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존심(2) >
지금까지 4이닝. 투구 수는 41개.
많지 않은 숫자다. 물론 선발로 등판하기 위해 연습구를 45개나 던진 만큼 아주 적은 숫자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불펜의 경우 등판 이전 연습구 20개가량. 그리고 등판 이후 2, 3이닝 정도 길게 이닝을 먹는다고 해도 50개 정도를 던진다.
하지만 당장 성민을 내린다고 하면 내일 이동일, 그리고 모레 6차전. 이틀의 휴식이 가능하다.
복잡한 생각이 공 감독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10:0.
안심할 수 있는 점수 차이일까?
경기는 이제 5회 초.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건 이겼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경기다. 만약 이 경기가 정규시즌의 한 경기고, 성민에게 휴식을 줘야 할 상황이었다면 기꺼이 그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한국시리즈. 자칫 잘못하면 오늘의 선택으로 최후의 승자가 결정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공 감독이 다시 한번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성민아 어깨 식혀라.”
“네?”
4이닝 현재까지 퍼펙트.
물론 아직 경기가 끝나기까지는 한참을 남았다. 공 감독이 성민에게 다가왔다.
“성민아, 난 네가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해줬으면 한다.”
“하지만!!”
“부탁한다.”
공 감독이 성민의 손을 꼭 잡았다. 현재 성민은 팀 내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선수다. 하지만 모든 선수와 코치진이 있는 상황에서 감독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버틸 수 없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군. 5회에 10점 차이야. 게다가 상대는 엘리츠도 피닉스도 아니야. 승리 양보의 달인 마린스라면 아직 충분히 승리를 양보할 수 있다고.
필 니크로가 잡히지 않는 공 감독의 멱살을 잡았다.
그 능숙한 꼴린스 팬의 발악을 성민이 제지했다.
‘제가 없던 마린스를 플옵까지 이끌었던 감독님입니다. 게다가 영감님도 인정했잖아요. 욕심부리지 않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팀을 운영해왔다고. 믿어봐야죠.’
-젠장. 이번 건 누가 봐도 욕심이다.
5회 초.
성민이 어깨에 아이스팩을 감았다.
그리고 기적이 시작됐다.
아니, 어쩌면 이건 기적의 시작이 아니라 기적의 끝에 찾아온 현실이었는지도 몰랐다. 10 구단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재규어스의 타선이 움직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기력했던 것이 실력 때문이 아님을 주장했다.
‘우리가 1루 베이스를 밟지 못했던 것은 단순히 마운드의 투수가 김성민이기 때문이었다.’
10 구단 최약을 자랑하는 마린스의 불펜이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3.1이닝 동안 네 명의 투수 교체.
그리고 7실점.
반면 5회 초 원아웃 주자 1, 2루 상황에서 올라온 재규어스의 불펜이 병살로 이닝을 마무리한 직후부터 마린스의 타선은 마법처럼 얼어붙었다.
이미 3차전과 4차전에 연달아 나왔던 재규어스의 필승조 이은철은 3일 연속 등판이라는 혹사에도 불구하고 불꽃 같은 피칭을 선보였다.
그리고 8회 말 10:7.
원아웃에 주자 1, 2루.
공필승 감독 역시 결단을 내렸다.
[신원직. 신원직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공필승 감독. 좋은 결단입니다. 이건 마무리 투수인 신원직 선수로 1.2이닝을 틀어막겠다는 표현이죠.]
사실 5회 10:0의 점수 차이에서 성민을 내린 공 감독의 판단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과정의 타당함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좋은 결과를 냈느냐, 혹은 내지 못했느냐다.
-딱!!
높게 뜬 타구가 우측 외야를 가로질렀다.
이진섭이 타구를 향해 달렸다. 잠실의 외야는 넓었지만, 그의 발은 빨랐다.
‘잡을 수 있어.’
진섭이 몸을 던졌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타구 뒤로 빠졌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그의 기량으로 잡을 수 없는 공이었다.
안전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잡아야만 하는 공이었다.
10:9
그리고 주자 3루.
신원직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쫓기는 마린스는 필패의 아이콘이었고, 쫓는 재규어스는 필승의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시리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2:10.
