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3) >
메이저 시절 박두찬의 가장 큰 약점은 빠른 공이었다.
물론 97마일 이상의 빠른 공에 강한 타자가 세상에 어딨겠냐마는 박두찬은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이는 그의 배트 스피드가 느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배트 스피드는 매우 빠른 편에 속했다. 이는 전적으로 그가 공을 매우 오래 지켜보는 습관이 있다는 것에 기인했다.
그리고 오늘, 그는 자신의 루틴대로 충분히 오랜 시간 성민의 공을 지켜봤다.
하지만 너클볼이라는 공은 오래 지켜본다고 알 수 있는 공이 아니다.
박두찬의 동공이 흔들렸다.
-부웅!!
“스트라잌!!”
헛스윙 스트라이크
세 번째.
성민의 공이 날아들었다.
148.6km/h의 빠른 공.
두찬이 잘 쳐내는 구속의 공이다. 하지만 타격이란 결국 타이밍이고, 구속은 그 타이밍을 뺏기 위한 무기에 불과하다. 100km/h짜리 공을 거듭 지켜본 눈에게 148.6km/h의 공은 흡사 160짜리 공처럼 빠르게 느껴졌다.
두찬의 몸이 오랜 기간 박아넣은 습관대로 움직였다.
-딱!!
맞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타이밍이 완벽하게 밀렸다.
힘없이 구르는 타구. 박동엽이 공을 잡아 가볍게 1루에 송구했다.
“아웃!!”
삼자범퇴.
두찬이 혀를 내둘렀다. 귀가 아프게 이야기를 들었고, 영상으로 수십 번을 돌려봤지만, 실제 타석에서 보는 건 더하다.
이건 너무 터무니없다.
수출이 시급하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두찬이 코치에게 슬쩍 입을 열었다.
“코치님, 이거 애들 기회 주는 게 낫겠는데요? 세상에 이런 투수도 있다. 뭐 이런 거 보여주는 용도로요.”
“그 정도야?”
“저거 한국에 있을 애가 아닙니다. 빅리그에도 저런 놈은 드물었어요. 쟤 대체 왜 4경기나 노디시전이에요?”
“지금 몰라서 물어?”
마린스의 야수들이 타석에 섰다.
오늘 브레이브스의 선발은 24세의 군필 투수 박수창. 최고 147km/h를 던지는 좌완 투수로 브레이브스가 작정하고 밀어주는 유망주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유망주는 유망주, 지금까지 1군 선발 경험은 2경기가 전부였고, 오늘 경기도 크게 기대하기보다는 그냥 1군 무대를 경험해보라는 차원의 등판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7분 27초.
마린스의 공격이 끝났다.
박두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왜 4경기나 노디시전인지 이제 알겠네요.”
“아니, 진짜 몰랐냐고.”
“어휴, 샌디 코팩스를 칭찬하는 요기 베라의 심정이 잠깐 돼봤습니다. 사람이 센스 없기는.”
깔끔한 삼자범퇴 직후,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필 니크로가 실망하지 않았다.
-괜찮아, 아직 우리 진섭이 타석 안 돌아왔어.
‘아, 거 참. 누가 들으면 쟤가 진짜 재능 어마어마한 줄 알겠습니다.’
-어마어마할걸?
‘뭐, 제 재능 알아본 것처럼 그런 걸로 알아보신 겁니까?’
-아니, 그건 딱 한 번밖에 없던 기회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보이잖아. 몸이.
필 니크로의 시선이 진섭을 훑었다.
탄력 있는 근섬유와 섬세하게 발달한 신경망. 긴장의 순간 활성화되는 뇌의 시냅스까지. 어디서 이상한 짓만 안 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발전할 가능성이 보이는 재목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KBO에서 봤던 모든 선수 가운데 성민 다음으로 가능성이 보였다.
-물론 마린스라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어쩌면 7년, 8년 뒤 빅리그에서 볼 수 있을지도. 필 니크로가 뒷말을 삼켰다.
마운드의 성민이 브레이브스의 타자들을 상대했다. 오늘 평소보다 구속이 조금 잘 나오는 터라 손끝으로 공을 밀어내는 힘의 가감이 어렵기는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면 구속은 빠를수록 좋다.
너클볼 역시 마찬가지다. 이전까지 너클볼은 106km/h정도의 구속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알려졌었지만, 최초의 사이 영 너클볼러인 R.A 디키 이후 그 이론은 혁파됐다.
