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플(1) >
시리즈 2차전.
닉 해리슨이 마운드에 섰다.
‘젠장, 하여간 여기나 저기나 먹고 살기 더럽게 힘들다니까.’
오늘 경기의 시구자는 과거 그가 무시를 했던 꼬맹이였다. 이 미친 마린스의 홍보팀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김성민의 미담을 집중 조명하고 자신의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핑계로 그딴 꼬맹이를 마운드에 덜컥 올려버렸다.
덕분에 닉 해리슨은 그 꼬맹이에게 자기 유니폼에 싸인까지 해 줘가면서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뭐, 그래 프로 선수라면 자신의 팬에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꼬맹이 녀석, 정작 시구자로 마운드에 설 때는 김성민의 사인 유니폼을 입고 섰다.
하여간 대체 그놈의 돈이 뭔지. 내년 재계약만 아니었어도 들이받아 버리는 건데.
타석에 김규찬이 들어왔다.
닉 해리슨이 공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단단한 전완근이 불끈거렸다.
초구로 몸쪽 높은 쪽으로 바짝 붙인 속구를 노렸다.
물론 노렸다고 다 들어가면 KBO에 있을 이유가 없다. 닉 해리슨은 최고 159km/h의 속구를 던지는 불같은 강속구 투수이지, 원할 때마다 스트라이크를 무조건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아니다.
-뻐엉!!
153.7km/h
하지만 노리던 곳과 완전히 동떨어진 저 먼 바깥 코스로 공이 들어갔다.
당연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경기가 계속됐다.
오늘 닉 해리슨의 공은 구속, 구위 나무랄 것이 없었다.
1회 초. 볼넷, 병살, 볼넷 그리고 삼진.
출루는 오직 볼넷뿐.
평소와 똑같은 닉 해리슨이 재규어스의 타선을 압도했다.
경기가 흘러갔다.
어제의 빈공이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마린스의 타선이 점수를 뽑아냈다.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성민이 등판하는 날의 마린스 타선이 내셔널리그라면 닉 해리슨이 등판하는 날의 마린스 타선은 아메리칸리그다.
9번 타자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타선과 그래도 신경써야 하는 타선의 무게감은 다르다. 하물며 마린스의 주전 포수인 박태경은 성민의 등판일에 가끔 지명타자로 출장할 만큼 마린스에서 가장 강력한 타자 중 하나다.
시리즈 2차전
마린스가 재규어스를 11:6으로 크게 격파했다.
[부산 마린스 홈 경기 파죽의 2연승!!]
[부산 마린스 40년 만의 왕좌탈환? 이제 남은 것은 두 걸음뿐.]
[마린스 김호산 사장 ‘선수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큰 포상을 준비 중이다.’]
[이제 무대는 잠실로. 재규어스는 승부를 뒤집을 수 있을까?]
-이건 거의 99% 끝났다고 본다. 솔직히 막말로 김성민 두 번 등판하면 재규어스가 그거 어떻게 막을건데?-
-김성민도 전승은 아니다. 김성민 등판한 경기 중에도 패배한 경기 있어.-
-그거야 시즌 중이었으니 끝까지 안 던져서 그런거고. 야수들이 뻘짓만 안 하면 김성민 못 뚫음.-
-근데 마린스 야수들은 뻘짓 충분히 가능-
-아니, 미친 할배들이 왜 이렇게 늘었어? 5경기 남았는데 두 번을 더 등판시키자고? 김성민 팔을 무슨 강판에 갈아버리려고?-
-평소에 투수를 아끼는 이유는 결국 우승을 하려고 아끼는 거다. 우승 기회인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잡아야지. 그리고 선수는 연봉을 받았으면 그 값을 해야 하는 거고.-
-그게 뭔 개소리야. 넌 그러면 회사에서 직원을 아끼는 건 결국 수익 때문이니까, 수익 날 것 같을 때, 어디 망가지도록 일하라고 하면 할 거냐? 월급 받았으니까?-
-근데 현실적으로 팀에서 하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님?-
-김성민 내년에 FA인데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 없어. 거기다가 한국에서 더 뛸 것도 아니고 미국 갈 건데. 걍 다 쌩까면 그만이지.-
-미국에서 실패하면 한국 돌아와야 하잖아. 보험 생각하면 구단 눈치 아예 안보기는 힘들지. 그리고 지금 여론이 3번 등판 당연한 걸로 흘러가는데, 여론에서 자기 마음대로 등 돌리기도 힘들 것 같고.-
“성민, 구단 측에게 지금이라도 강경하게 나가셔야 합니다. 맙소사. 3일 휴식 등판을 두 번 연속하라니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아뇨, 그렇게 자신하시면 안 됩니다. 애초에 3일 간격으로 에이스를 등판시켰던 메이저리그의 수많은 팀도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팀들은 아니었어요. 너무 강력한 에이스는 때론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그 순간의 광기에서 빠져나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죠.”
