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4) >
사직구장 지하의 넓은 체력 단련실.
-그렇지.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구를 이용한 스트레칭이 이어졌다. 근막을 풀어주고 전신의 관절을 꼼꼼하게 이완시켰다.
성민이 일주일 가깝게 휴식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평소처럼 격렬한 운동이 없었다는 뜻이지, 운동 자체를 쉬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몸의 어디 한 구석 무리 없이 의도한 대로 쭉쭉 움직여졌다.
이후 웨이트 트레이닝이 이어졌다.
피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공을 낚아채는 과정이다. 물론 너클볼은 그 낚아채는 힘 만큼 손끝으로 밀어내어 공의 회전을 억제하는 동작이 더해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구속을 결정짓는 것은 그 회전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히 근력을 상승시키는 것이 구속증가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피칭은 힘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기술의 결과물이지, 단순히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으, 이거 진짜 도움 되는 거 확실하죠?’
-멍청하기는. 네 이번 시즌 성적을 직접 보고 말해라.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그건 너클볼의 위력 때문 아닙니까.’
-너 지난 마지막 경기에서 몇 마일 던졌냐. 거의 93마일까지 던졌잖아. 시즌이 다 끝나가는 판국에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근육을 등한시해도 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피칭에서 근육은 직접적인 구속에도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영향을 준다.
피칭 이후의 일이 그것이다.
팔을 휘둘러 공을 집어 던진 이후의 브레이크의 과정이 안정됐을 때, 선수는 부담 없이 팔을 휘두를 수 있다. 그리고 그 브레이크를 잡아주는 것이 어깨와 등의 근육이다.
그리고 필 니크로가 지금까지 가장 중점적으로 단련시킨 부위가 바로 그곳이었다.
물론 부담 없이 팔을 휘두르기 위해 등과 어깨를 강화하는 와중에 정작 근육이 너무 비대해져서 팔의 가동범위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
얼핏 듣기에는 세상에 그런 멍청한 놈이 어딨겠어 하는 일이지만, 놀랍게도 세상에는 그런 멍청한 일이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성민의 몸 내부를 마치 겉을 보는 것처럼 살필 수 있는 필 니크로가 가장 적절한 시점에서 그것을 통제했다.
게다가 튼튼한 어깨와 등 근육의 장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투수들에게는 아주 큰 딜레마가 있다.
공을 던지는 것은 기술의 영역이고, 기술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결국 연습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히 근육을 단련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근육의 발달은 적당한 훈련과 적당한 휴식을 통해 완성되지만, 기술은 훈련과 더 많은 훈련을 통해서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몸은 소모품이다.
어느 유명한 투수의 말처럼 어깨는 분필과 같다. 관절의 연골과 인대는 자연적 재생이 극히 어렵다.
요즘에야 줄기세포 주사를 통해 일정 부분에서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며, 제대로 된 병원에서 제대로 된 방식으로 진행되는 줄기세포 치료는 성민 같은 고연봉자도 쉽게 생각하기 힘들 만큼 비싸다.
훈련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
훈련을 하면 몸이 망가진다.
프로 투수는 그 딜레마 사이에서 줄을 타야 한다. 누군가는 더 많은 훈련 끝에 잠깐 반짝이고 사라진다. 또 누군가는 조금 몸을 사린 결과 자신의 재능을 다 개화시키지 못한다.
물론 더 많은 훈련에도 불구하고 반짝이지조차 못하고 사라지는 선수들 역시 부지기수다.
그리고 여기서 근육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내구성.
더 튼튼한 어깨와 등의 근육은 투수들의 그 딜레마를 아주 조금은 해결해준다. 디스크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척추기립근과 광배근으로 그것을 보조하는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강화된 등과 어깨의 근육은 연골과 인대의 부하를 조금은 나눠 가져간다.
즉 더 빠른 회복, 더 많은 훈련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연습용 밴드로 어깨의 근육을 충분하게 자극시켰다. 팔의 회전에 사용되는 근육을 자극하면서 연골과 인대에 무리를 주지 않는 훈련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이후에는 오른손으로 탄력 있는 기다란 막대의 가운데를 쥐고 가볍게 흔들며 어깨를 자극했다. 본래는 잘 사용하지 않던 기구였는데, 작년에 재활을 하면서 의외로 어깨 강화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기구였다.
필 니크로의 눈에 적당하게 펌핑된 어깨와 등이 보였다. 활성화된 근신경계가 눈부시다. 만약 파워리프팅이 목적이라면 여기서 조금 더 운동을 하는 것이 옳지만, 애초에 목적은 최대 근력의 상승이 아니다.
-거기까지.
‘후, 이제 드디어 공 던질 차롑니까?’
-은근슬쩍 뛰는 거 빼먹으려고 하지 말고.
필 니크로가 성민의 개수작을 원천 차단했다. 성민이 50미터 달리기를 수행했다. 투수들에게 장거리 달리기가 필요하다는 이론이 혁파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5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다만 여전히 땅의 반발을 활용하는 하체의 느낌은 단거리보다 장거리 쪽이 더 적합하다는 반론이 있었지만, 그것 역시 최고의 효율을 위해서는 차라리 하프 스쿼트 쪽이 더 적합했다.
-헥헥
순간적으로 높아진 산소 요구량에 맞춰 성민이 크게 호흡했다. 필 니크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에서 요령을 부리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한계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유령이 붙어 있는 이상에서야 요령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모든 훈련이 끝난 후, 마침내 직접 공을 던질 타이밍이 돌아왔다.
‘두 박스?’
-아니, 30개.
‘고작 30개요?’
-10개는 하프로.
