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2) >
“뭐? 다시 말해 봐. 누구라고? 김성민? 이런 미친. 야 원래, 김수혁 아니면 박경찬하기로 했었잖아. 모델 출신에 배우로도 한창 뜨고 있고. 근데 갑자기 무슨 운동선수를 들이미는 거야.”
“그게, 클라이언트 쪽에서······.”
장 감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치겠네. 내가 분명 스포츠 하는 애들이랑은 작품 안 한다고 말하지 않았었냐? 나, 이거 안 해. 아니 못 해.”
“감독님.”
“아, 뭐? 왜? 우리 바로 3개월 전에도 TV 작품 하나 했잖아. 그러니까 임대료고 뭐고 아직 여유 있잖아.”
“이번 거, 부일 모직 겁니다. 우리 제일 큰 고객이요. 이거 뺏기면 우리 사무실 연 수입 30%가 날아가는 거예요.”
“어휴, 진짜. 잘 나가는 애들도 많은데 왜 하필 운동선수냐고.”
‘그야 그중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애니까 그렇죠.’
조감독이 말을 삼켰다.
“내가 예전에 이야기한 적 있지?”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조감독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 운동선수가 운동이나 하지 왜 CF는 찍겠다고 나와서. 차라리 끼 있는 일반인이 낫지. 내가 살다 살다 그런 빡대가리는 또 처음 봤어.”
오전 11시에 시작했던 촬영이 새벽 2시까지 끝나지 않았다.
뭐 사실, 광고를 찍다 보면 그 정도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씬 하나를 가지고 무려 8시간을 재촬영하고 결국 O.K를 못 내서 내일 다시 보자고 하는 일은 흔치 않다.
“나도 어지간하면 타협을 하려고 했지. 근데. 와, 이건 어버이의 마음으로 보려고 해도 도저히 OK를 할 수 없는 거야.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냥 계속하고 싶었거든? 근데 뭐 스케줄이 있다나? 찍은 거로 어떻게든 하라는 거야. 와, 진짜 배우 새끼들도 CF 무시하는 새끼들 쌔고 쌨지만, 그런 신박한 새끼는 또 처음이었어. 근데 광고주도 그냥 하래. 뭐 어째? 그냥 했지. 어차피 뭐 선수에게 바라는 수준은 딱 그 정도였을 거라나? 뭐 국민 영웅이라 이 거지. 근데 그럴 거면 CF는 왜 찍냐? 그냥 선수가 나와서 이 옷 좋습니다. 다들 입으세요. 이러고 끝내지.”
정감독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좀 괜찮을 겁니다. 김성민은 소문도 좋고.”
“야, 소문은 걔도 좋았어.”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장 감독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다. 대신 여자는 모델 찍고 배우로 간 친구로 하자. 어?”
“그게······.”
“아, 뭐. 왜!!”
“여자는 장예슬 하라고 하던데요.”
“장예슬?”
“네, 왜 그 3년 전에 걸그룹으로 데뷔했던······.”
“시발, 그 얼마 전에 사랑의 작대기 동공 연기했던 걔?”
“네······.”
“야, 나 지금 도망가면 진짜 우리 회사 망하냐?”
장 감독의 한숨이 사무실에 가득 찼다.
***
-그러니까 지금 이게 중요한 일이라고? 한참 훈련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CF를 찍는다고?
‘지금 아니면 시간도 없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쉬는 기간이에요.’
-이게 쉬는 거냐? 그리고 너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려고. 너 그런 거 구설수 오르는 거 싫어하잖아. 혹시라도 우승 못 해 봐.
‘일단 우승 못 하는 건 생각한 적도 없고요. 그리고······.’
-그리고?
‘이거 12억짜리 광고에요.’
-12억이면······, 110만 달러? 이거 광고 한 번에 110만 달러라고?
‘뭐 이것저것 조건이 붙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어요.’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류 선수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고는 하지만, 110만 달러라면 절대 적지 않은 돈이다. 작년 메이저리그의 평균 연봉은 570만 달러.
