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에이스(1) >
모든 부산 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부산 사람이라면, 특히 마린스의 팬이라면 거의 대부분 마린스의 승리를 기원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아닌 ‘거의’라는 점이었다.
“미쳤군. 이자율이 3.74%라고?”
“그게, 마린스가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요. 포시진출, 정규시즌 우승, 홈관중 100만 달성, 거기다가 이번에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만약 달성하게 되면······.”
지금까지 40년 동안 합법적으로 대국민 금융사기를 자행해왔던 부산은행이 생각보다 커다란 지출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놀란 것은 지난 40년 가운데 거의 20년 가까이 적금처럼 보험금을 받아왔던 부산의 어떤 보험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치겠군.”
“상부에서도 다 이해할 겁니다. 애초에 이건 가이드라인이 있던 금액이었고 연초만 하더라도 오히려 가입을 시킨 것을 칭찬하지 않았습니까.”
“이해 같은 소리 하네. 그놈들이 그딴 걸 생각할 것 같아? 맙소사. 20억이라니.”
프로야구, 아니 세계 대부분의 프로스포츠에는 우승보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승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구단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와 좋아라!! 만 할 수는 없다.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우승 이후에 있을 다양한 행사, 그리고 우승이라는 실적을 거둔 이상 내년의 연봉인상까지. 돈 들어갈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런 점을 노리고 보험사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상품이 바로 이 우승보험이다. 시즌 초반 구단은 적절한 금액을 보험사에 납입한다.
물론 우승을 하지 못하면 그 비용은 매몰 비용이 된다.
어느 보험이 그렇듯, 리스크에 따라 보험료는 다르게 책정되는데, 우승 위험이 높은 재규어스 같은 구단의 경우 우승 시 20억 수령, 보험료 13억이라는 터무니없는 비율을 자랑한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우승과 꾸준히 거리가 멀었던 마린스의 경우는 보험료가 고작 2억 2천만원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것도 작년 준플옵에 진출한 덕분에 좀 오른 금액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재규어스의 선전을 기원할 수밖에.”
***
10월 31일. 낮 최고 기온은 14도.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날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10월의 마지막 날일 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내일의 출근을 걱정하는 보통의 일요일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달랐다.
누군가에게는 10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서 먹었던 치킨을 추억하는 날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바라왔던 일의 결말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조금 이른 시간. 사직 구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일 년에 30, 40번씩 찾아왔던 일상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달라진 것은 10월 31일이라는 날짜뿐이다. 하지만 그 다른 날짜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싸늘한 칼바람에 사람들이 점퍼의 옷깃을 여몄다. 보통은 볼 수 없는 마린스의 가을 점퍼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사직에 등장했다.
하지만 작년과는 또 다르다. 옷은 같았지만 10월의 초순에 입는 가을 점퍼와 말에 입는 가을 점퍼가 같을 수는 없다.
“괜찮겠지?”
“그래도 오늘 경기. 우리 성민이잖냐.”
“하긴, 이틀밖에 못 쉬었건 뭐건 어찌 됐건 우리 성민이지.”
“근데 또, 생각해보니까 열 받네. 공 감독이 5차전에서 뻘 짓만 안 했어도 오늘까지 올 필요도 없었잖아.”
몇몇 사람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부럴, 소개팅까지 뒤로 미루고 왔는데 오늘 아주 지기만 해봐.”
“인마, 서른다섯에 엄마가 해준 거면 소개팅 아니라 맞선인 걸로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잖아.”
“이번 거는 엄마가 해준 거 아니거든.”
“엄마나, 고모나. 어르신이 해준 거면 그게 그거지 뭐.”
몇몇 사람들은 정말 중요한 일을 뒤로 미뤘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경기장 밖을 점령했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사직 구장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오후 2시. 경기의 시작을 기다렸다.
클럽하우스 라커룸.
필 니크로가 말했다.
-생각보다는 괜찮아.
‘뭐 원래 루틴대로 해도 오늘이 불펜피칭 시작하는 날이니까요. 5차전에서 몇 개 안 던졌던 것도 있고, 마사지도 평소보다 훨씬 신경 써서 받았고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틀밖에 안 쉬었어.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이야기 해줄 테니 절대 욕심부리면 안 된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깁니다. 괜히 마린스 우승 시키고 싶다고 욕심부리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잘못될 것 같다 싶으면 바로바로 이야기 해주세요.’
-우승 욕심이라니. 내가 그럴 이유가!!
‘마린스 팬이잖아요.’
-아니다!!
소리를 치며 부정하는 필 니크로의 모습에서, 매일 아침 8시 30분, 욕을 하면서도 본방 사수를 놓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이 엿보였다.
닉 해리슨이 성민에게 다가왔다.
“이봐, 성민.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바짝 다가온 닉이 은근하게 말했다.
“배당금 소식.”
“배당금?”
“그래, 배당금. 이번 포스트시즌, 특히 한국시리즈 흥행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하더라고.”
“그거야 다 아는 이야기잖아.”
“그게 다가 아니야. 이건 내 에이전트가 물어온 소식인데. 이번에 모기업에서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얼마나 되길래?”
우승팀에 보너스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포스트 시즌의 경우 정규시즌보다 훨씬 많은 입장수익이 발생한다. 시청률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KBO의 경우 아직 중계권료가 시청률에 비해 상당히 낮게 책정돼있기에 KBO에서 발생하는 배당금이 아주 큰 것은 아니었지만, 마린스 같은 인기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와 전석 매진을 기록했을 때 수익은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이번 시즌 한국시리즈 우승팀에게 주어지는 배당금은 약 41억원. 준우승 팀에게도 17억의 배당금이 주어진다.
“내 에이전트 말로는 우리 정도 되면 최소 20만 달러라고 하더라.”
