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시리즈(3) >
보통 시즌 막판이 되면 선수들은 지치기 마련이다.
어느 선수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재규어스는 앞서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올라왔다.
-딱!!
[높게 뜬 타구!! 하지만 좌익수 정면!! 아웃!! 아웃입니다.]
5회 말.
지명타자로 출장한 태경의 타구가 뻗어 나가지 못했다.
“시부럴.”
30대 후반에 접어든 나이.
근 열흘을 푹 쉬었음에도 쑤시고 아픈 곳들은 완전히 나아지지 못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10월에 시즌을 끝내고 마무리 훈련이랍시고 방망이를 밤새 휘둘러도 괜찮던 몸이었는데 세월은 속일 수가 없다.
태경만이 아니었다.
마린스의 나이를 먹은 베테랑들은 모두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 때 국가대표급 선수 소리를 들었던 호섭이나 정현 역시 마찬가지다.
반면 재규어스의 타자들은 조금 사정이 나았다.
일단 그들의 나이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라는 점. 그리고 재규어스의 야수 뎁스가 10개 구단 최고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들 역시 마지막까지 우승 경쟁을 했던 만큼 제법 빡빡하게 로스터를 운용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쉴 수 있는 경기에서는 확실하게 휴식을 보장받았다.
덕분에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올라온 재규어스 야수들의 컨디션이 한국시리즈에서 기다린 마린스보다 더 나은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오늘 재규어스의 선발 역시 만만치 않다.
바비 메일러.
그는 재규어스 타선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번 시즌 마린스의 2선발인 닉 해리슨과 함께 다승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우완으로 최고 150의 속구는 용병 투수치고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땅볼을 유도하는 커터와 낙차 큰 커브. 무엇보다 KBO의 투수 가운데서 가장 ‘커맨드’라는 말에 어울리는 제구력이 주무기다.
마린스의 용병 타자인 맷 데이비스가 타석에 들어왔다.
초구 144.3km/h의 커터.
-딱!!
낮게 깔린 타구가 빠르게 2-유 간으로 날아갔다. 재규어스의 유격수 박차현이 가볍게 달려와 몸의 중심으로 깔끔하게 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터닝 스로우. 박동엽처럼 괴물 같은 어깨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수비에 그런 괴물 같은 어깨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웃!!”
실로 교과서적인 깔끔한 수비.
필 니크로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시부럴. 왜 쟤들만!!
‘뭐가 쟤들만입니까. 동엽이도 야구 잘 하거든요.’
-그 자식은 아직 멀었어. 어쩌면 평생 멀었고.
‘거, 악담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성민이 투덜거리며 글러브를 챙겨들었다.
하여간, 필 니크로 이 양반, 1년 정도 마린스 경기를 지켜보더니 이상한 쪽으로 마린스 팬덤에 물이 들었다.
다른 건 다 제대로 보면서 마린스 선수들만 보면 못 까서 안달이다.
[6회 초, 아직 점수는 0:0. 김성민 선수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지금까지 출루라고는 고작 안타 두 개와 볼넷 하나. 김성민 선수, 그야말로 재규어스의 타선을 꽁꽁 틀어막고 있어요.]
[타석에는 재규어스의 1번 타자인 김규찬. 김규찬 선수가 들어옵니다. 벌써 세 번째 타석이로군요.]
[자, 저희 중계를 들으셨던 분이라면 모두 아시겠지만, 선발에게 세 번째 타순이라는 건 정말 위험한 거든요. 결국, 타자와 투수의 싸움은 타이밍의 싸움. 그리고 익숙함의 싸움인데 이게 아무리 어려운 투수라도 세 번 정도 타순이 돌면 타자들이 슬슬 눈으로 공을 익히기 마련입니다.]
마운드로 올라가는 성민을 바라보던 공필승 감독이 며칠 전 사장실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오, 공 감독님.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창단 이후 첫 정규시즌 우승이라뇨. 위에서도 보통 기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구단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주고, 선수와 코치들이 열심히 뛰어준 덕분입니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잡음이 있었음에도 사장님께서 잘 컨트롤해주신 것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거 사람 참. 그냥 위에서 내려오는 잔소리 조금 짬 시켜준 게 전부인데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우승까지 정말 아슬아슬했습니다. 사장님의 그런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슬아슬한 우승 대신 아슬아슬한 준우승을 차지했겠죠.”
