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에이스(2) >
몸쪽으로 날아드는 공.
규찬이 기다렸다.
그 짧은 기다림 속에서 성민의 손을 떠난 너클볼이 스스로 자신의 갈 길을 수정했다. 아래로, 그리고 다시 바깥으로. 그 흔들림 속에서 규찬이 대략적인 움직임을 예측했다.
약 0.2초의 기다림.
그리고 규찬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부웅!!!
“스트라잌!!!”
물론 대략 어디까지 올 것이라 예상하고 휘두른다고 그곳으로 공이 들어간다면, 마지막까지 공을 지켜볼 수 있는 포수들이 너클볼을 뒤로 흘릴 이유는 없다.
헛스윙.
존을 완전히 빠져나간 너클볼을 혁준이 간신히 잡아냈다.
시즌을 치르는 동안에도 가끔씩 받기 힘든 변화의 공이 날아오곤 했다. 물론 그 빈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한국시리즈 1차전 이후, 그런 공의 비율이 눈에 띄게 늘었다.
특히 4이닝 퍼펙트를 했던 지난 5차전에서는 마치 시즌 이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진땀을 빼며 성민의 공을 잡았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늘, 방금 이 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KBO 최고의 투수가 거기서 더 진화를? 아니, 어쩌면 혁준 본인의 수준에 맞춰서 지금까지 살살 던졌던 걸지도······.
혁준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KBO에서 이런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한 실력조차도 그의 전력이 아니었다니.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좀 느리지 않아요?’
-지금같이 공의 회전만 억제할 수 있다면 조금 느린 것 정도야 괜찮아. 재규어스가 아무리 정규시즌을 두터운 뎁스로 가져갔다고 해도 체력적으로 지쳤을 텐데 거기에 플레이오프 다섯 경기, 그리고 한국시리즈 여섯 경기를 치렀어. 쟤들도 지금 정상은 아닐 거다.
114.7km/h
1회 초임을 감안 해도 평소보다 상당히 느린 구속이었다.
비율적으로 본다면 150의 속구가 143까지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다. 일반적인 경우 구속은 매우 중요하다. 150의 속구는 143의 속구보다 0.015초 빠르게 도착한다. 피OPS로 봤을 때 150의 속구와 143의 속구 간에 차이는 약 0.131.
이것은 올스타급 투수와 리그 평균 투수만큼이나 큰 차이다.
하지만 성민의 너클볼은 KBO를 기준으로 언터쳐블 수준이었다. 거기서 저만큼 떨어진다고 해도 절대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공이 아니다. 게다가 저 구속에 따른 피OPS는 속구를 기준으로 한 수치다. 너클볼의 경우는 속구보다 구속의 중요성이 더 떨어진다.
필 니크로가 말을 이어갔다.
-물론 만약 여기가 메이저였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 다시 말하지만, 너클볼이라고 해서 구속이 아예 필요 없는 건 아니니까.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하지만 이 정도 구속에 이 정도 움직임이라면 거의 내가 현역으로 뛸 때랑 비교해도 크게 뒤질 게 없는 공이다.
‘꽤 후하게 봐주시네요.’
-후하기는 개뿔. 야구는 꾸준히 발전해왔어. 당시 내 수준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KBO 정도면 내가 뛰던 시절의 MLB와 비교해서 크게 부족함이 없어. 아마 재규어스 정도의 전력이면 80년대 우리 리그의 컨텐더급이라고 봐도 괜찮을 수준이야.
‘우리는요?’
-너희는, 그래. 80년의 매리너스 정도 되겠군.
‘그게 어느 수준인데요?’
필 니크로가 그윽한 눈빛으로 답했다.
-26구단 유일의 세자릿수 패배 팀이었지. 타자들은 못 치고, 야수들은 못 받고, 거기다가 선발 중에는 마이크라고 27경기에 등판해서 1승 16패. 평자책 7점대를 기록한 녀석도 있었지. 가관이었어.
‘아니 1승 16패에 평자책 7점대인데 대체 선발을 왜 뜁니까?’
-뭐 지금처럼 선발제도가 완전히 정착이 안 된 것도 있었고······.
‘있었고?’
-다른 애들은 걔보다 더 못 던졌거든.
‘망할. 그러니까 지금 그런 팀이랑 우리를 비교한 겁니까?’
