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73화 (74/287)

< 한국시리즈(4) >

몇몇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1군 무대는 성적을 내는 곳이지 선수의 기량을 키우는 곳이 아니다. 기량은 2군에서 충분히 숙성시키고 올라와야 한다.

일견 옳은 이야기 같다.

하지만 하위 리그, 예컨대 NPB를 박살낸 타자가 상위리그인 MLB에 가서 박살이 나는 경우는 널렸다. 그렇다면 그건 그들이 NPB에서 기량을 덜 숙성시킨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재능이 애초부터 부족해서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타격은 매우 섬세하고 복잡한 운동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140을 던지는 투수를 상대하는 법과 150을 던지는 투수를 상대하는 법은 다르다. 단순히 박자를 조금 빨리 가져가는 것 정도가 아니다. 거기에 수준 높은 변화구까지 더해지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타격의 매커니즘 자체를 뜯어고쳐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에 쉽게 적응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헤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하위리그는 그 선수가 상위리그에 뛸 최소한의 자질이 있는지를 판별하는 용도로 활용됨이 옳다.

싱글A를 굳이 박살 내지 않더라도, 수준급의 성적이 나온다면 일단 더블 A에서 써봐야 하고, 더블 A에서 수준급의 성적이 나온다면 트리플 A나 빅리그에서 사용 해봐야 한다.

KBO의 1군과 2군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박동엽은 지난 2년의 군 생활 동안 퓨처스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성적을 거뒀다. 거기에 툴도 좋다.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은 터져 나가더라도 대체선수 이상의 활약만 가능하다면 상위 리그의 수준에 맞는 기술이 몸에 익을 때까지 여기서 굴려주는 것이 옳다.

물론 그 과정에서 들어먹는 욕들은 박동엽 본인과 공감독이 감당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난 1년, 박동엽은 평생 들어먹었던 모든 욕설을 합친 것보다 수백 배는 많은 욕을 들어먹었다. 아마 그의 부모님도 본인들이 평생 들어먹었던 욕보다 몇 배는 많은 욕을 들어먹었을 것이다.

아무리 신경줄이 쇠심줄 같은 사람이라도 쏟아지는 비난과 원색적 욕설들 앞에서 초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엽은 버텨냈다.

비난과 욕설 사이에는 그를 칭찬하고 옹호하는 이야기들 역시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비난은 점점 줄었고, 칭찬은 점점 늘어났다.

물론 오직 실력만으로 정면 돌파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실력만으로 여론을 반전시키려고 했다면 훨씬 더 대단한 성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인마, 평소부터 기자들이랑 좀 친하게 지내고 해야지. 세상에 자기한테 잘 안 해주는 새끼, 이뻐할 놈은 없어요. 심지어 애들도 사탕이라도 하나 주는 어른을 더 좋아해. 그리고 기자 놈들 펜질이 얼마나 엿 같은지 알아? 걔들은 같은 일도 완전 다른 말을 만들어요. ‘박동엽 득점권에서는 시원한 헛스윙 삼진 그리고 솔로홈런.’ 이거랑 ‘박동엽 공격의 맥을 뚫어주는 통쾌한 선제 홈런포.’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제목을 이렇게 다르게 내놓을 수가 있다니까?”

성민의 조언대로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에게 캔커피라도 하나 건네고, 얼굴을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꾸벅했다. 뒷돈까지는 아니라도 자판기 앞에서 쩔쩔매는 기자들에게는 300원짜리 일반 커피 말고 500원짜리 고급커피로 뽑아줬다.

동엽이 생각할 때 시즌을 치르는 동안 자신의 실력은 수비에서 에러가 줄어든 정도를 제외하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타격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기사의 논조가 하나 둘씩 바뀌자 사람들의 반응 역시 신기할 정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비난을 하는 사람들은 비난을 했다. 하지만 KBO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는 성민 조차도 터무니 없는 이유로 비난하는 곳이 인터넷이다. 그 정도 비난은 감수해야 만했다.

마운드의 바비 메일러가 로진백을 두들겼다.

그는 존의 안팎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까다로운 투수다. 앞선 두 타석에서 동엽은 모두 삼진으로 물러났다.

덕아웃의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어휴, 선두타자 박동엽이라니. 일단 아웃 하나 적립하고 시작이겠네.

경기장의 팬들도 수근거렸다.

“어휴, 박풍기 저 새끼. 내가 아주 저 새끼는 기대가 안 돼요.”

“왜? 그래도 득점권에 주자가 없을 땐 홈런도 곧잘 치잖아.”

“영양가 있는 홈런은 몇 안 돼. 잘 봐라. 저 새낀 어?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그대로 삼진이야.”