최고 121km/h의 빠른 너클볼과 101km/h의 느린 너클볼이 타자들을 농락했다. 그 사이사이 149km/h의 속구 역시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물론 조절이 힘들었던 만큼 간간이 실투는 있었다.
하지만 프로 25인에 간신히 이름을 걸친, 혹은 앞으로의 기대감 때문에 확장 엔트리로 1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애송이들이 상대하기에는 그 실투조차 너무 강력했다.
3이닝 연속 삼자 범퇴.
[대단합니다. 김성민!! 시즌 마지막 경기. 팀의 우승을 어떻게든 확정짓겠다는 듯, 정말 매서운 기세로 브레이브스의 타선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박수창 선수 역시 대단하긴 마찬가지에요. 좌완으로 147km/h. 대단한 재능을 지닌 투수이긴 했지만 여러 가지로 아쉬웠는데요, 오늘 슬라이더가 아주 기가 막힙니다. 마린스의 타자들이 도통 제대로 공략을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부럴, 마린스 이 변비 같은 새끼들. 하여간 마지막까지 또 이렇게 변비같이 구네.-
-아니 3회에는 안타가 두 개나 나왔는데 점수가 없어.-
-권혁준 저 새끼. 병살머신인데. 어휴, 저 새끼 빠지면 너클볼 받을 사람이 없으니 빼라고 할 수도 없고. 진짜 발암이다.-
두 번째 상위 타순이 돌아왔다.
사실, 오늘 경기 브레이브스와 마린스의 경기에서 브레이브스의 승리를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브레이스의 팬보다는 재규어스의 팬이었다.
브레이스의 팬이 바라는 것은 그들이 응원하는 타자들의 타이틀 정도다. 어차피 정규시즌 우승은커녕 준플 직행도 물 건너 간 상황. 그들의 관심은 이미 이틀 뒤 있을 와일드카드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오늘 김성민 하는 꼴 보니까. 이거 그냥 애들 일찌감치 쉬게 해주는게 낫겠는데? 괜히 이러다가 어디 잘못되거나, 컨디션 나빠져서 와일드카드 경기 망치면 곤란한데?”
“그러게. 뭐 타이틀도 중요하긴 한데, 지금 다른 팀들 경기 돌아가는 꼴 보니까, 그냥 내려도 충분히 사수할 것 같은데 말이야.”
4회 초.
선두 타자 김승리.
성민이 한층 더 피칭에 신경을 쏟았다.
101km/h의 너클볼 직후 이어진 강속구.
-딱!!
높게 뜬 내야 뜬공. 성민이 가볍게 공을 받아냈다.
[맙소사!!]
[149.7!! 오늘 김성민 선수 정말 날을 잡았네요. 이 선수 지치지도 않는 건가요? 이미 29경기, 194이닝을 뛴 선수라고는 믿기 힘든 체력입니다.]
[사실 KBO나 NPB 출신 선수가 미국으로 갔을 때 크게 걸리는 요소를 꼽으라면 체력이거든요. 오늘 경기, 김성민 선수를 지켜보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온 사람들이 참 많은 거로 아는데, 그들 앞에서 우리 김성민 선수가 자신의 기량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서경혁, 그리고 박두찬.
브레이브스가 자랑하는 트리오가 차례차례 타석에 들어왔다.
그리고 차례차례 침묵했다.
4회 말, 브레이브스의 수비 이닝.
김 감독이 사실상 경기를 포기했다.
[아, 김승리, 서경혁 박두찬 선수가 한 번에 교체됩니다. 0:0 상황에서 조금 과감한 선택인데요?]
[당장 모레 있을 와일드카드에 대비해서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아끼겠다는 계산 같습니다. 사실 브레이브스 같은 경우는 오늘 경기에 이기건 패배하건 별 영향이 없거든요. 게다가 저 세 선수 같은 경우 시즌 중반에 일주일 결장했던 김승리 선수가 127경기로 가장 적은 경기를 소화했을 뿐, 서경혁 선수가 136경기, 박두찬 선수 같은 경우 141경기나 소화를 했습니다. 휴식을 줄 필요가 있죠.]
경기가 이어졌다.
6회까지 0:0
브레이브스는 사실상 경기를 포기했지만, 마린스는 그들의 호의를 손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승리는 오직 자신의 손으로 쟁취한다는 그 진취적인 자세에 필 니크로가 감탄했다.
-시부럴. 역시 내 이럴 줄 알았다. 마린스는 언제나 정정당당하지. 후세의 누구도 이걸 떠먹여 줬다고 말하지 못할 거다.
