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1) >
정규시즌 우승이 결정됐다.
사실 KBO에서 진짜 우승은 포스트시즌의 우승이다. 실제 기록도 포스트시즌의 성적으로 기록된다. 즉 정규시즌 5위로 끝을 냈다고 해도 최종 성적표에는 우승 딱지를 붙일 수 있다는 의미다.
몇몇 사람들, 특히 정규 시즌을 우승해놓고 한국 시리즈에서 업셋을 당한 팀의 경우는 그것의 부당함을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물론 꼭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명분을 이유로 KBO의 포스트 시즌에 대해 성토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좀 생각해봅시다. 애초에 포스트 시즌이 왜 생겼습니까. 미국에서 내셔널리그가 1876년에 생겼습니다. 그리고 1882년에 AA, 그러니까 아메리칸 어소시네이션이라는 리그가 생겼죠. 미국이라는 나라에 메이저리그가 두 개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챔피언도 두 팀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아니, 우리 리그 챔피언이 진짜 챔피언이야? 아니면 쟤네 리그 챔피언이 진짜 챔피언이야. 그래서 자기들끼리 세계챔피언을 정합니다. 그게 월드 시리즈의 기원이에요. 근데 우리는요?”
“명분이 없다 이겁니다. 명분이. 정규시즌 144경기 뭐 빠지게 붙어서 제일 많이 이겼는데 막판에 4경기 지면 우승팀이 아니다? 굳이 단일리그인 나라에서 포스트 시즌을 하자면 그건 그냥 축제가 되는 게 마땅해요. 근데 그거 안 되죠. 왭니까? 포시가 돈이 되니까 그런 거예요. 이거야말로 포스트 시즌이 정정당당한 스포츠의 논리가 아닌 자본의 논리로 돌아간다는 증거에요. ”
애초에 정규시즌에서 실컷 1등부터 10등까지를 정해놓고 대체 왜 다시 1등을 뽑느냐.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TV를 지켜보던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오늘의 저요? 아니면 작년의 저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성민이 답했다.
“사람 생각이 어떻게 매일 같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바뀌기도 하고 그런 거죠.”
-흐음, 그러면 일단 오늘의 생각부터 들어보지.
“오늘의 저는 당연히 저 말에 대찬성이죠. 아니 1년 144경기를 쎄가 빠지게 뛰어서 우리가 1등인 걸 증명했는데, 뭘 또 번거롭게 다시 증명을 합니까. 안 그래요?”
필 니크로가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그러면 작년의 너는?
“당연히 포스트 시즌 해야죠. 자본의 논리니 뭐니 그러는데. 어차피 프로 야구 자체가 자본의 논리로 하는 공놀이 아닙니까. 자본의 논리 싫으면 어? 저기 동네 야구장에서 자기들끼리 야구하면 되지. 게다가 미국 놈들도 포시 늘리려고 별의 별 꼼수를 다 쓰잖아요. 리그 두 개로 나눈 거로 모자라서 지구를 세 개로 구분하고. 와일드카드를 또 넣고. 일본도 12개 팀 가지고 양대리그 하고 있고요. 안 그렇습니까?”
그 치열한 답변에 필 니크로가 할 말을 잃었다.
한 마디로, 지네가 정규시즌 우승한 해에는 포시가 필요 없고, 아닌 해에는 필요하다는 개소리다.
“하여간 뭐 이런 겁니다. 세상에 절대로 옳은 게 어딨겠습니까. 다들 그냥 그렇게 믿고 사는 거죠.”
-근데 넌 왜 아무것도 안 믿는 거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도 믿는 게 있어요.”
-믿는 게 있다고?
“네, 저의 이익이요.”
뭔가 굉장히 당당하면 안 될 이야기 같은데 당당하다. 구리구리한 이야기도 저 정도로 당당하니 어쩐지 멋져 보이기도 한다.
필 니크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지금 이건 뭐 하는 거냐?
‘뭐가요?’
성민이 땀을 뻘뻘 흘렸다.
필 니크로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아니 치열하게 쉬던지, 아니면 뭔가 보양을 해도 모자랄 시간에 이런 짓이라니. 게다가 이 녀석, 바로 며칠 전에 세상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이익이라고 소리친 녀석이었다.
우승이 결정나고 정확히 이틀이 지났다.
