격 말을 주고 받았다.
“뭐, 어찌 됐건 시즌 중에 쉬운 공도 제대로 못 받고 어버버하던 놈이 이거 딱 처리하는 거보니까 마음은 놓이네. 앞으로도 잘 부탁하마.”
“너야말로 바로 근처에 오는 공도 멍청하게 흘리던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공을 잡아내는 걸 보니 내가 다 뿌듯하군.”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네.”
키스톤 콤비가 자기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1년 내내 쌩고생을 시키더니, 이제 슬슬 키스톤이 사람 같아질 기미가 보이는군. 다행이다.
‘이제 어차피 저는 떠나기 직전인데 다행이라고요? 하여간 마린스 팬 아니라고 박박 우기면서 마린스 생각은 또 엄청 한다니까.’
-아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그래 마지막 경기에서라도 제대로 하니까 다행이라는 말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경기가 이어졌다.
재규어스의 타자들은 사흘 전인 5차전에서 성민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날 그들이 느꼈던 성민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철벽이었다.
반면 오늘의 성민은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폴짝 뛴다면 뭔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딱!!
평소 120km/h의 너클볼보다 약 5km/h정도 느린 공이었다. 0.01초. 거리로 따진다면 약 45cm정도의 차이다.
짧다면 짧은 차이.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들에게는 제법 긴 시간, 그리고 긴 거리다. 지금까지는 스치지도 못했던 그들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그것은 성민에게 전화위복으로 작용했다.
맞춰 잡는 피칭은 투구 수를 절약할 수 있고, 삼진을 노릴 경우 투구 수의 낭비가 심해진다는 말은 사실 항상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성민의 경우는 조금 들어맞았다. 평소보다 약해보이는 성민의 공을 향해 재규어스의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타자로는 도움이 되지 못했던 마린스의 동료들이 그라운드에서는 성민을 도왔다. 티격대는 키스톤이 수비의 순간만큼은 정확하게 호흡을 맞췄다.
일루수인 현정현의 수비 범위는 여전히 좁았지만, 그래도 그 좁은 범위에서 공을 잡아내는 모습만큼은 전성기 시절에 뒤지지 않는 완벽함을 보여 줬다.
2회와 3회 그리고 4회까지.
39개.
이닝당 평균 10개도 되지 않는 공으로 성민이 재규어스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야, 아까 성민이 이틀 쉬었다고 불안하다던 놈들 어디 갔냐?-
-진짜 클래스가 다르다. 꼴랑 이틀 쉬고 저렇게 던지는 거좀 봐.-
-근데 잘 던지기는 던지는데, 평소보다 불안한 건 사실 아님? 평소 성민이 보면 이닝당 삼진 1개는 거의 기본으로 잡는데 지금 4이닝 동안 삼진 2개임.-
-대신 투구 수가 적잖아. 내가 보기에는 불펜 놈들 믿을 수가 없으니 일부러 맞춰 잡는 듯.-
-야수 놈들은 믿을 수 있고?-
-왜 성민이는 마지막까지 마린스와 싸워야 하는가.-
공수교대.
마린스 덕아웃 뒤편의 화장실에서 작은 일을 보던 현정현의 옆자리로 박태경이 다가왔다.
“아, 뭡니까? 자리도 많은데 왜 이렇게 딱 붙고 그러십니까.”
“새끼가, 우리가 한솥밥 먹은 세월이 몇 년인데 내외하려고 그래.”
“한솥밥은 개뿔.”
“인마, 네가 그러니까 꼬추가 거기서 더 안 자라는 거야.”
“아, 쫌 보지 마요. 변태도 아니고.”
현정현이 서둘러 마무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야, 손은 씻고 가야지.”
“말 안 해도 씻을 거거든요?”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는 현정현의 등 뒤로 태경이 폭탄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내년 주장은 너 해라.”
“그건 갑자기 또 무슨 헛소립니까? 은퇴도 한참 남은 양반이. 거기다가 호섭이는 어쩌고요.”
“나도 내년이면 계약도 끝이야. 나이도 있고. 내 야구에만 집중해봐야지.”
“팔팔한 양반이 엄살은.”
“그리고 호섭이는. 뭐 나쁜 녀석은 아닌데. 솔직히 주장 깜냥은 아니지.”
“누가 들으면 주장하는데 뭐 엄청난게 필요한 줄 알겠습니다. 선배도 주장 잘 했으면서.”
태경이 웃었다.
“그래서 하기 싫어?”
“젠장. 하여간 너구리 같아서. 올해 우승하고 성민이 사라지면 내년에 성적 엉망 날 거 뻔하고, 호섭이는 그거 감당 못 한다 이거 아니요. 그러니까 나 주장 올려놓고 욕받이 시키려고.”
