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3) >
예슬이 성민이 달렸던 곳을 달리기 시작했다.
-와.
필 니크로가 또 한 번 감탄했다.
‘와.’
성민 역시 함께 감탄했다.
“미치겠네.”
그리고 정 감독은 그냥 복장이 터졌다.
성민의 연기가 그린 스크린에 산맥을 그리게 하는 연기였다면, 그녀의 연기는 정확히 정 반대.
온몸으로 이곳은 절대 산맥이 아니고 그린 스크린일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는 연기다.
“컷!! 우리 잠깐 쉬었다 합시다.”
정확히 열일곱 번의 테이크 이후 정 감독이 휴식을 선언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시간을 버리고 있어야 하는 거냐?
‘저 친구가 하고 나서 같이 서서 하는 씬이 있어서 그거 해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오늘 내로 가능하겠어? 지금 1시간째 이러고 있었는데 답이 없어 보이는데?
‘어쩔 수 없죠. 다시 말하지만 12억입니다.’
-110만 달러. 그래, 참아야지.
성민이 쉬고 있는 예슬에게 슬쩍 다가갔다.
“힘드시죠.”
“네? 아뇨.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운동선수도 저길 1시간 동안 뛰어다니면 힘들 텐데요.”
“다 제가 잘못해서 그런걸요. 그것보다 김성민 선수는 너무 잘 하시던데요? 이거 하기 전에 힘들면 제가 도와드린다고 했던 말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잘하기는요. 애초에 운동 선수한테 바라던 기대치랑 배우한테 바라는 기대치가 달라서 그런 거겠죠.”
성민의 말에 예슬이 손사레를 쳤다.
“아니에요. 동작 하나하나가 정말 카메라 동선에서 딱 보여줘야 할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게, 깜짝 놀랐어요. 게다가 마지막 카메라 응시하시는 모습도 정말 자연스러운 게. 휴, 이게 정말 재능이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재능이라. 예슬 씨 조금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제가 그쪽으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있거든요. 혹시 들어보실래요?”
“무슨 이야기인데요?”
성민이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한 15년 전? 제가 아직 빡빡머리 학생 때 일이에요. 지금은 피닉스에서 뛰는 수현이부터 해서 진짜 재능 넘치는 애들이 많았어요. 근데 그중에서 황종명이라고 진짜 저건 답이 없다 싶은 형이 하나 있었거든요.”
“어떻게요?”
“중 3 주제에 141km/h짜리 공을 던지고 커브에 슬라이더까지 진짜 완전 말도 안 되는 형이었어요. 거기다가 3/4/5에 12홈런이었나?”
다시 말하지만, 이 여자 연기 진짜 못 한다. 예슬의 얼굴에 지금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은 표정이 드러났다.
“으음, 그러니까 쉽게 연예인으로 말하자면 연습생이 연기는 당장 성인 프로 연기자들이랑 비교해도 안 밀리고, 노래는 또래 중에서 압도적인 수준? 뭐 그런거죠.”
“와우, 정말 대단한 선수였네요.”
“근데 지금 그 형 곱창집해요.”
“네? 아, 저 무슨 말씀 하려는 지 알 것 같아요.”
“무슨 말인데요?”
예슬이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답했다. 성민의 시선이 그 가슴을 따라갔다. 확실히 삐쩍 말라서 그런지 흉부는······.
“노력이요. 노력. 아무리 재능을 타고 나도 노력이 중요하단 말씀 하시려는 거잖아요.”
“아닌데요.”
“네?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노력은 원래 다하는 거죠. 세상에 노력 없이 정상에 서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 형도 밥 먹고 야구만 했어요. 진짜 오질나게 했죠. 예슬 씨, 프로의 세계에 노력은 옵션이 아니라 기본입니다.”
“그, 그러면요?”
성민이 힘을 주어 답했다.
“재능은 결국 시간이 지나 봐야 안다는 겁니다.”
“네?”
“가끔 쥐꼬리만 한 재능이 먼저 픽 하고 터지는 경우가 있어요. 근데 그게 꼭 그 사람의 재능이 어마어마하단 뜻이 아니에요. 재능은 누구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게 터지는 시점이 조금 다를 뿐이에요.”
“터지는 시점이 다르다······.”
