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71화 (72/287)

< 한국시리즈(2) >

한국시리즈는 총 7차전.

그중 4번의 경기를 먼저 잡는 쪽이 시리즈에서 승리한다.

날이 차다.

성민이 손끝에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공.

-부웅

김규찬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하지만 성민의 공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당연했다. 그의 팔이 지금보다 10cm쯤 더 길지 않은 이상에서야 그 정도로 존을 벗어나는 공을 두들길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젠장.”

평소 공을 잘 보기로 소문난 김규찬이었지만 오늘 성민의 공은 영 구분이 되지 않았다.

‘후우.’

공을 받아 낸 권혁준 역시 식은땀을 닦아냈다. 오늘 성민의 공은 평소보다 더 어려웠다. 평소의 경향성에 의지해서 미트를 움직였다가 공을 놓칠 뻔했다. 미리 존에서 빠져나가는 공을 던질 것이라는 사인을 주고받았음에도 그 정도다.

[김성민 선수, 공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거의 존을 들어오는 것 같던 공이 저렇게 멀리 도망가버리다뇨. 이런 공이라면 제아무리 김규찬 선수라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죠.]

[볼카운트 0-2. 김성민 선수 오늘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데요?]

[충분한 휴식이 그에게는 약이 된 모양입니다.]

[생각해보면 김성민 선수가 이번 시즌 30경기 202이닝을 뛰었어요. 토종 투수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인 용병을 통틀어서도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한 셈입니다.]

세 번째.

성민의 공이 몸쪽 높은 곳을 시원하게 갈랐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148.7km/h

루킹삼진.

사직구장이 끓어올랐다.

사직의 스카이박스.

“흐음, 148.7km/h라. 몇 마일이죠?”

“92.4마일입니다.”

“10월 말에 92.4마일이라니. 터프하군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듭니다. 벌써 202이닝을 던진 투수가 이런 추운 날씨에 1회부터 전력투구라니 말이죠.”

“괜찮을 겁니다. 신인도 아니고 프로에서 10년을 던진 노련한 투수 아닙니까.”

“노련이고 뭐고, 우승이 걸린 시리즈 아닙니까. 이 팀, 40년 동안 우승을 못 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야 팀이 30개나 되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여긴 그것도 아니잖아요. 이 정도면 거의 리그 우승을 40년 동안 못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렇죠.”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투수라면 흥분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로군요.”

“그거야 코치진에서도 충분히······”

“어차피 이번 시즌을 끝으로 FA로 떠날 선수입니다. 40년 만의 우승이 달린 경기라면 감독도 흥분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마린스의 공감독은 이쪽 리그에서는 합리적이기로 유명한······”

그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아무리 합리적인 감독이라도 저런 투수를 보면 참을 수 없는 게 보통이죠. 당장 메이저의 이름난 명장이라는 작자들을 여기 가져다 놔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면서 현장의 감각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겠죠. 빌어먹을 작자들 같으니라고.”

무언가 쌓인 것이 많은 듯, 혼자 씩씩거리던 그 남자가 이윽고 머리를 다시 단정히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메디컬 테스트는 최대한 꼼꼼하게 진행해야겠군요.”

경기가 계속됐다.

두 번째 타자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필 니크로가 신을 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좋았어.

‘아니, 영감님. 좀 냉정한 시선으로 조언을 해주셔야지. 뭘 이렇게 즐기고 그러십니까.’

-냉정한 시선은 개뿔. 기세도 좋은데 팍팍 밀어 붙어야지.

‘그래도 평소에는 너무 오버한다. 경기를 뭐 길게 봐야한다. 잔소리 엄청 하시잖아요.’

-그거야 길게 가는 리그전이니까 그런 거지. 포스트 시즌이다. 기세를 탔으면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팍팍 던져. 괜히 힘 아낀다. 뭐 한다 해서 1점이라도 내주면······. 어휴.

끔찍한 상상이라도 떠올린 양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던 필 니크로가 말을 이어갔다.

-여긴 부산 마린스다.

타석에 재규어스의 3번 타자 주은철이 들어왔다. 올해 프로 8년 차의 선수로 후년 시즌 이후 FA를 맞이하는 27세의 젊은 외야수였다.

[그러고 보니 주은철 선수와 김성민 선수도 참 인연이 깊습니다.]