“그러니까 그래서 하기 싫으냐고.”
“누가 하기 싫답니까?”
“내년에 욕 덜 먹고 싶다고 오늘 우승 포기하진 말고. 나도 은퇴 전에 우승 한번 해보자.”
“누가 들으면 늙어가는 건 선배 혼잔 줄 알겠수다. 우승 급한 건 나도 마찬가지요.”
“새끼, 하여간 끝까지 말은 밉상스럽게 한다니까.”
“아, 쫌. 닦지도 않은 손으로 만지면 어쩝니까.”
“인마. 이게 다 애정이야.”
4회 말.
마린스의 공격.
6번. 선두타자인 박동엽이 타석에 올라왔다.
관중석의 팬들이 수군댔다.
“야, 나 좀 미친 것 같아.”
“왜?”
“왠지 지금 동엽이가 뭔가 해줄 것 같아.”
“너도?”
“뭐야? 나만 그런 거 아니야?”
“우리 같이 미친 건가?”
그들만이 아니었다.
-야, 동엽이가 뭔가 해줄 것 같지 않냐?-
-지금 선풍기한테 뭘 바라는 거냐?-
-얘가 뭘 모르네. 주자 있는 상황에서 동엽이는 느그 선풍기지만, 주자 없는 상황에서 동엽이는 홈런왕 동엽신임.-
-하긴 박동엽 주자 없는 상황에서는 항상 뭔가 해내기는 했던 것 같아.-
-동엽신 시즌 중에도 0:0에서 선취홈런은 3번이나 냈음.-
마운드에 191cm에 길쭉한 팔다리에도 불구하고 몸에 덕지덕지 붙은 근육으로 짧뚱해보이는 슈미트 노이만이 올라왔다.
초구.
147.8km/h의 속구가 바깥쪽 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갔다.
-부웅
“스트라잌!!”
동엽이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타석에서 물러났다.
-저 새끼 제정신인가? 지금 방망이랑 최소 10cm는 떨어졌는데 저걸 아쉬워한다고?-
-아직 0-1이다. 동엽신을 벌써 욕하지 마라.-
두 번째.
138.3km/h의 슬라이더가 아슬아슬하게 존을 벗어났다.
-부웅!!
“스트라잌!!”
볼카운트 0-2
존을 벗어나는 공에 두 번 연속 방망이를 휘두른 상황.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실시간 댓글에 욕설들이 올라올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욕설을 하는 이는 적었다. 아직은 이르다. 박동엽은 원래 선풍기다. 스트라이크 하나 더 먹은 다음 욕해도 늦지 않다.
세 번째.
바깥쪽 꽉찬 코스로 들어오는 것처럼 굴다가 존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동엽의 방망이가 멈췄다.
“방망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재규어스의 포수가 체크 스윙 여부를 물었다. 일루심의 손이 올라오지 않는다.
볼카운트 1-2
-뭐야? 박동엽이 공을 골랐어!!-
-저 새끼 공 고르는 능력이 있었어?-
-너무 호들갑 떨지 마. 박동엽도 가끔 공을 그냥 볼 때가 있어. 물론 그 공이 항상 볼은 아니지만.-
-찍은게 맞았다는 건가?-
바깥 코스 아슬아슬하게 빠지는 가장 빠른 공.
포수의 사인에 마운드의 슈미트 노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148.7km/h의 속구.
이를 악물고 던진 속구가 존을 향해 날아들었다.
살짝 안으로 몰린 공.
그래도 좋은 코스다.
그리고 그 순간, 동엽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오른손이 방망이의 끄트머리로 향했다.
[기, 기습번트? 박동엽 선수 기습번트입니다!!]
안정적으로 낮춰진 몸. 그의 방망이가 148.7km/h의 공을 성공적으로 받아냈다.
힘을 죽인 타구가 1루 라인을 따라 완벽하게 흐른다.
동엽의 몸이 번개처럼 1루를 향해 움직였다.
운동능력 하나는 마린스에서 손에 꼽히는 동엽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번트에 재규어스의 일루수가 허둥지둥 타구를 주우러 달려 나오는 사이 동엽의 발이 일루 베이스를 훔쳤다.
“세이프!!”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번트라니.
저 극단적인 선풍기가 번트를 대다니.
“뭐지? 지금 내가 본 게 현실인가?”
“맙소사. 박동엽이 기습번트라니. 야, 동엽이 이번 시즌에 번트 댄 적 있냐?”
“내 기억으로는 없는데?”
무사 주자 1루.
대기 타석에 있던 호섭이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시발,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성민이 이별 선물 아주 지대로 한번 줘 보자.’
덕아웃.
공 감독의 시선이 구석에 앉아있는 진섭에게 향했다.
< 세 번째 에이스(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