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76화 (77/287)

< 자존심(1) >

등판 당일.

나흘 휴식 루틴에 맞춰 몸을 정비한 성민이 등판을 준비했다.

-나흘 전에 8이닝이나 던진 것 치고는 어깨와 팔꿈치는 나쁘지 않군.

‘제가 나흘 휴식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시즌 중에도 몇 번이나 했잖습니까. 몸 관리 정도야 기본이죠.’

-하지만 8이닝이나 던지고 나흘 휴식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30경기 202이닝이나 던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공 감독이 관리를 꼼꼼하게 해줬어.

‘그랬나요?’

-그랬지. 이만한 성적을 거두고, 끝까지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투수라면 누구나 ‘조금만 더.’라는 욕심이 났을 텐데 말이야. 물론 중간중간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한 것 같은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충분히 자제를 한 편이지.

8이닝 이상의 긴 이닝을 던진 다음에는 무조건 닷새 휴식. 심지어 우천 취소 경기로 하루의 휴식이 더 생겼을 때는 엿새 휴식을 준 적도 있었다. 성민이 거뒀던 놀라운 성적과 다른 투수들의 성적간에 차이를 생각한다면 이는 정말 대단한 절제력이었다.

‘물론 지금 선택만 본다면 재규어스 감독의 결정이 더 대단해 보이지만 말이야.’

-과감하긴 과감했죠. 실패하면 욕만 들어먹는 게 아니라 어쩌면 자리가 위험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으니까요.

5차전.

잠실에서의 마지막 경기.

1회 초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재규어스의 에이스 바비 메일러가 아니었다. 이번 시즌 재규어스의 5선발로 활약했던 전성일. 올해 37세의 노장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재규어스의 김규식 감독이 말했다.

“한국 시리즈에서 1승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다. 이건 그래서 결정한 일입니다.”

상대방의 압도적인 에이스를 인정한다. 그리고 에이스끼리의 경쟁을 포기한다. 애초에 그 압도적인 에이스를 제외한다면 자신들이 패배할 리 없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1회 초.

왕조라 칭해지는 팀의 역사를 함께해온 늙은 투수의 공이 날아왔다. 전성기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지만, 긴 세월의 노련함이 함께하는 공이었다.

-딱!!

하지만 세월을 통해 얻은 노련함만으로 극복하기에 10월 말의 차가운 날씨와 에이스를 등에 업은 패배할 수 없는 마린스 타자들의 각오는 너무 단단했다.

안타와 안타. 적시타와 희생 플라이. 마린스의 공격이 이어졌다.

1회에만 무려 4득점.

덕아웃에 돌아온 성일이 10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턱까지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투수 코치가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37세의 노장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경기는 거의 버리는 경기다. 점수를 더 내주더라도 어지간하면 교체는 없을 것이다. 한때 6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승수를 올리며 재규어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에이스가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필 니크로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하위 선발이라고 해도, 마린스 타자 놈들인데······. 좋지 않군.

1회 대량 득점에 아무래도 트라우마가 생긴 모양이다.

성민이 그런 필 니크로를 웃어넘겼다.

그는 이미 마린스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간 투수였다. 아니, KBO의 역사 자체를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징크스에 신경 쓰기에 그는 너무 커버렸다.

바비 메일러가 아닌 전성일이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 포기한 경기라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감독이야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재규어스의 타자들 역시 그것을 모를 수 없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마음에서 이미 지고 시작한 싸움이다. 재규어스의 타자들이 성민의 공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마린스의 팬들이 직감했다.

5차전은 도저히 질 수가 없겠구나. 그렇다면 진짜 승부는 6차전일까?

5차전의 1회 말.

팬들이 벌써 6차전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닉 해리슨이랑 바비 메일러면······.”

“현재 투수 폼만 따지면 닉 해리슨 쪽이지. 마린스랑 재규어스 타선이나 야수 수준이 완전 다른데, 둘 다 15승 투수잖아.”

“투수 폼만 따져서 뭐하냐? 타선이랑 야수 수준까지 다 따져야지.”

“그러면 뭐 같은 15승 투수로 비슷비슷하겠네.”

“근데 이렇게 되면 바비 메일러가 하루 더 쉬는 거잖아.”

“에이, 나흘이랑 닷새는 좀 차이가 있는데 닉도 닷새 쉬는 거고 바비 메일러는 엿새 쉬는 거잖아. 시즌 내내 거의 나흘 아니면 닷새 휴식 루틴이었는데 오히려 엿새 쉬면 흐름이 깨지지 않을까?”