마린스가 마법처럼, 아니 마법이 풀린 것처럼 5차전을 패배했다.
[마린스 충격의 역전패!!]
[10점 차이를 뒤집은 재규어스의 뒷심!!]
[공필승 감독의 성급했던 판단. 마린스 시리즈 5차전 패배!!]
[무서운 것은 오직 김성민뿐. 5이닝 동안 무려 12점을 뽑아낸 재규어스의 괴력!!]
[시리즈 스코어 3:2. 이제 승부는 다시 사직으로!!]
-5회까지, 이 경기를 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 감독이 성민이만 그대로 놔뒀더라면 그랬겠지.-
-난 10:0에서 감독이 뒷일 생각해서 성민이 내린 것까진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함. 문제는 시발 5이닝 만에 12점을 내준 미친 불펜이랑 5이닝 동안 1점도 추가 못한 미친 타선임.-
-아냐, 그래도 공감독은 그러면 안 됐어. 솔직히 1이닝만 더 성민이 놔뒀어도 이건 이긴 경기였음. 게다가 5회까진 던지고 내려와야 승리투수였잖아. 내가 볼 때, 공 감독 이새끼 재규어스한테 뒷돈 받았음.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돼.-
-공필승 감독, 차기 재규어스 감독으로 내정?-
-아니, 4이닝 퍼펙트 하고 있던 투수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리냐고. 우리 성민이가 착하다고 진짜 너무 막 하는 거 아니야?-
-이제 6차전 털리다가, 하루 쉰 성민이 억지로 마운드에 올리겠지. 아마 우리 착한 성민이는 또 꾸역꾸역 던질 거야. 그리고 성민이 몸은 몸대로 상하고 우승은 우승대로 날아가고. 니미럴. 안 봐도 뻔하다.-
역전패만큼 선수단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것도 드물다.
하물며 한국시리즈. 10:0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이기던 와중에 벌어진 충격적인 역전패였다.
부산으로 돌아가는 버스.
역전패에 크게 일조했던 이진섭이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보통이라면 그를 위로해줄 선수들 역시 다들 자기 자신을 추스르느라 바빴다.
‘빌어먹을.’
성민 역시 이번만큼은 쉽게 화를 참기 힘들었다.
10점 차이.
무려 10점 차이다. 4이닝을 퍼펙트로 막던 와중에 팀의 우승을 위해 승리투수가 되는 것까지 포기해가며 양보했건만 이런 대환장파티라니.
-공 감독이 너무 욕심냈어.
‘아니, 솔직히 5회에 10:0이면 그럴만하죠. 이건 순전히······’
필 니크로가 성민의 말을 끊었다.
-여기는 마린스다. 마린스는 시즌 중에 5이닝 동안 10실점 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던 팀이야. 포스트 시즌. 끝이 없는 경기를 하면서 최악의 경우도 생각했어야지.
공 감독 역시 자신의 실책을 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실책을 곱씹기에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남은 두 경기를 잡을 방법을 생각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최악이라. 그러고 보니 이거 최악은 이제 제가 대비해야겠는데요.’
-무슨 소리냐?
‘6차전이랑 7차전. 저를 불펜으로 계속 마운드에 올리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냐? 너를 불펜으로 올리다니? 그것도 6차전이랑 7차전을. 게다가 너도 인정했잖느냐. 공 감독이 잘못된 선택을 하긴 했지만, 그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다고. 게다가 네가 조성해둔 여론도 있는데······
‘잘못된 선택으로 우승이 코앞에서 날아가게 생겼는데 여론이 어딨고 합리가 어딨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끼익
버스가 사직에 도착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공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수고했다. 비록 잠실에서의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이제 다시 사직이다. 다들 어깨 펴라. 아직 시리즈는 두 경기나 남았고 우리는 지금 마린스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네!!”
“태경이, 정현이, 성민이는 나 좀 보고 가고. 나머지는 집에 돌아가 푹 쉬어라. 내일 연습은 정상적으로 진행한다.”
“네!!”