CF 한 번에 평균적인 메이저 선수 연봉의 20%라면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한국도 정말 시장이 크긴 크구나. CF 한 번에 110만 달러라니.
‘미국은 뭐 달라요?’
-글쎄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팀의 그 친구들도 CF에서 그거 30%도 못 받았었다고 알고 있다. 물론 30년 전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 친구들이요?’
-그렉과 톰 말이야. 꽤 유명한 나이키 광고인데 못 봤나 보군. 어쨌거나 미국은 브랜드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CF에 인기 스타를 잘 쓰지 않는 편이지. 운동선수라면 스포츠 브랜드 정도?
‘저도 이거 스포츠 브랜드 광고인데요?’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등산복도 스포츠 브랜드라고 한다면 스포츠 브랜드이기는 하지.
“김성민 선수!! 일찍 오셨네요.”
“네, 미리 이것저것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장도 좀 보고 주의사항도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어휴,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세요.”
미리 받은 콘티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실내 촬영 이후 CG로 배경을 집어넣는 지극히 일반적인 요즘 촬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장 예슬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안녕하세요. 김성민입니다.”
“와. 김성민 선수!! 저 진짜 팬이에요.”
비현실적인 느낌의 여자가 성민에게 인사를 했다. 머리가 과장 조금 보태서 주먹만 했다.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수준이다.
게다가 다리는 과장을 보태지 않고 성민의 팔뚝보다 얇았고 허리는 성민의 허벅지보다 얇았다.
‘와, 이거 뭔가 톡 하고 치면 뚝 하고 부러질 것 같은 느낌인데요?’
-이 모자란 놈이? 대체 왜 여자를 보고 톡 하고 칠 걸 먼저 생각하는 거냐.
“감사합니다.”
“이번에 30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하셨다고 들었어요. 메이저리그도 가신다고 들었고요. 미국이라니.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거기다가 막 혼자 20승도 넘게 하시고. 역시 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하더니, 사람들도 모두 이번에 부산이 우승한 게 성민 선수 덕분이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얼마 전에는 KBO 최초로 완봉경기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거기다가 최초의 전승 투수라고도 들었고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성민이 웃었다.
이 여자, 야구도 잘 모르는 주제에 자꾸 용어를 써가며 팬인 척을 하고 있다.
그런데 다 틀렸다.
멍청한 새끼라면 여기서 굳이 정정을 해주겠지만 다행히 성민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굳이 분위기를 깰 필요가 없다.
성민 역시 적당한 립 서비스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휴, 제가 대단하긴요. 저희야말로 진짜 팬입니다. 애들이 아주 예슬 씨 노래만 들어요.”
“진짜요? 어떤 노래요?”
물론 모른다.
하나도 모른다.
“아, 그 왜 그거 있잖아요. 딴딴딴따 딴딴딴.”
“어!? 아, 아이 패스드 말씀하시는 거죠?”
“맞다!! 맞아요. 그런 제목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런 쪽은 잘 모르는 데다가 좀 음치라서.”
“어휴, 음치는요. 잘하시던데요.”
이 여자 연기가 어설프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성민이 자기 노래를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챈 티가 난다. 하지만 정정하지 않는다. 이거 제법 마음에 든다.
성민이 그냥 웃었다. 여자도 그냥 따라 웃는다.
“TV CF는 처음이신 거죠?”
“네, 예전에 잡지는 해본 적 있는데 영상은 처음이에요.”
“오늘 촬영이 실내 스튜디오에서 그린 스크린으로 하는 거라 몰입이 조금 힘드실 텐데.”
“뭐, 그래도 잘 해봐야죠.”
“힘드시면 살짝 말씀해주세요.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이 시작됐다.
***
“흠, 뭐 와꾸는 훌륭하네.”
정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194cm.
성민은 키가 크다.
게다가 안 그래도 본래부터 그리 살집이 있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시즌을 치르는 동안 몸에 지방이 더 빠졌다.
날렵하다.