‘허, 그나마 10개는 또 하프로 던지라고요?’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재미없는 운동은 다 끝내고 즐겁게 공을 좀 던져보려는데 그건 또 30개로 제한하다니. 성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필 니크로는 단호했다.
근 일주일을 기본적인 스트레칭만 하면서 보냈다. 많은 공을 던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사실 한국시리즈까지 남은 기간 내내 많은 공을 던지게 허락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늙은 나이까지 너클볼 보급을 위해 많은 연구를 했고, 최신의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었던 필 니크로였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60년대에 데뷔해서 80년대까지 뛰었던 옛날 선수였다.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승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무리는 해도 괜찮다는 것이 그의 사고관이었다.
물론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몸을 살필 수 있는 만큼 최악의 경우는 막아줄 수 있다는 점도 중요했다.
필 니크로가 오직 한국 시리즈만을 위해 성민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리고 그사이 마린스는 또 졌다.
[이제는 충격도 없다!! 부산 마린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게 7:6 패배!!]
훈련을 끝내고 나오는 길.
성민의 앞으로 기자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김성민 선수, 오늘 굉장히 일찍 들어가신걸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혼자 훈련을 하신 건가요?”
“오늘로 부산 마린스가 후쿠오카 피닉스 리그에서 3연패를 했는데, 이에 대해서 뭔가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일본의 2군 팀에게 KBO의 우승팀이 3연패를 한 사실에 대해 국민들이 크게 분노하고 있는데요, ‘마린스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김성민 선수가 너무 몸을 사린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지금이라도 후쿠오카로 건너가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분명 훈련을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없었는데, 누군가 성민을 목격한 인간이 어딘가에 소스를 흘린 모양이었다.
“네, 혼자 훈련했습니다.”
“연습경기인데 결과보다는 선수들의 컨디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상 당하는 선수 없이 모두 실전 감각을 잘 끌어올려서 돌아오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민이 국민의 분노를 운운한 기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평소 순둥순둥해 보이는 얼굴로 실실 웃고 다닐 때는 몰랐지만, 194cm에 100kg에 육박하는 근육질이 무표정하게 누군가를 응시하는 모습은 조금 무서웠다.
‘야,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예전이었다면 걱정했을 필 니크로가 관전자 모드로 그 장면을 관찰했다. 나이와 경험은 본인이 더 많았지만, 이런 일은 성민이 전문이다. 그래 너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날개를 펼쳐보거라.
성민이 입을 열었다.
“우선 우리 마린스를 마치 국가대표처럼 생각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몸을 사린다는 부분은 맞는 말입니다. 마린스는 지금 무려 30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 저는 에이스로서 사소한 것 하나도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혼자 훈련하는 것보다 후쿠오카에서 함께 훈련하며 연습경기를 뛰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일각에서는 김성민 선수가 개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기 위해서 한국에 남았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습니다. 뭐 CF나 방송 출연 같은 일들 말이죠.”
필 니크로가 턱을 괴었다. CF. 좋은 공격이다. 약간의 긴장감이 그를 설레게 했다.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이런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마린스의 선수 놈들은 괴물이다.
필 니크로의 기대처럼 성민이 일체의 당황 없이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기자님, 혹시 선발 투수의 루틴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선발 투수가 가장 잘 던지는 데 필요한 훈련이 뭔지, 그리고 그 훈련 사이사이에 어떤 휴식이 가장 효과적인지 같은 것들요.”
잠깐의 시간. 기자가 무언가 답하려는 찰나 성민이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정답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70억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70억 명의 사람은 모두 다 다르죠. 투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투수가 각자의 루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깐만요, 그 루틴이라는 것과 CF가 무슨 상관이라는 말씀이시죠? 야구랑은 아무 상관 없는 외부활동 아닙니까.”
기자가 성민의 말을 성급하게 끊고 들어왔다.
“기자님, 선발 투수는 굉장히 외로운 직업입니다. 물론 소중한 동료들이 등을 받쳐주고 있다지만, 홀로 마운드에 서서 경기를 끌어나간다는 것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여간 심한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저같은 경우는 그 외적으로도 스트레스가 조금 많았고요.”
-마린스 놈들과 함께 뛰는데 당연히 많았지.
필 니크로가 공감했다.
물론 기자들은 조금 다른 쪽으로 생각했다.
‘하긴, 김성민 선수가 올해 세운 기록이 몇 개야? 게다가 마지막까지 우승 경쟁에 무패까지. 압박이 크긴 컸지.’
‘근데 지금 그게 대체 이 이야기랑 무슨 상관인거지?’
“김성민 선수, 죄송하지만 자꾸 CF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은데요.”
무표정하던 성민의 얼굴에 다시 슬쩍 미소가 감돌았다.
훈훈했다. 그리고 그 훈훈한 얼굴로 성민이 말했다.
“제가 장예슬양 팬입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확 사라지더라고요.”
“네?”
“기자님 혹시 실물 보셨어요? 전 봤거든요. 엄청 가까이에서 실물은 더 예뻐요. 사인도 받았습니다. 노래도 압니다. 딴딴딴따 딴딴따.”
기자들이 경악했다.
필 니크로 역시 경악했다.
-와, 이걸 이렇게?
후쿠오카 피닉스 리그. 부산 마린스의 세 번째 패배가 있던 저녁.
스포츠 야구 섹션에 가장 큰 기사는 부산 마린스의 패배도, 준플레이오프 브레이브스의 승리도 아닌 성민의 행복한 미소였다.
[김성민 행복한 미소. ‘장예슬 실물이 더 예쁘더라.’]
< 폭풍전야(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