“이런 유명한 말이 있죠. 뉴욕은 캘리포니아보다 3시간 빠르지만 그렇다고 캘리포니아가 뉴욕보다 뒤처진 것은 아니라는 말.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스물여섯 살에 이미 사이 영을, 그러니까 골든 글러브 주인공 상 같은 겁니다. 하여간 그런 걸 스물여섯 살에 세 개씩 탔지만, 누군가는 스물여덟 살에 처음으로 사이 영을 수상했어요. 하지만 서른 하나, 서른둘에 또다시 사이 영 상을 얻어냈어요. 결국,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누구도 두 번째 투수가 첫 번째 투수보다 못 하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냥 서로 시작하는 시간이 달랐던 것뿐이에요.”
예슬이 중얼거렸다.
“시작하는 시간이 다르다······.”
“네, 제가 장담하건데 예슬 씨는 재능이 있어요.”
“정말요? 그걸 어떻게 믿죠?”
“왜 그걸 모르죠?”
성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답했다.
“거울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네?”
“운동선수의 재능은 크기, 내구성, 반응속도, 순발력, 협응력 등등이라면 배우의 재능은······.”
“재능은?”
“아름다움이잖아요.”
눈 하나 깜짝 않고 내뱉는 그 오글거리는 대사에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역시 대단한 녀석이다.
그런데 더 통탄할 일은 이게 통한 것 같다.
예슬의 얼굴이 한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일까? 설마. 이 여자 표정 관리 정말 조금도 안 된다. 이건 누가 봐도 좋아하는 거다.
말세다. 이딴 게 먹히다니.
물론 성민이 자식이 얼굴도 괜찮은 편이고, 몸은 아주 괜찮고, 인지도도 상당히 높은 데다가 재산도 이제 괜찮아질 예정이고······.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객관적으로 조건이 상당히 괜찮다?
촬영이 재개됐다.
물론 성민이 충고 한마디 했다고 예슬이 각성해서 촬영이 번개처럼 진행되는 기적은 없었다. 컷에 컷에 컷에 컷이 거듭됐고, 그나마 건진 샷에도 감독은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민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약 14시간의 촬영, 그리고 앞으로 몇 가지 경우에 이 브랜드의 옷을 입는 조건과 그의 경기 중 장면을 협의 후, 광고에 사용할 권리를 내준 대가로 12억.
그리고 덤으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아이돌의 개인 전화번호가 그의 스마트폰에 저장됐다.
***
10월 한 달 동안 진행되는 미야자키현의 피닉스 리그.
피닉스 리그는 본래 NPB 12개 팀의 2군 유망주들이 팀당 15~18경기씩을 치르는 형태의 교육리그다.
KBO의 경우 재규어스, 피닉스, 그리핀즈 세 팀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피닉스와 그리핀즈의 경우는 항상 뒤에서 1등과 2등을, 재규어스 같은 경우 보통은 하위권을, 가끔씩 중간등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2군끼리만 따졌을 때 NPB와 KBO의 수준은 1군 간의 격차보다 더 크게 차이가 났다. 사실 이것은 총 야구 인구, 그리고 육성형 용병이라는 것의 존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런 것은 전문가들의 생각이고, KBO를 응원하는 팬들 생각은 조금 달랐다.
최근 국제경기에서 한국은 일본과 거의 대등한 성적을 거뒀다. 단기전이기 때문도 있지만, 실제로 최상위권 선수들의 경우는 실력 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의 팬들은 설마 KBO의 우승팀이 실전 감각을 조율하러 떠난 일본 2군들의 교육리그에서 이런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충격!! 부산 마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에게 충격의 2연패!!]
[KBO 우승팀이 일본의 2군 팀에게 2패를?]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 불완전했던 전력 탓? 충격의 2연패.]
[공필승 감독 ‘승패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감각을 끌어올리는 것에 주안을 둔 경기였다.’]
