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78화 (79/287)

< 자존심(3) >

‘어딨지?’

6차전이 있기 하루 전, 마지막 연습의 날. 호섭이 주위를 살폈다. 진섭을 찾기 위해서다. 녀석은 경험이 조금 부족했을 뿐, 재능은 확실했다. 마치 젊은 시절의 호섭 자신을 보는 것처럼 좋은 재능이었다.

‘음, 아직 거기까진 아닌가?’

지금의 호섭만을 지켜본 팬이라면 호섭의 저 마음을 거만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성기 시절. 몸이 쌩쌩하던 시절의 호섭은 국가대표팀의 우측 외야를 담당했던 KBO 최강의 우익수였다.

“진섭아.”

“호섭 선배님!!”

진섭은 호섭과 무려 10년이나 차이나는 고교 후배였다.

어느 바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야구판 역시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학연과 지연이다. 물론 KBO의 팀들은 워낙 판이 좁아서, 어지간하면 국대니 뭐니 선후배라지만, 같은 고교 출신의 직계는 또 다르다.

게다가 이 학연과 지연이라는 것도, 일방적으로 후배만 선배에게 뭔가 받아먹는 구조도 아니다. 상부상조다.

당장 3, 4년 뒤, 호섭이 은퇴해서 지도자 코스를 밟을 때, 진섭은 27세. 한참 잘 달리고 잘 휘두를 나이다. 게다가 지금 녀석이 보여주는 싹수를 생각한다면 팀의 실세가 될 확률이 높다.

워낙 좁은 바닥인지라 메이저랑 다르게 선, 후배 관계로 얽힌 코치진의 영향력이 크다지만, 실세들이 대놓고 반발할 경우는 코치들로서도 난감하다.

그렇기에 이렇게 어렵고 쭈글해진 시기에 적절한 관리가 필요하다. 이럴 때 잘해준 선배는 아무리 잘 나가도 막 하기 힘들다.

호섭 본인도 차라리 공감독에게 대들면 대들었지 강용구 코치나 이형진 코치에게는 감히 대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새끼. 어제는 아주 죽상이더니 이제 좀 얼굴이 폈다?”

“네. 선배님 말씀처럼 제 실수가 없었다면 좋긴 했겠지만, 제가 팀의 승패를 좌우했다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요. 어제 조언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이렇게 쉽게 툭툭 털어낸 거 보니까 다행이다.”

“선배님 말씀처럼 아직 시리즈 끝난 거 아니잖아요. 이제 저희 홈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시무룩할 시간에 열심히 준비 해야죠. 제게 또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 열심히 해봐.”

호섭이 진섭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크게 될 놈이다.

고작 한 번의 위로를 받았다고 이렇게 쌩쌩해지는 인간은 흔치 않다. 보통은 한참 더 땅을 파고 들어가기 마련이다.

게다가 포지션 상 진섭에게 기회가 간다는 말은 호섭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말과 같았다. 내년 시즌, 어쩌면 포지션 경쟁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섭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우승 기회 앞에서 내년의 걱정 따윈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뭐, 내 몸값이 얼마고, 짬밥이 얼만데. 비슷하면 비싼 놈 쓰는 거지.’

***

한국에 오기 전, 현장에서 닉 해리슨은 미니멈급 사이즈는 충분히 된다는 평을 받았었다. 애매하긴 하지만 25인의 끄트머리 정도에 최저연봉이라면 메이저에서 써볼 만한 팀이 있긴 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닉 해리슨은 한국을 선택했다.

희박한 확률에 인생을 맡기는 도박을 하는 대신, 확실한 거액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2년 동안 벌써 메이저 최저연봉을 기준으로 4년을 뛴 것만큼의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인생을 걸고 도전하던 메이저를 포기한 대신 얻은 돈이다.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할 수 없다.

‘부족해.’

또한, 뒤에서 자신의 인성에 관한 이야기가 돈다는 것 정도는 닉 해리슨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걸 핑계로 그의 워크에씩을 의심했다. 하지만 프로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워크에씩은 개인의 인성이 아니다. 그것은 프로가 프로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닉 해리슨이 야구공을 움켜쥐었다.

저 관중석 너머,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앰프에서 쏟아져나오는 거대한 소음들.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수많은 팬. 그들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성대한 함성.