닉의 이야기에 성민이 조금 놀랐다.
배당금이 아무리 주어진다고 해도 20만 달러, 약 2억 4천만 원이라니.
“구단에서 지원 진짜 제대로 할 생각인가 보네.”
연봉으로 140만 달러를 받는 선수라고는 하지만 20만 달러는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직장인으로 치면 연봉 3천을 받는 사람이 보너스로 450만 원쯤 받는 셈이다.
큰돈이다. 성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시즌 자신의 연봉보다 오히려 더 많은 금액이다.
“어때? 힘이 막 팍팍 솟구치지?”
“그러게 말이다.”
물론 이번 시즌을 끝으로 MLB에 진출할 것이 확정적인 성민이었다.
언론에서 떠드는 추정 연봉은 연평균 천만 달러선. 그 앞에 20만 달러 정도는 그리 큰 금액도 아니다.
하지만 싸가지없게 틱틱거리기만 하던 닉 해리슨이 이유가 어찌 됐건 우승을 해보겠다고 최선을 다하고, 힘내자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나름 기특했다.
게다가 바짝 다가와 이야기했다곤 하지만, 그리 넓지 않은 라커룸이다.
닉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성민 혼자만이 아니었다.
‘야, 들었어? 20만 달러면 2억 4천이잖아.’
‘에이, 그건 성민 선배나, 닉 정도 되니까 그만큼 받는 거지.’
‘A급이 2억 4천이라고 해도, 일단 로스터에 이름 올렸으면 B급은 되는 거잖아. 그러면 최소 절반은 주겠지.’
‘2억 4천에 절반이면 1억 2천? 허, 올해 내 연봉 두 배인데?’
야구는 그 특성상 연차가 낮은 선수의 연봉이 높기는 힘들다. 팀내 최저 연봉자인 진섭의 경우 1억 2천이면 자기 연봉의 3배다. 혹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천박하지만 강력한 동기부여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를 먹은 선수들이야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우승 그 자체에 매몰되는 경향이 크지만, 어린 선수들은 당장 눈앞의 돈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시간이 다가왔다.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다 클럽하우스의 덕아웃을 향해 걸었다.
불이 켜져있는 긴 복도.
그 복도의 벽을 수놓은 수많은 사진이 보였다.
창단 50년.
마린스의 역사들이었다.
지금은 코치로 물러난 강용구, 이형진의 사진도 보였다. 조금 후덕해진 지금 모습과 달리 딴딴한 느낌들이다.
성민의 발걸음이 누군가의 사진 앞에 잠시 느려졌다.
-이 사람은?
역동적인 자세로 공을 뿌리는, 주변의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앳되보이는 얼굴에 촌스러운 뿔테 안경을 쓴 68번의 투수였다.
필 니크로의 질문에 성민이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걸음.
조금 전의 사진보다 더 촌스러운 느낌의 컬러 사진이었다. 이를 악물고 공을 뿌리는 투수가 그곳에 있었다.
-나도 이 친구는 누군지 확실히 알겠군.
출근할 때마다 한 번씩 마주쳤는데 모를 수가.
사직 구장의 바로 앞에 동상으로 남은 11번 투수.
성민이 사진 속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굳이 촌스럽게 그 앞에 서서 목례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자신보다 먼저 이 어려운 길을 걸었던, 심지어 더 더럽고 험난한 길을 걸었던 선배에게 인사 한마디 정도를 남겼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부산 마린스와 서울 재규어스의 마지막 7차전 경기. 이곳은 사직입니다.]
[지금 마운드에 김성민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번 시즌 정말 눈부신 활약으로 마린스를 한국시리즈까지 직행시켰던 1등 공신인 김성민 선수. 결국 마지막 경기까지 이렇게 책임을 지네요.]
[지난 5차전에서 4이닝 41개를 던지고, 고작 이틀밖에 휴식을 갖지 못했다는 점은 조금 불안합니다만, 지금 마린스가 내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는 김성민 선수입니다.]
[재규어스 같은 경우 2선발 투수인 슈미트 노이만 선수가 오늘 마운드를 책임지는군요. 이번 시즌 성적만 본다면 무게가 상당히 기울어집니다만, 역시 변수는 김성민 선수는 이틀을 쉬었고, 슈미트 노이만 선수는 엿새를 쉬었다는 점이죠.]
이제는 슬슬 지겨운 얼굴이 타석에 들어왔다.
김규찬.
재규어스의 1번 타자다.
공감독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살폈다.
‘연습에서는 나쁘지 않았어.’
성민 같은 경우 평소에는 선발로 등판하기 위해 연습용 마운드에서 약 40개에서 50개의 공을 뿌린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20개.
평소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물론 공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현역 선수로 뛰어봤던 공 감독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루틴이라는 것은 단순히 몸의 근육을 푸는 용도만이 아니다.
정해진 승리의 방정식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의존은 성공의 경험이 누적될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성민의 경우 이번 시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루틴이 처음으로 깨졌다.
게다가 한국시리즈 7차전. 자신의 손으로 1년의 농사가 결정나는 경기다. 부담감이 클 것이다.
우레와 같은 팬들의 응원과 함성 속에서 마운드의 성민이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이미 앞서 두 경기. 그리고 바로 사흘 전에 성민의 공을 지독하게 살폈던 규찬이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투수와 타자가 자주 맞붙었을 때 점점 더 유리해지는 것은 타자다.
성민의 타이밍은 규찬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박혀있었다. 전략은 변하지 않았다. 속구를 노리고 120대의 빠른 너클볼을 커트하겠다.
성민의 손끝이 야구공을 밀어냈다.
그렇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공이 40년의 비원을 품고 날았다.
< 세 번째 에이스(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