-와, 미쳤네. 요미우리면 이번에 센트럴 리그 4위해서 가을야구 아예 하지도 못한다던데 그런 팀 2군을 상대로 KBO 우승팀의 1군이 2연패를 했다고?-
-크보 수준 나왔죠.-
-수준은 무슨, 요미우리가 1군은 3위였지만 2군 리그에서는 우승이었음. 게다가 이번에 선발로 뛰었던 사가와는 2031년 드래프트 1라운더에 요미우리에서도 졸라 기대 걸고 키우는 애고, 량 쟈이슌도 메이저에서도 120만까지 불렀던 애를 요미우리가 돈 겁나 먹여서 육성형 용병으로 데리고 온 놈임.-
-어쨌거나 KBO 우승팀이 일본 2군한테 두 경기나 졌다는 건 팩트잖아.-
-마린스가 어디 걔들 힘으로 우승했냐? 우승의 절반을 담당한 성민이도 빠졌고, 외국인 선발들 전부 다 빠졌잖아. 사실상 마린스도 2군이나 다름 없었다.-
-충격!! 마린스 1군은 오직 김성민, 닉 해리슨, 게릭 벨 뿐인 것으로 밝혀져!!-
-그게 뭐 충격 씩이나 받을 일이냐.-
-근데 솔직히 자존심 엄청 상하네. 아무리 그래도 우승팀 1군인데 무슨 일본놈들한테 지고 있어? 지금이라도 김성민이랑 보내서 이겨야 하는 거 아님?-
-네, 다음 재규어스 팬 나오시고요. 아니 한국시리즈가 코 앞인데, 시범경기보다도 안 중요한 연습경기 좀 졌다고 에이스를 보내자고? 제 정신이야?-
여러 가지 변명은 가능했다.
일단 상대 선발 투수들이 2군이라기에 너무 강력한 투수들이었다. 아마 요미우리가 포스트 시즌에 나갔더라면 절대 2군 교육리그에 나오지 않았을 선수들이다. 게다가 마린스는 주전급 선수가 대량으로 빠져있었고, 체력적으로도 더 지쳐있었다.
게다가 단기전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야구다. 당장 MLB 올스타도 NPB 올스타에게 승률은 7할밖에 되지 않는다. 대체선수로만 이뤄진 팀이라고 해도 리그 정상의 팀에게 3할의 승률을 거두는 것은 정상이다 등등.
하지만 한국과 일본이라는 조금 특별한 관계들이 그런 합리적인 변명을 틀어막았다.
준플레이오프가 한창인 상황.
언론의 시선이 준플레이오프가 벌어지는 경기장이 아닌 미야자키현, 그리고 성민을 비롯한 미야자키로 떠나지 않았던 마린스 선수들이 훈련하고 있는 사직구장으로 향했다.
***
사실 각종 스포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경기를 연속으로 치른 선수의 최대 체력이 깎여있는 것이 다시 원래의 그것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긴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시즌을 치른 선수가 체력적으로 완전하게 회복되기 위해서는 최소 보름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물론 정규시즌 이후, 한국시리즈까지 삼 주간의 휴식은 그러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하지만 체력을 회복하겠다고 실전 감각을 잃어버리면 그것대로 곤란하다.
성민은 원래 오늘 예고 없이 모교를 방문해서 서프라이즈를 한번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애들 삼겹살을 수입산으로 먹일까, 국내산으로 먹일까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역시 그래도 이만큼 성공했는데, 국내산으로 먹여야겠죠? 아, 그런데 걔들 더럽게 많이 먹는데. 그래서 원래 FA 안된 선배는 수입산이 정석인데. 근데 또 이름값은 더럽게 올라가서 가오가 안 산단 말이죠. CF도 찍었겠다. 그거 정산은 좀 멀긴 했지만, 그래도 확 질러버려?
그런 성민에게 필 니크로가 말했다.
-오늘이다.
“네?”
-오늘부터 본격적인 훈련 다시 시작이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누적된 피로야 원래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니, 아직 피로도 좀 덜 풀린 것 같고. 이주 남짓 남았는데 빡세게 한다고 기량이 올라갈 것도 아니고요. 그냥 충분히 쉬어서 체력을 회복시켜 두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7차전 중에서 막 3경기 등판해야 할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사실 성민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회복과 실전 감각 유지는 상당히 미묘한 문제였으니까. 다만 성민의 곁에 있는 코치는 사람이 아닌 귀신이었고, 그는 사람의 속을 마치 겉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이 있었다.
-성민아?
그 다정한 부름에 성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갑니다. 가요.”
성민의 차가 사직구장으로 향했다.
< 폭풍전야(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