[그렇죠.]

[두 선수 모두 신인왕 출신에, 6년 전 아시안게임을 통해 병역을 면제받았죠. 당시에 주은철 선수의 경우 국가대표 선발은 조금 이르다는 평이 많았는데 실제로도 아시안게임에서 조금 부진했던 터라 구설이 참 많았습니다.]

[사실 당시 아시안게임은 정말 김성민 선수가 들었다 놨다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죠. 누구나 다 당연히 잡을 거라고 생각한 대만에게는 3.1이닝에 5실점을 허용하더니, 당시 최강이라던 일본을 상대로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시켰었으니까요.]

[아시안게임 당시만 하더라도 다들 김성민 선수의 앞날이 정말 어마어마할 것을 예상했었습니다만, 참 그 이후의 부진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한국시리즈에 우뚝 선 모습을 보자면 그때 전문가들의 예상도 결과적으로 영 틀린 건 아니었네요.]

주은철이 마운드 위의 성민을 바라보며 6년 전을 떠올렸다.

사실 아시안게임 병역 면제의 절반은 성민이 해결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자면 은인이다.

하지만 딱히 좋아할 수는 없는 인간이었다.

오직 야구밖에 할 줄 모르는, 야구 아니면 인생에 답이 없는 주은철 본인과 달리, 성민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심지어 외모까지도.

더럽고 치졸한 질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덤비는 야구에 전력의 절반 정도만 투입하는 것 같은, 그런 주제에 야구는 또 잘하는 성민을 보고 있자면 배알이 꼴렸었다.

마운드의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주은철이 방망이를 움켜 쥐었다.

공이 날아 든다.

빠르고, 현란하게.

-딱!!

날카로운 스윙이 야구공을 두들겼다.

‘젠장.’

우측 내야 관중석을 직격하는 파울.

주은철이 타석에서 물러나 헬멧을 고쳐 썼다.

이번 시즌, 지금까지 자신의 절반만을 불태우는 것 같았던 천재가 야구에 모든 것을 걸고 움직였다.

‘시발, 저 형은 뭘 어떻게 해도 그냥 재수가 없네.’

하지만 배알은 여전히 꼴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야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점만이 짜증 났던 게 아닌 것 같다.

마운드 위에서 공을 움켜쥐는 성민의 모습이 보였다.

길쭉길쭉하고 훤칠하다.

‘썬크림 대신에 비비크림을 바른 건가?’

솔직히 야구 빼면 뭐 하나 괜찮은 점이 없는 인간과 야구를 빼도 다 괜찮은 인간이 있다면 전자에게 야구 재능 한 줌 정도는 더 주는 것이 공평한 것 아닌가? 역시 신은 없다. 신이 있다면 세상의 밸런스 조절이 이렇게 개판일리는 만무하다.

주은철이 성민의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와인드업.

그리고

역시 폼만 보고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노리는 것은 빠른 속구.

성민은 앞선 두 타자를 상대로 빠른 공을 욱여넣었다. 1회부터 148짜리 공이 뻥뻥 나오는 날이다. KBO에서 148짜리 속구를 그렇게 던질 수 있다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아, 시발.’

크게 올라간 다리가 바닥을 찍었고, 돌아간 엉덩이를 따라 방망이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주은철은 깨달았다.

이거 느린 공이다.

선택은 두 가지. 어떻게든 공을 두들겨 본다. 혹은 방망이를 멈춰본다.

주은철이 방망이를 멈춰세웠다.

-뻐엉!!

“스트라잌!!”

빌어먹을, 항의 해볼 수도 없을만큼 존에 완벽하게 들어 온 공이었다.

99km/h

아니, 솔직히 말해서 사기다. 99km/h짜리 공이랑 148km/h짜리 공이 같은 폼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 중간에 120km/h짜리도 있다.

미쳤다.

역사상 이딴 공을 쳐낼 수 있던 타자는 빠른 공 타이밍에 방망이를 휘두르다 멈칫하고는 다시 휘둘러서 담장을 넘긴 약마. 배리본즈 뿐일 것이다.

세 번째.

성민의 공이 날아왔다.

마찬가지로 느리다.

볼카운트 0-2.

선택지는 없다. 움직이던 방망이를 그대로 가져다 댔다.

-딱!!