성민이 이른 아침부터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야구용품을 잔뜩 사들였다. 물론 선수들이 사용하는 제대로 된 물건들은 아니었다.
“아이, 참. 사장님. 제가 지금 한두 개 사는 것도 아니고, 좀 깎아주세요. 아시잖습니까. 저 좋은 일하는 거. 제가 사인도 해드릴게요. 사인.”
“저기 저 벽 좀 봐라. 네 사인이 몇 개인지. 아니 네가 좋은 일 하는 데 왜 매일 내 마진을 가져가냐고.”
“좋은 일 같이 좀 하자는 거죠. 그리고 저 사인들은 제가 어? 좀 빌빌 거릴 때 사인 아닙니까. 2032년 버전은 아주 가치가 다를 거라니까요. 나중에 100년 뒤에 옥션에서 막 10억씩 하고 그럴 겁니다.”
“어휴, 말이나 못 하면. 그래, 공 두 박스 더 껴준다. 이 이상은 안 돼. 진짜 매입 가격에 주는 거야. 돈도 많이 벌면서 말이야.”
“사장님. 저 김성민입니다. 김성민. 마린스 우승의 주역이요. 그러니까 좀 더 팍팍 써보세요.”
“팍팍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블레이즈 팬으로 갈아탄 지가 언젠데. 너 때문에 우리 이번에 가을야구도 못 갔거든.”
“어휴, 부산 사시면서 팍팍하게 무슨 블레이즙니까. 거기다가 마린스 성적 안 나오면 인상 팍팍 쓰고 있던 거 다 압니다. 이번 기회에 또 갈아타세요. 한 번 갈아탄 거 두 번 못 타겠습니까?”
“됐다. 네가 계속 있을 것도 아니고. 내년이면 어차피 멀리 갈 거면서.”
한참을 실랑이질하며 용품을 한가득 구매한 성민이 고아원을 찾았다. 평소 하던 짓을 생각하면 기자들이라도 잔뜩 대동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혼자 몰래 찾아갔다.
그래, 솔직히 멋졌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다.
하는 짓을 보면 그저 한숨밖에 안 나온다.
“아조씨. 이거 봐라.”
“아저씨 아니고 형. 그리고 그건 3분 전에도 보여 줬던 거잖아.”
“형 아니고 아조씨!!”
“아저씨 아니고 형!!”
“형 아니고 아조씨!!!!”
“아저씨 아니고 형!!!!!!”
점점 올라가는 데시벨.
앞니가 하나 빠진 녀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성민과 함께 목청을 높였다. 그나저나 이 애새끼 이제 고작 여섯 살이 된 아이와 정신연령이 딱 맞다. 아이와 놀아준다기보다는 정말 아이와 함께 놀고 있다.
“야, 야!! 그건 얍쌉이지. 원래 이 게임 점프 앉아 약발은 안 쓰는 게 국룰이라고.”
“국룰? 국룰이 뭔데?”
“그런 게 있어. 안 지키면 비겁자 소리 듣는 거.”
“진짜야?”
그런 소리를 한 주제에 정확히 3분이 흐른 뒤에는
“모야? 국룰 이라며!!”
“좋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를 비겁자라 부르는 걸 허락하겠다.”
“비겁자!!!”
“하하하, 패배자가 되느니, 승리한 비겁자가 되겠다. 그것이 나의 신념!!”
근사한 표정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인다.
아이들은 또 저런 머저리가 뭐가 그리 좋은지, 좋다고 꺄르르 웃어 재꼈다.
그렇게 꼬박 하루의 시간 동안 아이들과 놀아준 성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형아, 벌써 가는 거야?”
“그래, 이제 가 봐야지. 아직 어린이인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형 같은 어른에게는 어른의 비즈니스라는 게 있어요. 그건 그렇고, 너 이 녀석. 지금까지 꿋꿋하게 아저씨라고 부르다가 갈 때 되니까 형이라고 불러준다?”
아이 하나가 입을 삐쭉거렸다. 성민이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 채 웃었다.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원래 아쉬우면 형이라고 불러주고 그러는 거야.”
“언제 또 올 거야?”
“모르겠다. TV 봤으면 알겠지만, 이 형아가 조만간 미국을 갈 수가 있어서 말이야. 그래도 뭐, 아예 한국 안 오는 건 아니니까. 다음번에는 영어 적힌 티셔츠 들고 놀러 오마.”