물론 프로선수인 만큼 모델처럼 여리여리하지는 않았다. 미용이 아닌, 기능을 목적으로 하는 옹골찬 근육들이 옷의 라인을 방해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를 넘어 훌륭했다. 오히려 저 일반적인 모델들과 조금 다른 이질감이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
무엇보다 깔끔하고 개구진 얼굴과 우락부락한 몸의 대비가 신선했다.
“연기도 괜찮을 겁니다. 걱정을 마세요. 어차피 뭐 여기저기 좀 뛰어다니는 게 전부잖습니까. 중요한 표정 연기 같은 건 예슬 씨가 담당할 거고요.”
“어휴, 그것도 그것대로 걱정이거든? 쟤도 연기 못 하는 거로 유명하잖아. 내가 진짜 비전문가 둘 데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필 니크로가 촬영 현장을 보고 걱정을 표시했다.
-이거 괜찮겠어?
‘뭐가요?’
온통 초록색으로 가득한 촬영 현장.
차라리 진짜 산맥을 뛰어다니는 거라면 나을지도 몰랐다. 대체 이런 공간에서 어떻게 산맥을 연상케 하라는 것인지.
-아니다. 어차피 쟤들도 운동선수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겠지.
실제로 스튜디오의 그린 스크린 앞에서 진행하는 촬영은 전문 배우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일반인들에게 이런 환경을 준다면 백이면 구십구, 어색함에 웃음부터 짓고 만다.
장 감독이 성민의 NG를 각오했다.
“자, 그러면 준비 해주시고요. 미리 말씀드린 대로 저기서 저기로, 또 저기서 저기로. 진짜 산 오르는 것처럼 오르고 마지막에 돌아서 여기 응시해주시면 됩니다. 중간중간 이상한 건 컷을 하고 이어 붙이면 되니까 너무 부담은 가지실 필요 없어요.”
“네.”
카메라가 돌아가고 촬영이 시작됐다.
TV에는 바위로 등장할 녹색의 장애물을 밟고 뛰어 또 다른 장애물로 훌쩍 올라갔다. 촬영장에 설치된 카메라들이 성민을 쫓았다.
‘어?’
점프 한 번에 한 번씩 컷을 하리라 각오했다. 단순히 녹색의 장애물을 밟는 것이 아니라 진짜 바위를 밟고 뛰는 것처럼 해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다, 하다 안되면 어디서 바위를 직접 공수해올 각오까지 했다.
성민이 장애물을 뛰어넘고, 달리고 달려 정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저 멀리 메인 카메라를 힘있게 바라봤다.
“감독님? 감독님?”
“어? 어!! 컷!!!”
정 감독은 그냥 성격이 더러운 감독이 아니다. 그는 성격은 더럽지만 분명한 능력이 있는 감독이었다.
그런 그가 놀랄 만큼 훌륭한 연기였다. 물론 고작해야 CF 주제에 무슨 연기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달랐다.
점프를 뛰어 다음 장애물 위로 올라설 때의 움직임. 그때마다 옷 위로 돌출되는 근육의 윤곽선. 마치 세트장이 아닌 진짜 현지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몰입감.
지금 정 감독의 머릿속에는 진짜 험난한 산맥을 오르는 성민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감독님 다시 갈까요?”
“그건 무슨 개소리야. 이걸 왜 다시 가.”
“네?”
“오케이라고.”
세트장의 스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만하다. 지금 성민의 움직임은 그린 스크린 위에 장엄한 산맥을 그리는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확실히 운동선수라서 몸을 쓰는 건 잘하나 보다.’
‘무슨 헛소리야. 운동선수라고 이런 걸 다 잘하면 은퇴한 운동선수는 다 액션 배우 하게? 이건 그냥 저 친구가 특별한 거야.’
필 니크로 역시 감탄했다.
이 녀석 뭔가 이상하게 다 잘 한다.
야구 선수로는 망해가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왠지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인생은 망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놈을 야구나 시키는게 맞나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야구로 더 크게 성공시켜주면 된다. 아직 한국 시리즈까지 2주가 넘는 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을 더 빡세게 굴려야겠다. 필 니크로가 결심했다.
< 폭풍전야(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