-아니, 왜 네가 화를 내는 거냐? 지금 화를 내야 할 녀석들은 80년에 뛰었던 매리너스 애들이거든?
시시껄렁한 잡담이 오가는 사이, 잠시 물러났던 규찬이 다시 타석으로 돌아왔다.
-구속보다 손끝에 더 신경을 써라. 구속과 손끝 다 잡아야 하는 건 맞지만 지금 네 어깨가 보여줄 수 있는 구속은 거기까지다. 그렇다면 억지로 구속을 뽑아내느니 공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써야 해.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프스피드 피치라고 하기에는 미묘하게 빠른, 하지만 규찬이 너무 반응하기 쉬운 수준의 구속까지는 내려가지 않는 절묘한 범위의 공이 존을 공략했다.
-딱!!
높게 뜬 타구를 이루수인 정엽이 가볍게 잡아냈다.
[선두타자, 내야 뜬공 아웃. 마린스, 좋은 출발입니다.]
[그런데 지금 김성민 선수 구속이 114.7 그리고 115.2가 나왔거든요. 확실히 이틀 휴식 이후 등판이라 그런지 1회라는 것을 감안해도 구속이 평소보다 약 2, 3km/h정도 덜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성민이 구속 되게 안 나오네? 이거 심각한 거 아니야?-
-너클볼이잖아. 애초에 너클볼이 120씩 나오는 게 이상했던 거임. 저만큼만 나와도 언터쳐블이니까 걱정 ㄴㄴ함-
-아니, 지쳐서 그런 거 아닌가 싶은거지. 너클볼은 실수하면 그대로 큰거라며. 지쳐서 저렇게 나오는 거면, 실투 나올 확률도 높잖아.-
-맞아, 거기다가 평소에는 실투 조금 나와도 KBO가 원래 120 중반대 공도 종종 놓치는 리그니까 괜찮았는데, 오늘은 실투하면 진짜 완전 배팅볼 되는 거 아님?-
타석에 두 번째 타자가 들어왔다.
파울, 스트라이크. 그리고 세 번째 99.3km/h의 느린 너클볼.
-딱!!
3-유간으로 향하는 타구를 낚아챈 동엽이 그대로 몸을 돌려 1루에 송구했다.
“아웃!!”
몸의 중심으로 공을 처리하기 보다, 팔을 뻗어 공을 잡고 조금 성급하게 공을 뿌리는 모습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즌 내내 하다보니 어느 정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유격수는 안정성이라는 전통적인 야구관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꾸준히 욕을 먹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0.5인분에서 가끔 1.5인분까지도 해내는 유격수다.
3번 타자인 주은철이 타석에 들어왔다. 포스트시즌 들어와 한 경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경기에 출장했던 27세의 젊은 외야수다.
그간의 고생을 말해주듯이 꺼칠한 얼굴에는 뾰루지가 가득했다.
‘저 형은 진짜 비비를 뭘 쓰는 거지? 투수가 이틀 쉬고 등판하는 거면 나름 엄청 고생하는 걸텐데, 왜 피부에 광택이 나냐고.’
자신이 저런 얼굴이라면 밤에 놀러 다니고, 여자도 좀 자주자주 만나느라 야구는 좀 못할 법도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세상이다.
주은철이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마운드의 성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오늘 구속이 잘 안 나온다 이거지.’
평소 성민은 속구를 꽤 즐겨 사용했다. 너클볼에서 실투가 제법 나옴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타구를 맞지 않았던 것은, 성민이 너클볼을 마치 체인지업처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
실제로 150에 가까운 공이 들어오다가 120초 중반대의 공이 들어온다면, 그게 설사 너클볼이 아니라도 제대로 대응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앞선 다섯 개의 공 중에 속구는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구속이 잘 안 나온다는 것을 알고 너클볼 위주로 피칭을 가져가려는 것이 분명하다.
노리는 타이밍은 빠른 너클볼의 타이밍.
공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모르지만, 주은철에게는 일단 타이밍만 맞는다면 스윗스팟을 조금 벗어나더라도 어떻게든 날려 보낼 힘이 있다.
야구공이 성민의 손끝을 떠났다.
잠깐의 관찰,
치켜든 왼 다리로 힘차게 바닥을 디디며 타이밍을 맞추······
-뻐엉!!
“스트라잌!!”
기도 전에 성민의 공이 존을 통과했다.
빠른공.