세상에 자기 덕분이라는 아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공 감독은 아부 따윈 절대 안 할 것 같은 얼굴의 남자다. 김호산 사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겠죠?”
김호산 사장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저도 야구를 조금 알아봤습니다. 포스트시즌은 투수 놀음이라면서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김성민 선수가 1, 4, 7선발로 나가서 완봉하면 3승은 그냥 확정이고, 닉 해리슨이랑 게릭 벨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하더군요.”
한국 시리즈에서 3경기를 완봉하라니. 공 감독이 기가 찼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김호산이 특별히 무식하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린스의 역사를 보면 한국시리즈에서만 1, 3, 5차전 완투 직후 6차전에서 구원등판. 그리고 7차전 완투까지. 총 40이닝 동안 4승 1패로 팀을 우승시킨 불멸의 에이스와 포스트 시즌에서만 30.2이닝. 4승 무패 1세이브로 팀을 우승시켰던 에이스가 존재했다.
그것에 비하자면 1, 4, 7차전 선발은 충분히 합리적인 제안이다.
공필승 감독이 말을 돌렸다.
“재규어스도 물론 강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더 강합니다. 우승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하하, 자신감 넘치는 모습 좋습니다. 여차하면 김성민 선수를 불펜으로도 좀 올리고 그러는 것도 괜찮습니다. 언론 같은 건 제가 다 알아서 막아보겠습니다. 윗선에서도 아주 팍팍 밀어주라고 난리입니다. 그러니까 언론 같은 거 절대 신경쓰지 말고 소신껏 하세요. 소신껏.”
공필승 감독이 아랫입술을 질겅거렸다.
6이닝.
그래, 아직은 괜찮다.
그의 시선이 마린스의 야수들을 훑었다.
1차전인 오늘.
그는 수비보다 타격에 집중한 라인업을 구성했다.
성민의 컨디션이 최고인 오늘, 수비에 조금 구멍이 뚫리더라도 최대한 상대에게 점수를 얻어내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바비 메일러의 공은 생각보다 좋았고, 마린스의 타선은 생각보다 더 나빴으며,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권혁준은 병살만 무려 두 개를 기록했다. 본래 타격 재능도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는데, 너클볼을 잡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닌지, 좀처럼 방망이가 터지질 않는다.
마운드의 성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부웅!!
“스트라잌!!”
잠시 타석에서 물러난 김규찬이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정규 시즌에서 두 경기.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세 번째 타석.
여전히 어려운 공이다.
‘하지만.’
정타를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방망이를 가져다 대는 정도라면? 그리고 자신의 빠른 발이라면?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말했다.
-날이 쌀쌀하구나.
‘그러게요.’
성민이 손가락에 입김을 후후 불었다.
10월 말. 저녁 8시. 해는 이미 저물어 기온은 12도를 오갔다. 얼어 죽을 만큼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손끝이 곱기에는 충분히 쌀쌀한 날씨다.
-아직 경기 많이 남았다.
‘저도 압니다.’
-지금 설마 뒷일도 생각 안 하고 던지는 건 아니지?
‘맞는데요.’
-그래, 포스트 시즌에 임하는 투수라면 응당 당연한 자세다.
한 마디의 칭찬. 그리고 필 니크로가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하지만 마린스의 에이스라면 그래서는 안 되지!!
‘그건 또 무슨 헛소립니까.’
-빌어먹을. 마린스의 불펜을 생각해라. 살살 던지는 네가 최선을 다하는 마린스 불펜보다 낫다. 마린스의 에이스라면 응당 완봉을 노려야 하는 법!!
‘어휴, 영감님은 마린스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무시라기보다는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이지.
김규찬이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KBO 사상 최강의 투수를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은 의지로 가득한 눈빛이다.
좋은 선수다.
그렇기에 성민은 공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컴퓨터 게임은 단순하다.
더 높은 숫자를 가진 캐릭터가 더 낮은 숫자를 가진 캐릭터를 이긴다. 랜덤한 변수를 준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그 범위 안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불완전하게 모사한 것에 불과하니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세를 탄다는 말이 있다. 컴퓨터 게임의 사기는 100을 넘어서지 못하지만, 현실의 기세는 그 단순한 숫자를 넘어선 무언가를 종종 발휘한다.