10월 24일. 저녁 9시.

기온은 영상 10도.

바비 메일러의 손끝이 차가웠다. 덕분에 로진을 충분히 발랐음에도 마지막 순간 공을 채는 손가락이 삐끗했다.

노렸던 곳은 바깥쪽 꽉찬 코스.

하지만 공은 바깥쪽으로 조금 더 빠진 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타석의 박동엽이 움직였다. 힘차게 움직이는 왼 다리, 그리고 그에 맞춰 돌아가는 엉덩이와 몸통. 그의 방망이가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딱!!

완벽한 어퍼스윙이 존을 벗어난 공을 깊숙하게 퍼올렸다.

그 모습에 마운드의 바비 메일러가 안도했다. 저렇게 완벽하게 빠지는 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르다니. 이건 전화위복이다.

좌측 방면 높게 뜬 타구. 바비 메일러가 등을 돌려 타구 방향을 손가락질 했다.

좌익수가 뒤로 물러났다.

완벽하게 빠졌던 공을 억지로 두들긴 타구다. 잡을 수 있다!!

[박동엽, 높게 뜬 타구!! 좌측 담장 쪽으로!!]

“어휴, 그래 박풍기 네 주제에 삼진 아닌 게 어디냐.”

“놓쳐라!! 놓쳐라!!”

“야, 쟤들 재규어스야. 우리처럼 야구 대신 예능 하는 애들이 아니라고.”

재규어스의 좌익수 주은철이 뒤로, 더 뒤로 물러났다.

이상했다.

두둥실 떠오른 공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설마. 설마?

저렇게 깊숙하게 퍼올린 공이?

2010년대 후반 메이저리그를 강타한 현상이 있다.

플라이볼 혁명이 그것이다.

타구 발사각 20도에서 35도 사이의 타구가 가장 높은 OPS를 보장한다는 기존에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의 우월함을 부정하는 혁신적인 이론에서 출발한 현상이다.

하지만 KBO에서는 그 이론이 쉽게 적용될 수 없었다. KBO는 오히려 전통적 이론에서 주장하는 가장 우월한 발사각인 5도에서 20도 사이의 발사각을 보여주는 타자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다.

이유는 간단하다.

타구속도.

플라이볼 혁명에서 말하는 20도에서 35도 사이의 타구각에서 가장 높은 OPS를 얻기 위해서는 평균 타구 속도가 100마일. 즉 160km/h 이상이 돼야 한다. 그 이하의 타구 속도는 35도의 각도로 날려 봤자 외야 플라이에 그칠 뿐이다.

발사각 34도. 그리고 타구 속도 166km/h.

높게 떠오른 동엽의 타구가 사직의 좌측 담장을 넘어갔다.

“어?”

“야, 홈런. 홈런이야!!”

“박풍기, 아니. 동엽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인마, 퓨처스에서 홈런 칠 때부터 내가 너 딱 마린스의 10년을 책임질 유격수라고 봐 놨다고.”

동엽이 3루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몇몇 선수들이 덕아웃 밖으로 동엽을 마중 나왔다.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동엽이. 믿고 있었다.

‘언제는 아웃 하나 적립이라면서요. 갑자기 웬 우리예요?’

-네가 그랬었잖아. 도움 되면 우리 편. 도움 안 되면 느그 편. 그러니까 오늘 동엽이는 우리 동엽이.

‘이래도 마린스 팬이 아니라고요?’

필 니크로가 침묵했다.

마운드의 바비 메일러가 허탈하게 외야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애초에 이런 공이 담장을 넘어가는 건 투수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경험 없는 투수가 아니었다. KBO에서 용병을 뛰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미 MLB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을 수두룩하게 겪고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투수라는 뜻이다.

그가 침착하게 다음 타자를 준비했다.

이어지는 타석에 현정현이 들어왔다.

공격의 물꼬를 튼 것이 동엽이라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성민의 대활약으로 안그래도 좁았던 비 경남권 선수들의 입지는 이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쪼그라들었다.

‘그래봤자 내년 이후로는 성민이도 없어.’

미래를 생각해볼 때, 한국 시리즈에서 비경남권 선수들이 활약해주는 것은 그에게 매우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 비경남권 선수들의 수장인 현정현 자신 역시도 한층 더 힘을 내야한다.

-딱!!

그 책임감 덕분일까? 아니면 추운 날씨와 뜬금없는 홈런에 바비 메일러의 공이 조금 흔들린 탓일까. 현정현의 밀어친 타구가 1, 2루 간을 가로질렀다.

무사 주자 1루.

[아, 재규어스 덕아웃 움직입니다.]