성민이 아이들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울상을 짓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필 니크로가 물었다.
-이것도 너의 이익 때문에 하는 짓이냐?
“당연하죠. 어차피 세금으로 내면 나랑 아무 상관없는 동네에 보도블럭으로 깔릴 돈,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쓰는 겁니다. 게다가 혹시 압니까? 지금 쟤들 중에서 부경고 진학해서 내 후배가 되고, 이후에 마린스에 들어와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 녀석이 나올지?”
-내가 생각할 때 마린스 입단은 모르겠는데 그건 불가능할 것 같구나.
“아, 진짜. 솔직히 브레이브스 우승 확률보다 마린스가 우승할 확률이 더 높거든요? 브레이브스는 창단되고 거의 100년 동안 꼴랑 세 번인데, 저희는 창단 50년 만에 세 번이거든요.”
-91년이다. 그리고 우리는 팀 숫자도 다르고 리그 우승 횟수는 엄청 많다고. 게다가 너희 지금 세 번째 우승은 확정도 아니잖아.
“제가 있는데 확정이나 마찬가지죠.”
-큰소리 치기는.
필 니크로의 삐죽거림에 성민이 웃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어차피 세금낼 돈 이미지 관리 하려면 이런 거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시작했었어요.”
-이미지 관리? 그런 거 하려면 기자라도 데리고 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에이, 그런 거 하면 너무 가식적이잖아요. 어차피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결국, 다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는 게 이미지에는 더 좋은 겁니다.”
-만약 안 드러나면?
“좋은 일은 다 드러난다니까요. 그리고 제가 친한 기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필 니크로가 할 말을 잃었다.
***
와일드 카드.
준플레이 오프
플레이 오프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한국 시리즈가 시작할 때까지는 거의 3주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팀에게는 상당히 유용하면서도 고민이 되는 시간이다.
사실 3주는 단순히 휴식이라고 하기에 너무 긴 시간이다.
초반 며칠은 선수단 전원에게 휴가를 준다. 쉬어야만 괜찮아지는 자잘한 부상들을 회복하고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다시 단체연습으로 기량을 끌어올리고, 한국시리즈 1차전을 목표로 자체 청백전 등을 진행하며 실전 감각을 끌어 올린다.
부산 마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산 마린스, 오는 11일 미야자키로 출국 확정!!]
[공 필승 감독 ‘구단의 배려에 감사한다. 이번 한국시리즈를 대비한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부산 마린스가 참가할 미야자키 피닉스 리그의 정체는?]
-와,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오네. 우리 팀 1군들이 10월에 미야자키 교육리그에 참가를 하다니.-
-근데 이게 효과가 있음? 보니까 일본 2군급 신인 애들이랑 KBO에 싹수 좀 보이는 신인급들 모여서 하는 교육리그던데.-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한국 있어 봐야 실전 감각 올리려면 대학팀들이랑 연습인데, 미야자키 교육리그는 그 대학팀 에이스들만 뽑아서 올린 유망주들로 구성돼있잖아. 당장으로는 최선의 상대지.-
-효과 엄청 있음. 당장 정규 우승팀이 미야자키 가서 상대 전적 후달린 적 엄청 많을걸? 우리나라 1군 팀이라고 해봐야 일본 2군팀보다 딱히 엄청 차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
-이 할배는 20세기에서 왔나? 우리 1군이랑 일본 2군 차이면 거의 싱글 A랑 더블 A 차이거든요. 그냥 상대 전적 안 좋았던 이유는, 우리는 1년 풀로 시즌 치른 선수들이라 지쳤고, 걔들은 경기 거의 안 뛰었던 신인들이라 체력 빵빵해서 그런 거잖아.-
물론 모든 선수가 다 미야자키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참고 뛸만한 부상이지만, 그래도 회복까지 더 긴 시간이 필요한 선수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그냥 한국에서 자신의 몸을 끌어올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거나, 더 긴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베테랑들이 빠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성민 역시 포함됐다.
“성민아 너 진짜 안 가냐? 어차피 가도 경기 많이 뛰는 것도 아닐 텐데, 따듯한 데서 구단 돈으로 훈련도 하고 맛난 것도 먹고 하면 좋을 텐데?”
“이번에는 할 일이 많아서요.”
“할 일?”
호섭의 질문에 성민이 웃으며 답했다.
“네, 할 일이요.”
< 폭풍전야(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