마린스의 기세를 높여주기는 힘들다. 한국시리즈, 사직 구장, 40년 만의 도전에도 터지지 않는 타선은 야구의 신이 와서 응원을 해도 터트릴 수 없는 타선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의욕을 꺼트리는 것은 가능하다.
손이 닿지는 않지만, 조금만 더 높이 뛰어보면 닿을 만한데? 라는 마음이 들 때 인간은 강해진다. 손쉬운 도전의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절벽의 꼭대기라면? 오직 절벽을 기어오를 강철같은 의지를 가진 몇몇 만이 그 도전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인간은 흔치 않다.
하지만 프로의 선수들은 대부분 절벽을 기어올라 꽃을 꺾어본 사람들이다.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천장의 절벽이 아닌, 절대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끝.
필 니크로는 말했다.
객관적으로 지금의 성민은 메이저에서 통할 만한 투수라고.
또한, 그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메이저를 정복할 만한 투수였으며, 너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런 재능과 조건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1년 전, 필 니크로는 놀라운 경험을 성민의 몸에 직접 새겨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민이 너클볼을 익히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주었다.
최소한 너클볼러로 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셈이다.
지난 1년 동안 KBO에서 뛰는 사이 성민은 성장했다.
물론 성민은 처음부터 매우 잘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성민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필 니크로의 기준에 따르자면 시즌 초반 성민은 100개의 너클볼 중에서 2~3번의 확실한 실투와 8~9번의 어설픈 너클볼. 그리고 70~80개의 나쁘지 않은 너클볼과 10~20개의 괜찮은 너클볼을 던졌다.
그리고 시즌 막판 성민은 1~2개의 확실한 실투와 6~7개의 어설픈 공. 70~80개의 나쁘지 않은 공과 10~20개의 괜찮은 너클볼. 그리고 1~2개의 훌륭한 공을 뿌렸다.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필 니크로가 성민의 움직임을 보며 신음했다.
-이 녀석이?
겉으로 보기에는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몸속을 꿰뚫어 보는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정규시즌이 끝난 이후의 연습에서 성민과 필 니크로가 추구했던 것은 성민의 몸을 사용했던 필 니크로가 마지막 보여 줬던 그 환상적인 공이었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온몸의 힘을 뽑아내는 와중에 손끝의 감각을 거기까지 유지하는 것은 수천 수만 번의 너클볼을 던져댄 필 니크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시즌 성민이 던졌던 너클볼은 크게 두 가지.
느리지만 1번~1.5번 정도 회전하는 너클볼. 그리고 빠르지만 3번~3.5번을 회전하는 너클볼이었다.
야구공이 성민의 손을 떠났다.
100번을 던져 한, 두 개나 나올법한 훌륭한 공. 그것은 120km/h의 구속에서 고작 1.7번을 회전하는 너클볼이었다.
김규찬의 시선이 공을 쫓았다.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방망이가 흔들렸다. 몸의 회전이 만들어낸 힘이 방망이에 온전하게 실리지 못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망이를 가져다 대기만 한다면!! 대기만 한다면!!
그리고 성민의 공이 또 한 번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것도 김규찬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크게.
-부웅!!
“스트라잌!!!”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보통 우연히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서 나오는 공이지, 이렇게 의도적으로 던지는 것은 시즌이 끝나기 전까진 연습 자체가 안 돼 있던 공이다.
연습을 하던 당시에도 열 번을 던져 한 번을 성공할까 말까 하던 공이었다. 게다가 공을 받는 혁준 역시도 매우 힘겨워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주자가 없다고 해도 이렇게 뜬금 없이 시도를 하다니.
효과는 확실했다.
흔들리는 공은 이미 혁준의 미트에 틀어박혔지만, 김규찬의 시선은 여전히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기세 자체가 스르륵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이어지는 빠른 공이 또 한 번 삼진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6회 초, 재규어스의 타선은 세 번째 타순에도 불구하고 성민을 넘어서지 못했다.
아니, 단순히 넘어서지 못한 수준이 아니었다.
K.K.K.
1,2,3번. 상위 타순의 연속 삼진.
그 압도적인 피칭에 마린스의 타자들이 확신했다.
단 1점.
오늘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1점이면 충분하다.
그리하여 6회 말.
이번 시즌 공필승 감독의 양자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박동엽이 타석에 들어왔다.
< 한국시리즈(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