에이전시의 이야기에 성민이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아뇨, 그러니까 구단에게 강경하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죠. 메이저라면 몰라도 한국에는 한국의 방식이 있습니다.”
“한국의 방식이요?”
“네.”
메이저의 구단은 구단 그 자체가 사업이다. 팀 개별적으로 중계권을 판매하고, 시즌권과 광고, 유니폼, 먹거리 기타 여러 가지 수익사업을 통해 흑자를 만들어낸다.
구단을 움직이는 것은 시장의 논리다. 또한, 선수협의 권위 역시 막강하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자본인 선수가 충분히 강경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반면 KBO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한국의 프로구단은 대부분 모기업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모기업에서 나오는 메인스폰서 광고비용이 마치 광고비가 아닌 구단에서 베푸는 돈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것은 KBO의 팬들뿐 아니라 광고비를 집행하는 모기업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선수는 그저 광고탑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거로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 들어먹을 리 만무하다.
[21세기. 메이저리그에 있었던 사흘 휴식 후 등판의 결과들은 어땠을까?]
가장 좋은 투수가 가장 많이 던진다. 승리를 위한 가장 확실한 공식이다.
그렇기에 포스트 시즌이면 항상 감독들은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투수를 가장 많이 던지게 할 수 있을까?
우리보다 많은 팀, 그리고 많은 포스트시즌 경기가 있는 메이저리그 역시 그런 고민을 피해갈 수는 없다. 실제로 21세기만 따져보더라도 사흘 휴식 후 나흘째 등판했던 경우는 시즌 평균 2회에 가깝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해에 가장 눈부셨던 에이스였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21세기 3일 휴식 이후 등판을 했던 경우는 모두 57회. 이 중 그 에이스들이 팀에 승리를 안긴 경우는 고작 17번에 불과하다. 평균적으로 소화한 이닝은 고작 3.1이닝. 평균자책점은 무려 4.71로 당대의 내노라 하는 에이스들의 성적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사실, 투수와 타자는 본래 많이 만날수록 투수 쪽이 불리하다. 당장 같은 경기에 3번째 타순만 돼도 피OPS는 유의미하게 높아진다. 실제로 21세기 이후 포스트 시즌에서 같은 선발이 한 시리즈에 두 번을 등판한 경우 평균자책점은 0.74점 높다. 하물며 한 시리즈 세 번째 등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사흘 휴식과 나흘 휴식 그리고 닷새 휴식의 경우 각각 0.24점 0.13점의 평균자책점 차이를 보인다. 이것 역시 두 경기 연속 사흘 휴식은 그 경우를 찾기 힘들다.
가장 좋은 투수가 가장 많은 공을 던진다. 승리를 위한 가장 확실한 공식이다.
그렇기에 포스트 시즌의 감독은 고민을 해야 한다. 단순히 시즌 중 가장 좋았던 투수를 많이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그 투수의 지금 상태 그리고 두 번째 옵션, 세 번째 옵션 투수들의 상태. 확실한 2승인지 불확실한 3승 도전인지 같은 요소들을 말이다.
주로 MLB쪽 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제법 인지도 높은 야구 칼럼니스트의 칼럼이 올라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투수의 수명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략)
현재 텍사스의 투수 코치로 뛰고있는 다르빗슈 유 코치는 이렇게 주장 한다.
‘투수의 생명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당해 얼마나 많은 이닝을 뛰었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공을 던졌느냐가 아니다. 물론 그것들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등판 이후 상처난 인대에 얼마나 충분한 휴식을 주었느냐. 그것이야말로 투수의 생명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요소이다.’