‘······.’
성민이 침묵했다.
-다시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마린스와 비교하지 마라.
성민이 차마 뭐라 답을 하지 못하던 바로 그때.
-딱!!!
박동엽의 방망이가 마침내 불을 뿜었다.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박동엽의 플레이는 모 아니면 도.
그는 무려 121개의 삼진을 기록하며 당당히 리그 최다삼진에 이름을 올렸지만, 23개의 홈런으로 유격수 최다 홈런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144차전.
[6회 말, 원아웃 주자 1루. 박동엽!! 담장 크게 넘어가는 타구!! 마침내 마린스가 0:0의 팽팽한 균형을 깨트립니다.]
-‘내 이름은 박동엽. 앞선 두 개의 삼진은 모두 이 홈런을 위한 준비였다.’-
-후, 삼진만 보면 진짜 화딱지 나서 미치겠는데, 또 가끔 이런 걸 보여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미쳐버리겠네.-
온라인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뭔가 기분은 좋은데 마냥 칭찬만은 하기 싫은 이중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성민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2점.
충분했다.
7회 초, 성민이 기분좋게 마운드에 올라왔다.
8이닝 무실점 13삼진.
그렇게 2032년 10월 3일.
50년간 한번도 깨진 적 없던 부산은행의 대국민 금융사기의 일부가 마침내 깨졌다.
마린스 가을야구 가자 정기예금 특판
정규시즌 우승 시 추가금리 0.1%
이제 남은 것은 한국시리즈 우승 추가금리 0.1%뿐이었다.
***
“뭐 이딴 자식이 다 있습니까? 미쳤군요. 테일런, 이 자식 우리가 데리고 오겠다고 보여주신 거 맞죠? 제발 그렇다고 해주십쇼. 빌어먹을 워싱턴이나 뉴욕 놈들과 계약한 녀석은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94마일짜리 속구에 75마일, 62마일짜리 체인지업만 들고 있어도 까다로운 투수인데 이 자식은 체인지업 대신 너클볼을 들고 있잖습니까. 체인지 오브 페이스를 너클볼로 하는 투수라니. 이거 그냥 디키잖습니까. 아니죠. 디키는 그래도 속구라도 88마일이었죠. 얜 그보다 더하잖습니까. 대체 누굽니까?”
“누군지 모르십니까?”
“젠장, 우리 애들 관리하기도 빡센데, 대충 보니까 일본이나 한국 쪽 애 같은데 제가 거기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필리스의 단장 션 테일런이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KBO에 성민이라는 투수입니다. 올 시즌 성적은 30경기 202이닝 25승 무패. 평자책 0.76.”
“KBO라면······. 젠장, 놀랍지도 않군요. 저만한 투수가 AA에서 뛰는데 당연히 그만한 성적은 거둬야죠. 저 자식 당장 우리 팀에 와도 1선발입니다. 양키스에 간다고 해도 2선발도 다퉈볼 만하겠군요.”
“게릭의 생각도 그렇더라고요. 올 시즌을 기준으로 다저스를 제외한 팀이라면 모두 2선발 경쟁 가능. 우리 팀이랑 브레이브스, 파이어리츠, 보스턴, 신시내티 정도면 1선발 경쟁도 가능해 보인다고 평가 하더군요.”
필리스의 감독 마이크 스미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입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 당연히 영입 가능하니까 이렇게 보여주신 거겠죠. 맙소사.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하신거군요.”
“맞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년? 아니 1년이라도 더 참는 게 좋다고 생각되지만, 팬들에게는 3년도 너무 긴 시간이었죠. 이번 시즌 지표들이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이제 달려 볼 타이밍입니다.”
“잠깐만요. 그런데 저 친구 공은 누가 받죠?”
“그것까지 지금부터 맞춰봐야죠.”
***
“지금 몇 개 구단에서 김을 노리고 있지?”
“공식적으로 관심을 보인 구단은 4개. 그리고 물밑으로 7개 구단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응? 물밑으로 움직이고 있다기엔 너무 정확한 숫자 아닌가?”
“특징이 너무 뚜렷하니까요.”
“특징?”
10월 초.
아직 메이저리그의 승패가 다 결정 나지 않은 이른 시간.
메이저리그에 포수들의 가치가 요동쳤다.
< 0.1%(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ps. 현실의 부산은행 상품은 2007년 시작입니다.
이 소설은 철저한 허구와 작가적 상상으로 쓰여졌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