그것도 매우 빠른공이다.
“잠깐만요.”
은철이 침착하게 손을 들어 잠시 타석을 벗어났다. 그의 시선이 전광판을 향했다.
148.3km/h
현장의 팬들은 물론이거니와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환호했다.
-거봐, 내가 저럴 줄 알았어. 이틀 휴식이라서 컨디션이 별로긴 뭐가 별로야. 그냥 멍청한 마린스 불펜 새끼들 믿을 수가 없으니 자기 손으로 우승 시키려고 힘 조절하면서 던지는 거잖아.-
-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 추위에 한국시리즈 7차전에 사흘 만에 등판해서 1회에 148.3을 던진다고? 성민이가 진짜 괴물은 괴물이네.-
-난 애초에 성민이는 걱정을 안 했음. 내가 하는 유일한 걱정은 마린스 빠따 새끼들임.-
-걔들도 성민이가 여기까지 떠먹여줬는데 양심이 있으면 삼키기는 하겠지.-
-님 설마 마린스의 타선에 양심을 바람? 양심 ㅇㄷ?-
은철이 헬멧을 고쳐 쓰고 장갑을 다시 동여맸다.
‘148.3? 뭐지? 구속이 안 나오던 거 아닌가? 저 형 갑자기 나한테만 왜 이러지?’
필 니크로가 혀를 찼다.
-쯧, 속구가 있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는 생각에는 동의는 한다만 그래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야······.
‘은철이도 야구 잘해요. 어중간한 거 던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잘하는 거 아니까 하는 말이다. 속구가 구속만 빠르다고 다가 아니야. 방금은 공이 거의 복판으로 들어갔다. 녀석이 속구를 염두에 뒀다면 두들겨 맞을 수도 있었어.
‘대신 이제 녀석 머릿속에는 150짜리 속구가 새겨졌겠죠. 앞으로 나올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네 오른팔도 비명을 지르고 있지.
필 니크로의 눈이 성민의 어깨와 팔꿈치를 살폈다.
극한까지 비틀어 낚아챈 결과물이 보인다. 물론 한, 두 번 이렇게 몸을 쥐어 짜낸 공을 던졌다고 바로 팔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몸은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성민은 지금부터 최소 수십 개의 공을 더 던져야 하는 상황이다.
‘괜찮아요. 오늘은 이제 이렇게 더 던지라고 해도 더 던질 생각도 없습니다.’
은철이 타석으로 돌아왔다.
오른손으로 로진백을 두 차례 두들긴 성민이 글러브 안의 공을 움켜 쥐었다.
두 번째.
가장 빠른 공 뒤에 이어지는 가장 느린 공.
존 한복판으로 집어던진 98.7km/h의 너클볼이 춤을 췄다.
물론 성민이 존의 한복판으로 집어던졌다고 해서, 너클볼이 존의 한복판으로 들어갈리는 만무했다.
던지는 투수 본인조차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공이 날아왔다.
앞선 148.7km/h의 공에 비하자면 굼뱅이처럼 느린 공. 자신도 모르게 조금 빠르게 왼쪽 발을 땅으로 내려놓은 주은철의 방망이가 공을 쫓았다.
-딱!!
디딤발의 타이밍부터 글러 먹었다. 어버버하는 사이 몸의 회전력 역시 방망이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심지어 방망이의 스윗스팟에서도 한참을 떨어졌다. 오직 손목의 힘만으로 밀어낸 타구가 힘없이 동엽의 글러브에 틀어박혔다.
삼자범퇴.
성민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강용구 코치가 서둘러 성민에게 투수용 점퍼를 입혀주었다. 한번 달아오른 어깨가 식는 건 곤란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위치. 성민이 자리를 잡았다.
재규어스의 마운드에 슈미트 노이만이 올라왔다.
197cm. 107kg. 게르만계 특유의 야성미가 물씬 느껴졌다.
그를 바라보는 마린스 야수들의 눈에 투지가 넘쳤다.
한국 시리즈 7차전.
뒤를 돌아볼 수 없는 끝장 승부.
든든한 에이스가 자신의 몫을 하고 있다. 이제는 자신들이 저 사직을 가득 채운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시간이다.
마린스의 야수들이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정확히 7분 41초.
-거 봐, 내가 마린스 타선한테는 양심 같은 거 바라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
2회 초.
성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 세 번째 에이스(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