그러는 사이 성민이 재규어스의 세 번째 타자를 내야 땅볼로 잡아냈다.

가볍게 공을 처리한 박동엽이 웃으며 성민과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하긴, 뭐 안되면 성민이가 또 불펜으로라도 올라오지 않겠어?”

“에이, 아무리 그래도 오늘 선발로 던지고 꼴랑 하루 쉬고 불펜으로 올라오는 건 좀 너무하지.”

“글쎄, 이건 내 생각인데 공 감독 저 너구리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서?”

“자 생각해봐. 뻔히 성민이 두 번밖에 등판을 못 시킬 걸 알면서 굳이 나흘 휴식하고 등판시킨 이유가 뭐겠어? 김규식이 바비 메일러 대신 전성일 등판시킬지도 모른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이미 예측했었는데 말이야.”

“그야 당연히 마린스에는 내보낼 만한 선발 투수가 없으니까 그런 거지. 이 경기 지면 3패고 그러면 6차전에 성민이가 이긴다고 해도 7차전에서 투수들 다 동원하는 총력전인데 성민이 빠진 마린스랑 바비 메일러 빠진 재규어스랑 비교가 되냐? 그러니까 5차전 성민이 내놓고, 7차전에 불펜으로라도 성민이 나와서 쓸어버리는 그림 그린 거잖아.”

2회 초, 전성일 또다시 꾸역꾸역 공을 뿌렸다.

2실점.

점수는 어느새 6:0까지 벌어졌다.

“그러니까. 생각해봐. 지금 우리가 엄청 잘 때리고 있잖아. 점수 차이가 더 벌어졌어. 그러면 공 감독이 어떻게 하겠냐?”

“어? 그러게.”

“성민이 재작년까지 불펜으로 던졌었잖아. 오늘 3, 4이닝 정도 던지고 내려온다고 치자. 그리고 내일이랑 모레 쉬어. 7차전에 몇 이닝이나 던질 수 있을까?”

2회 말.

성민이 또다시 재규어스의 타선을 압도했다. 2이닝 연속 삼자 범퇴.

공 감독이 고민했다.

‘가능할까?’

라이트하게 야구를 보는 팬들은 단순히 성민이 재작년까지 불펜을 뛰었으니 오늘 3, 4이닝을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가면 7차전에서도 쌩쌩하게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펜과 선발은 그 준비과정 자체가 다르다. 성민의 몸은 이미 시즌 내내 선발의 루틴에 적응된 상황이었다. 과연 오늘 짧게 던졌다고 이틀 휴식 뒤에 다시 지금처럼 공을 던질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성민이를 조기에 내렸을 때 승리를 지킬 수 있을까?

-딱!!

공 감독의 걱정을 덜어주기라도 하듯 3회 초 마린스의 타선이 재규어스의 선발 전성일을 신나게 두들겼다.

[이진섭!! 크게 뻗어 나가는 타구!! 우측 담장을 두들깁니다.]

어느새 점수는 8:0

김호섭을 대신해서 잠실의 넓은 외야를 커버하기 위해 내놨던 이진섭이 신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불길해.

‘3회에 8:0이잖아요. 이제 마운드에 저 대신 다른 애들이 올라가도 이건 무조건 이긴 겁니다.’

-우리는 마린스다. 고작 8점에 안심하지 말라고!! 마린스는 9회에도 충분히 8점을 내줄 잠재력이 있는 팀이야.

‘우리?’

성민의 짓궂은 질문에 필 니크로가 헛기침했다.

-크흠. 말이 잠깐 헛나왔군. 하여간 최소 10점. 그 이하로는 안심할 수 없어.

두 사람이 떠드는 사이 어느새 마린스가 아홉 번째 점수를 추가했다.

9:0

재규어스의 하위 타순에서 시작되는 3회 말 원아웃.

두 번째 타자에게 하나의 파울과 한 번의 헛스윙을 끌어낸 성민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노렸던 것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너클볼.

그러나 성민이라고 항상 원하는 공을 던질 수는 없었다. 추운 날씨 탓일까? 손끝에 실밥이 너무 강하게 걸렸다. 116km/h의 속도로 날아드는 너무 많이 밀어낸 공.

타자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성민이라고 항상 원하는 공을 던질 수 없는 것처럼, 타자라고 모든 실투를 쳐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타자는 투수의 실투만 때려낼 수 있어도 3할을 칠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야구에서 3할 타자는 거의 올스타급의 타자다. 아니 2할 8푼만 되도 충분히 좋은 타자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생산성을 자랑하는 재규어스의 타선이라고 하지만 8번 타자. KBO 전체로 따졌을 때 평균을 밑도는 기량의 타자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성민이 삼진을 잡아냈다.