돈도 많이 번다. 아직 FA는 못 해서 집은 전세지만, 차는 독일산 외제차다. 옷도 명품으로 입는다. 거기다가 유명인이다.

하지만 27세 주은철 그는 아직까지 모태 솔로다.

넘쳐흐르는 정력과 시간을 오직 방망이에게 집중한 사나이.

오늘 성민이 던지는 너클볼은 최근 몇 달을 통틀어 가장 좋은 공이었다.

그가 그나마 공을 페어지역으로 날려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긴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마운드에 선 것은 성민 혼자가 아니었다.

8명의 마린스 야수들이 성민과 함께했다.

바로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쳤습니다!! 타구는 우익수 방면으로!! 우익수!! 우익수 김호섭!!]

[아!!!! 빠졌습니다. 구르는 타구!! 김호섭 주워들어 2루에!!]

“세이프!!”

호섭은 오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고 좁았던 수비 범위가 갑자기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지간한 우익수였다면 잡아낼 수 있었던 타구.

어지간을 넘어서지 못한 마린스의 우익수가 재규어스의 첫 안타를 선물했다.

-아, 시발. 김호섭 저 새끼는 경기 전날에 어? 그렇게 감동적인 멘트도 주고받고 했으면 뭐 각성 같은 거라도 해서 잘해야 하는 거 아니냐? 영화 같은 거 보면 원래 다 그렇잖아. 뭔가 의미심장한 말 같은 거 하면 죽음으로 동료를 돕잖아. 근데 왜 쟤는 사망플래그 같은 거 세워놓고 살아 돌아오냐고.

‘인생이 뭐 영화도 아니고······.’

-망할 새끼들. 하여간 마지막까지 꼭 자기들이 마린스라는 걸 인지하게 해주네.

경기를 직관하던 관중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김호섭 저 돼지 새끼. 저걸 놓친다고? 아오, 시발. 진짜 올해 돌 지난 내 조카를 저기 세워놔도 저건 잡겠다.”

“저래놓고 또 에러는 아니지. 하여간 이제 외야수 보면 안 될 새끼가 왜 외야에 있냐고. 어? 이진섭이 있잖아. 이진섭이.”

“그러니까, 수비부터 타격까지 이제 이진섭이가 훨씬 낫잖아.”

“진짜 마린스 이 시부럴 새끼들은 어? 코시에서까지 연공서열로 라인업을 짜고 있네.”

-이건 솔직히 우리 진섭이가 우익수였으면 아웃이었다.

‘아니, 우리 진섭이는 무슨 우리 진섭입니까. 그리고 진섭이는 아직 기본기가 부족하고 경험이 없어서 얼어서 어버버 탈 수도 있어요.’

-젠장, 호섭이가 자기랑 친하다고 편들기는.

[1회 초, 투아웃 주자 2루. 재규어스가 득점권에 주자를 보냈습니다.]

[이건 재규어스 입장에서는 정말 천금 같은 기회입니다. 이번 시즌을 살펴보면 김성민 선수 시즌 30경기를 뛰면서 고작 31점을 내줬어요. 그중 자책점은 고작 17점에 불과하고요. 경기당 평균 1점 조금 넘게 내준 셈이죠.]

[지금 타석에 재규어스의 4번 타자 마크 톰슨, 마크 톰슨 선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직에 모인 마린스의 팬들이 호섭의 수비에 불평을 쏟아냈다.

주자 2루.

타석에는 KBO에서 가장 강력한 타격 생산을 자랑하는 재규어스에서도 가장 강력한 4번 타자 마크 톰슨.

하지만 불평을 쏟아내는 팬들의 시선에 불안감은 없었다.

오늘 사직의 마운드에 선 남자는 KBO 최강의 투수인 김성민. 그는 마린스의 에이스였으며 마린스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들의 위대한 에이스는 항상 한국시리즈에 더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처럼 성민의 공이 마크 톰슨의 방망이를 침묵시켰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1회 초.

3개의 삼진.

-그래 본래 마린스 투수는 수비 믿고 던지면 안 되지. 내가 잡아야지. 내가 이겨야 한다. 이 타자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 삼진으로 무조건 잡아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던지는 거야.

필 니크로가 성민의 어깨를 두들겼다.

경기가 계속됐다.

< 한국시리즈(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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