저 열렬한 응원은 신나지만, 그것에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닉 해리슨은 용병이다. 그것도 성격 더러운 외국인 용병이다. 하지만 용병이란 돈을 받고 그 돈을 받은 만큼의 성적만 내주면 그만인 법이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꿈을 포기한 대신 통장으로 들어올 거액의 현금을 위하여.

154.7km/h의 속구가 존을 갈랐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30대 중, 후반.

마린스의 노장들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역사에 남을만한 에이스를 데리고 치른 시즌이었다. 그리고 당장 내년부터 그 에이스는 없다. 그들의 선배인 마린스의 코치들은 시즌 중에 항상 이런 말을 했었다.

“니들은 진짜 운 좋은 줄 알아. 어휴, 나도 진짜 10년만 젊었어도.”

메이저의 어느 커미셔너는 그것을 그저 금속쪼가리일 뿐이라 이야기했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그저 금속쪼가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경기를 뛰는 선수들, 그들을 응원하는 팬들. 그리고 오랜 역사가 어우러진 그것은 단순한 금속쪼가리를 넘어선 무언가다.

10월의 말.

쌀쌀하다 못 해 추워진 날씨 속에서 마린스의 노장들이 삐거덕거리는 몸뚱이에 채찍질을 가했다.

하지만 상대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아는 법이다.

재규어스는 지난 17년간 무려 여덟 번이나 금속쪼가리를 들어 올린 팀이었다.

게다가 오늘 마운드에 선 바비 메일러는, 이번 시즌 김성민이라는 압도적인 투수에 가려 조금 빛이 바랬지만, 평범한 시즌이었다면 충분히 골든글러브를 노려볼만한 투수였다.

-부웅!!

“스트라잌!!”

박태경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났다.

121경기 선발 출장. 그중 107경기를 포수로 출장했다. 최근 15년으로 끊었을 때 KBO에 그보다 대단한 포수는 없었다.

애초에 포수가 커리어 동안 3/4/5를 4시즌이나 달성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다.

물론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 시절의 기량을 다 가지지는 못했다.

특히 오늘처럼 포수로 출장하는 날이면 타석에서 좀처럼 100퍼센트 집중할 수가 없다. 심각한 퇴행성 관절염 덕분에 물이 찬 무릎이 땡땡하다.

등 뒤 관중석에 펜스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 얼굴들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태경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도 저들처럼 간절한가?

‘당연하지.’

어떻게 보면 항상 꿈꿨던 무대다.

한국시리즈 벼랑 끝 승부.

마운드에는 상대 팀의 에이스.

사직 구장에는 간절하게 자신을 응원하는 오랜 팬들이 그득하다.

지금 태경 자신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거울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다.

저기 저 펜스에 매달린 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마운드의 바비 메일러가 투구 자세에 들어갔다.

쭉 뻗어 나오는 야구공.

태경의 몸이 긴 시간 훈련해온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움직이기 위해 발악했다.

한껏 치켜든 다리가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바닥을 내려찍었다. 욱씬거리는 무릎이 그 운동에너지를 온전하게 엉덩이로 전달하지 못한다.

아직 괜찮다. 엉덩이에 힘을 꽉 준다.

빌어먹을 직업병. 치핵이 그 움직임을 방해한다.

아직 괜찮다. 늙은 복근이 그 에너지를 회전력으로 온전하게 전환하려 애썼다.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타구가 시원하게 좌측 외야를 향해 쏘아졌다.

욱신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굼벵이처럼 1루를 향해 달렸다. 누군가는 최선을 다해 달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뒤뚱거리는 굼벵이 같은 달리기가 그에게는 최선이다.

아쉽게도 박동엽처럼 165km/h의 쏜살같은 타구는 아니다. 그도 한때는 그런 타구를 만들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재능이다. 하지만 그런 재능이 없어도 야구는 할 수 있다.

35도의 타구 각에는 160km/h의 타구 속도가 필요하지만, 15도의 타구 각이라면 140km/h의 타구 속도도 충분하다.

[너, 넘어갔습니다!!]

좌측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홈런.

긴 시간, 마린스의 자존심이었던 남자가 소중한 1점을 얻어냈다.

이닝이 끝났다.