공 감독이 팀 내 계파의 우두머리들인 태경과 정현을 부른 이유는 뻔했다. 각자 선수단을 다독이고, 기를 좀 살려봐라. 아직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성민을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성민아, 괜찮겠냐?”
필 니크로가 자신의 이마를 움켜쥐었다.
-맙소사. 이거 정말?
성민이 공 감독에게 단호하게 답했다.
“감독님. 저 6차전에 불펜으로는 안 뜁니다.”
“성민아!!”
“감독님. 우리 우승해야죠. 솔직히 저 엄청나게 우승하고 싶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부산 마린스에서 우승하고 싶습니다. 아시겠지만, 중학생 때 저 성적 엄청나게 잘 나왔어요. 서울에 고등학교들에서 유학 오라는 제의 엄청나게 받았었습니다. 그런데요. 저보다 못하는 애들도 다 서울로 유학 갈 때 전 부경고에 남았어요.”
“알지. 그러니까······”
“아뇨. 그러니까 안됩니다. 감독님 만약 제가 무리를 해서 모레 경기에 맞춰 몸을 조정했다고 쳐요. 그러면 그다음 경기는요? 제가 또 불펜으로 등판을 할까요? 그러면 우리가 우승할 수 있을까요? 재규어스 애들 머저리 아닙니다. 게다가 저 이번 시즌 내내 선발로 뛰었고, 그런 루틴으로는 제힘 절대 발휘 못 해요.”
성민이 강하게 이야기했다.
사실 한국 야구에서 선수가 감독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성민이 지금까지 거둔 성적, 팀 내의 입지, 오늘 5차전의 양보.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FA. 심지어 KBO가 아닌 MLB로 떠날 것이 확실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감독님. 저희는 이번 시즌의 우승팀입니다. 제가 등판한 경기를 제외하고도 무려 60승 가깝게 거둔 팀이에요. 그리고 닉도 싸가지는 없지만 좋은 투숩니다. 감독님도 그래서 그 싸가지에도 불구하고 굳이 안고 오신 거잖아요.”
공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7차전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오늘 평소의 절반 정도 던졌으니까요.”
사실 4이닝 41구를 던졌다고는 하지만 고작 이틀을 쉬고 다시 선발로 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성민에게 하루를 쉬고 이틀 연속 불펜으로 대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다.
무엇보다
‘오늘 속구는 몇 개 던지지 않았어.’
성민은 너클볼 투수다.
물론 RA디키 이전, 보통의 너클볼 투수들처럼 이틀 간격으로 100개씩 공을 던질 수는 없었다. 그 시절의 너클볼 투수들은 어깨와 팔꿈치를 최대치로 휘두르는 대신 공의 회전에만 집중하는 레퍼토리였다면 성민은 거기에 구속까지 신경을 쓰는 RA 디키의 그것과 흡사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던진 41개의 공 중에서 속구는 고작 여덟 개. 연습구까지 다 포함해도 21개밖에 되지 않는다. 어깨와 팔꿈치에 그만큼 무리가 덜 갔다는 의미다.
가장 피곤한 것은 전완근. 하지만 소근육에 속하는 전완근이 회복되는데 이틀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괜찮겠어?
“뭐 어쩔 수 없죠. 저도 우승은 하고 싶고, 그러려면 좀 무리한 일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최선이니까요.”
-아니, 그거 말고. 6차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 말이야.
필 니크로는 성민의 선택을 지지했다. 아예 뛰지 않겠다고 뻗댈 수 없는 이상 분명 이것은 지금 상황에서 성민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필 니크로 역시 투수였다. 그것도 시대에 가장 뛰어난 투수 중 하나였지만 단 한 번도 우승해본 적 없는 투수다. 분명 성민의 몸을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지만, 필 니크로 본인이 성민의 위치였다면,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를 외쳤을 것이다.
그리고 필 니크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성민의 마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선수에게 우승이란 그런 것이니까.
성민이 답했다.
“말했잖아요. 우리 정규시즌 우승팀 부산 마린스라고요.”
-놀랍지도 않군.
“뭐가요?”
-마린스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정규시즌 우승이라는 단어도 전혀 위안이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6차전.
닉 해리슨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 자존심(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