(후략)
누구나 알만한 선수의 이름을 빌린 공신력 있는 기자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한국의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울컥할만한 기사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미스터 메츠 강진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가?]
그 기사에서는 메이저 21년 동안 정규시즌만 2914경기. 연평균 139경기를 뛰었던 한국의 위대한 야구 스타 강진호의 부상을 이야기하며, 그가 만약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가능했을 IF를 이야기했다.
각종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 성민이 희연을 만났다.
“후, 성민 선수. 오래간만이네요.”
“아! 박 기자님.”
성민에게 들이대다가 대차게 까였지만 둘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다. 희연은 프로였다. 게다가 올해로 서른셋. 경험 할 건 다 했고 알 것도 다 아는 나이다. 열다섯 시절이라면 몰라도 남자에게 까였다고 엉엉 울면서 다시는 얼굴을 안 볼만큼 어설프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민은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선수다. 나중에 빅리그에 가더라도 김성민 일기 같은걸로 먹고 살 생각까지 하는데, 약간의 쪽팔림이 뭐가 대수인가.
“이번 시즌 정말 환상적인 1년을 보내셨는데요, 이제 한국시리즈만이 남았습니다.”
“네.”
“2차전까지 부산 마린스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제 마린스는 두 번의 승리만 거두면 되는 상황인데요. 최근 여론을 보면 김성민 선수가 두 번을 등판할 수 있는 만큼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다.’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투수에게 너무 심한 혹사는 좋지 않다.’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성민 선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혹사라. 물론 사흘 휴식 후 선발 등판을 두 번 연속하는 건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해본 적도 없고요.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다? 솔직히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뭐 어쩌겠습니까. 까짓거 한번 해봐야죠.”
“그러니까 두 번을 더 등판할 수도 있다?”
성민이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팀이 우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 동안 제가 수많은 마린스 팬들에게 받아온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이죠.”
그리고 카메라가 꺼졌다.
“성민 선수, 괜찮겠어요? 이러다가 진짜 그렇게 등판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괜히 그러다가 패배라도 하면 독박 쓰는 건 성민 선수예요. 부상 문제도 있고요. 차라리 조금 더 직접적으로 위험하다는 늬앙스를 풍기는 건 어때요? 실제로 시즌 중에도 제일 많이 던지기도 했잖아요. 아무리 메이저 쪽 하는 선배들 통해서 그런 기사 내보낸다고 해도 본인 인터뷰가 이래서야······. 게다가 어차피 구단이야 자기네 팬들만 챙기면 되는데 팬들 마음이 바뀔 리 만무하잖아요.”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승을 하려면 제일 좋은 투수가 제일 많이 올라오는 게 진리다. 뭐 쓸데없는 이야기로 아무리 호도하려고 해도 충분히 휴식한 마린스의 다른 투수 놈들보다 네가 더 좋은 투수인 건 팩트니까. 팬이고 구단이고 네가 더 올라오는 걸 원하는 게 당연하지.
성민이 웃었다.
“글쎄요. 과연 어떨까요?”
[김성민 ‘알겠심더. 마, 함 해보입시더.’]
-이런 미친? 21세기에 이걸 하겠다고?-
-울컥한다. 역시 우리 성민이. 마린스의 적통 에이스 답다.-
-미쳤네. 마린스의 적통 에이스는 뭐 1년 뛰고 선수 생활 조지는 전통이라도 있냐?-
-무슨 소리야? 다들 그 뒤로도 잘 뛰었거든?-
-불꽃같이 산화하고 이후로는 전성기의 기량을 찾지 못한 것도 잘 뛴 거냐?-
-그, 잘 뛰었던 선수들 모두 마린스한테 대접 충분히 받으셨겠죠?-
-어휴, 당연하죠. 최소 은퇴와 동시에 영결. 그리고 감독 코스 정도는 밟으셨겠죠.-
-성민아, 아무리 우승이 좋아도 그건 아니야. 얼른 탈출해!!-
마린스의 팬들은 마린스의 우승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다. 그렇기에 성민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자기들을 우승으로 끌어줬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우승이 모두 창창한 선수들의 생명을 불태워 이뤄냈다는 것과 그 선수들에게 팀이 제대로 된 보상을 주지 못했다는 트라우마 역시 존재했다.
성민의 인터뷰가 그들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쑤셔버렸다.
< 언플(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