1:0

마린스의 팬들이 마린스의 불펜을 바라봤다.

재규어스의 감독 역시 복잡한 마음으로 마린스의 불펜을 바라봤다.

‘차라리 뒤지고 있는 지금 나오는 게? 아니야, 1점 정도는 충분히 뒤집을 수 있을지도.’

[아, 6회 말 마린스의 공격이 끝난 현재 점수는 이제 1:0. 마린스 같은 경우 오늘 경기에서 패배하면 내일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김성민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올 법도 한데요. 물론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오늘 마린스가 김성민 선수 없이 자력으로 승리하고, 내일 김성민 선수를 써먹는 시나리오입니다만, 지난 5차전에서 그렇게 하려다 쫄딱 망했단 말이죠.]

[과연 마린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되는군요.]

공 감독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감독님 우리 팀은 정규시즌 우승 팀입니다. 팀을 믿어 주세요.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것은 시리즈의 승리입니다. 오늘의 승리가 아니에요.’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승리가 없다면 시리즈의 승리도 없다.

5차전의 악몽 같았던 실수가 떠올랐다.

시리즈의 승리를 거국적으로 바라보다가 눈앞의 승리를 놓쳤던 어리석음.

또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해야 할까?

공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

[부산 마린스 5:3 승리!!]

[닉 해리슨 괴력 발휘!! 7이닝 무실점.]

[6회 말, 박태경의 솔로포!!]

[위태로운 순간에도 김성민 카드를 내놓지 않았던 공 감독의 놀라운 결단력.]

[7차전 선발 김성민? 5차전 이후 고작 이틀의 휴식. 에이스의 혹사는 피할 수 없는 일일까?]

[시리즈 스코어 3:3. 재규어스와 마린스의 끝장 승부. 왕조의 완성인가, 40년 만의 우승인가.]

-마지막까지 쫄깃했다.-

-이번 한국시리즈 들어와서 마린스가 처음으로 제대로 경기했다는 느낌이다.-

-마린스가 제대로? 2이닝 동안 3실점 내준 불펜을 보고도 그런 이야기가 나옴?-

-정정하지. 마린스의 야수들이 처음으로 제대로 경기했다는 느낌이다.-

-왜? 1차전이랑 2차전도 나쁘지 않았잖아.-

-1차전은 마린스가 제대로 했다기보다는 김성민이 원맨쇼를 했다는 느낌이었고, 2차전은 김성민 때문에 완전히 말려버린 재규어스가 삽을 펐다는 느낌이었지.-

-개자슥들. 야구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대체 왜 그따위로 했던 거?-

-그냥 배가 안 고팠던 거지. 그냥 설렁설렁해도 1등하고 있고, 성민이가 어떻게든 퍼먹여 주겠지. 이런 생각으로 했으니까. 그러다가 우승 날아갈 각 되니까 정신 빠딱 차린 거잖아.-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다행이다. 진짜 어제 경기 졌으면 사직 구장 내가 불 질렀을 거야.-

-난 박태경 그 돼지가 솔로홈런 치는데 왤케 찡하지?-

-나도 박태경 홀쭉하던 시절부터 봤는데, 그 쌩쌩하게 날아다니던 놈이 이제는 푸석한 돼지가 돼서 절뚝거리면서 뛰는 거 존나 찡하긴 하더라.-

-근데 어찌됐거나 이렇게 되면 7차전 성민이가 선발 등판 하는 거잖아. 그럼 이제 우승이네?-

-5차전처럼 미친짓만 안하면, 1차전처럼 그냥 원맨쇼 하다가 우승 하는 거지.-

-근데 이틀 쉬고 올라오는 거잖아. 이거 혹사 좀 찝찝한데.-

-투구수 41개였음. 그냥 2이닝 짜리 불펜 한번 뛰고 올라오는 수준인데 뭐. 메이저도 보면 포시에서는 이 정도 하는 투수 종종 있었음. 거의 매 시즌 한두 명씩은 나올걸? 다나카 무패 우승하고 메이저 가던 해에는 이것보다 더했어.-

-그래, 있긴 있었지. 더했긴 더했고. 근데 결과가 어땠는지를 좀 생각해보자.-

7차전의 아침이 밝았다.

< 자존심(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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