-운이 좋았다.

‘실력이죠.’

-빅리그에 가면 이런 행운은 없을 거다.

‘빅리그에 가기 전에 이런 공을 던지지 않도록 단련해야죠.’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는군.

성민이 세 번째 타자마저도 내야 뜬공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3이닝 연속 삼자 범퇴.

혹시나 하는 기대 속에 잠실을 찾았던 재규어스의 팬들이 맥주를 들이켰다. 천불이 일어나는 속을 시원한 맥주가 잠시 달래줬다.

4회 초.

마린스의 타선이 쉬어가는 것을 잊었다. 기어코 추가점을 얻어내며 10:0을 만들었다. 전성일의 뺨을 타고 후드득 땀방울이 쏟아졌다.

10:0이다.

공 감독이 갈등했다.

이대로 교체를 단행해야 하나? 솔직히 지금 같은 분위기, 10점 차이에 6이닝이면 지기 힘든 점수 차이 아닐까?

욕심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성민은 매우 강력한 카드다. 오늘 공을 덜 던진 만큼 6차전 혹은 7차전에서 그를 활용한다면 그 경기들에 승리확률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지금 성민을 뺐을 때 패배할 확률이 0이냐는 점이다.

‘아니야.’

오랜 시간 야구를 해왔고, 봐왔던 공 감독이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세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늘 마린스의 기세를 이끄는 것은 타선의 맹렬함이 아니다. 압도적인 투수의 격차. 성민의 무게감이다.

재규어스의 타선은 10 구단 제일이다. 마린스의 타선이 3이닝 동안 10점을 뽑아냈다. 재규어스의 타선이 6이닝 동안 그 10점을 뒤집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최소한 상위 타순이라도 한 번 더.

4회 초. 성민이 마운드에 또 한 번 올라왔다.

‘지더라도 쪽팔리진 말자.’

3이닝 연속 삼자 범퇴.

재규어스의 선두타자 김규찬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은 잠실. 그들의 홈이었다.

마린스의 극성맞은 팬들이 침투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경기장을 메운 팬 다수는 재규어스의 팬이었다.

똥개도 자기 집 안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하물며 재규어스는 KBO 최강의 팀이다.

그의 비상한 감각이 이야기했다.

빠른 공을 노려야 하는 것은 맞다. 본래 그것이 타자를 상대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저놈은 다른 투수들과는 조금 다르다. 애당초 150짜리 공을 노리다가 100짜리 너클볼을 치는 것은 저기 태평양 건너의 괴물들도 쉽게 부리지 못할 재주다.

그렇기에 가장 느린 너클볼은 포기한다.

노리는 것은 최고 150에 육박하는 속구. 그리고 커트하는 것은 120의 너클볼. 김규찬 본인의 빠른 발이라면 내야로 공을 굴리기만 해도 살아갈 확률이 절반은 된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상대는 리그 최강 재규어스의 1번 타자. 지금까지 그를 상대로 꾸준히 잘 던져 왔지만, 방심은 하지 않았다.

초구 빠른 공.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46.3km/h의 공이 몸쪽 깊숙한 코스로 절묘하게 날아들었다. 타자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일루수인 현정현이 빠르게 뛰었지만 조금 부족했다.

파울.

성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100.4km/h의 너클볼.

-뻐엉!!

“스트라잌!!”

김규찬이 공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119.4km/h

2.8회를 회전하는 성민의 너클볼이 존의 복판으로 날아왔다.

볼카운트는 0-2.

놓칠 수 없는 공이다. 김규찬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걷어내기 위해 움직였다.

강한 타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는 것은 그의 빠른 발을 활용할 수 있는 타구 정도.

돌아가는 규찬의 방망이에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규찬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은 볼 수 있었다. 공이 성민의 손을 떠난 직후 홈플레이트에서 한걸음 옆으로 빠지는 혁준의 모습을.

마치 복판으로 들어올 것처럼 타자를 유혹해놓고 얄밉게 저 먼 곳으로 쏙 빠져버리는 너클볼. 타이밍을 알고도 칠 수 없는 마구가 규찬의 방망이를 농락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이어지는 타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 성민은 좀처럼 누군가를 출루시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4이닝 연속 삼자 범퇴.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성민을 바라보는 공 감독의 시선이 복잡했다.

< 자존심(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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