[흐음, 6회 말, 이제 홈런 하나와 안타 하나를 내줬을 뿐인데 벌써 투수 교체라고요? 이건 조금 빠른 느낌인데요.]

재규어스의 김규식 감독이 고민했다.

‘오늘 점수를 내기는 힘들어. 그렇다면 차라리······.’

한국시리즈는 고작 일곱 경기. 그중 네 경기에 승리해야 한다. 한 경기 한 경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 김성민이라는 놈이 충분히 비상식적인 놈이라는 부분이다. 과연 오늘 이대로 끝까지 선수단을 쥐어 짠다고, 저 괴물 같은 놈을 상대로 점수를 낼 수 있을까?

이럴 때는 차라리 상등마를 하등마와 경쟁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마린스라면 성민을 1, 5차전 선발 7차전 불펜 정도로 내보낼 것이다. 4일 휴식 후 등판 그리고 이틀 휴식 후 불펜은 리그를 압도하는 에이스라면 각오해야 하는 일정이다.

만약 마린스가 미쳐 날뛴다면 성민을 1, 4, 7차전에 선발로 내보낼 수도 있다. 3일 휴식 후 등판, 그리고 또 3일 휴식 후 등판이다. 비상식적인 일정이지만 야구판이라는 것이 원래 상식만으로 돌아가는 동네는 아니니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다.

게다가 너클볼 투수는 본래 등판 간격이 좀 짧아도 잘 던진다. 악력을 제외한 팔과 어깨에 무리가 덜 가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저 자식은 그렇게 세 번을 등판해서 모조리 저 미친 구위를 보여줄 수도 있었다.

어려운 상대다.

하지만 저 김성민이라는 괴물을 제외한다면 팀으로서의 힘은 재규어스 쪽이 훨씬 강하다. 그렇기에 녀석이 괴물 같은 활약을 보일 때는 일단 피한다. 오늘 에이스의 어깨를 최대한 더 아끼고 5차전에서 다시 한번 승부를 걸어본다. 아마 마린스의 불안한 불펜을 생각한다면 이길 수 있는 경기에 김성민 선발이라면 더 긴 이닝을 맡길 터.

더 많이 던지고 나흘을 쉰 김성민과 더 조금 던지고 나흘을 쉰 바비 메일러. 그리고 마린스와 재규어스의 타선 차이를 고려한다면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혹여 상황이 괜찮게 펼쳐 진다면 아예 바비 메일러를 성민을 피해 6차전에 내보내는 것으로 시리즈를 끝낼 수도 있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바비 메일러가 어깨에 아이스팩을 감았다.

***

[부산 마린스 한국시리즈 1차전 3:0 승리!!]

[김성민 한국시리즈 1차전 8이닝 무실점 13K!!]

[6회 말, 공격의 맥을 뚫어주는 박동엽의 시원한 솔로 홈런포.]

[닉 해리슨. ‘2차전 승리도 문제없다.’]

-이번 시리즈 마린스가 먹은 거 확실함. 이제 4차전 7차전 성민이 선발 등판한다고 치면 3승. 거기에 닉 해리슨이 1승만 더 먹어주면 우승임.-

-할배요. 선발이 1, 4, 7 선발이라니. 지금이 무슨 쌍팔년대인줄 아쇼?-

-에이스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성민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우짜기는요. 지는 할만큼 했으니 메아쟈 가야죠.-

-김성민도 마린이 출신에 완전 마린스 빠돌이임. 아마 책임지고 우승 시킬껄?-

-할배들, 84년이랑 92년에 어깨 갈았던 투수들 우째됐는지나 좀 보소.-

“그 데이터 확인했어?”

“무슨 데이터?”

“KBO에 너클볼러 데이터 말이야.”

“이봐. 존. 데이터가 넘어온 게 고작 20분 전이야. 우리에게도 시간을 줘야지.”

“빌어먹을. 나였으면 20분에 데이터 한 바퀴 싹 돌리고 커피도 한잔 했겠다.”

“그래, 지금 분석해야 할 자료가 오직 그 녀석뿐이라면 그랬겠지. 근데 지금 네가 우리에게 맡긴 일이 어디 그 녀석 하나인 줄 알아?”

전직 전력분석팀장이자 현직 단장인 존의 재촉에 마이클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존.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어차피 대충 자료는 다 나왔고, 뛰어들어 보기로 합의도 한 상황이잖아. 영상에서 뭐 이상한 거라도 발견 한 거야?”

“됐고 6회부터 8회까지 데이터. 최우선적으로 뽑아서 보내줘.”

함께 경기장에서 호흡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저 컨디션 정도로 치부했던 성민의 작은 발전을 바다 건너의 누군가가 눈치챘다.

< 한국시리즈(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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