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63화 (64/287)

< 0.1%(1) >

10월 2일.

사직구장.

마린스의 143번째 경기.

-딱!!

[이진섭!! 이진섭!!! 이진섭!!! 넘어갔습니다!! 홈런, 홈런입니다.]

[이진섭 선수, 지난 돌핀스 전에서 놀라운 수비를 보여준 이후 지금까지 정말 무서운 기세입니다.]

지난 돌핀스와의 경기. 진섭은 놀라운 수비를 선보이며 성민의 무패를 지켜냈다. 그리고 그것이 기폭제가 된 것일까? 이후 선발 출장기회를 얻은 진섭이 상상 이상의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승리를 견인하고 있었다.

5경기 16타석 13타수 4안타 0.308/0.438/0.813

그것은 비록 매우 적은 표본이었지만, 대약물시대 약을 빨고 신이 됐던 ‘약마’ 배리 본즈 부럽지 않은 성적이었다.

-젠장, 하필 시즌이 다 끝나는 막판에 이런 녀석이 등장하다니. 처음부터 김호섭 그 자식 자리에 저 녀석이 있었더라면 경기들이 그렇게 쫄깃할 이유가 없었을 것을.

“에이, 호섭이 형도 몇 경기만 떼어서 보면 저만큼 했던 적 있어요. 그리고 최근 4경기는 대진 운도 좋았잖아요. 상대에 외국인 투수도 없고.”

필 니크로의 이야기에 성민이 슬쩍 호섭의 편을 들어주었다.

-수비가 다르잖냐. 수비가. 아니 투수에서 이제 막 포지션 변경했다는 녀석이 왜 20년 가깝게 외야수 했다는 놈보다 수비를 잘하는 건데?

“수비야 뭐, 호섭이형은 안정적인 대신 여기저기 고장도 나고 늙어서 좀 범위가 좁은 거고, 진섭이 쟤는 젊은데 기세까지 타서 날아다니는 거죠. 이제 4경기라 티가 안 나는 거지, 경기 늘어나면 에러 꽤 할걸요?”

-아무리 그래도 김호섭 그 녀석보단 괜찮지.

“그거야 모를 일이죠. 타구 판단도 좋고 순발력도 좋긴 한데, 글러브질이 너무 안 좋아요. 삐끗하면 시즌 초반에 동엽이처럼 엉망 될걸요?”

성민은 진섭의 활약을 냉정하게 평가했지만, 마린스의 팬들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린스는 창단 이후 첫 단일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다투고 있었다. 전, 후기 리그이던 시절을 포함한다고 해도 무려 48년 만에 정규 시즌 우승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시즌 막판 4경기를 승리로 이끈 새파란 신인 외야수에 환호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맨날 하위권에서 노는 주제에 드래프트만 했다 하면은 망하더니, 드디어 제대로 된 녀석으로 하나 뽑았네.-

-마린스가 마지막 경기 앞두고 자력 우승 가능이라니. 내가 살아생전에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평생 마린스 우승만 바라시다가, 작년에 마린스가 준플옵 가는 거까지 보시고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스럽게 눈 감으셨는데. 아버지, 지금 하늘에서 보고 계십니까? 마린스가 1경기만 더 이기면 자력 우승이래요.-

-솔직히 이 정도면 우승하라고 전 우주가 도와주는 거다. 용병들은 전부 준수하고, 당장 내일이라도 메이저 가야하는 토종 선발 투수에, 신인 외야수가 미쳐 날뛴다? 이번에 우승 못하면 마린스는 앞으로 또 50년간 우승 못 함.-

-50년 받고 50년 더.-

-이제 설레발 그만 치자. 일단 내일 우리가 이겨야 우승이잖아.-

-응, 내일 선발 김성민 ㅅㄱ-

-내일 우리가 지더라도 재규어스가 지면 우승 아닌가요?-

-맞음, 재규어스가 이기더라도 우리도 이기면 우리가 우승이고.-

-내가 어지간하면 성민이 29경기 등판 24승 무패라는 미친 기록을 보존해주자고 주장하고 싶은데, 느낌이 선발 투수 24승 무패보다 마린스 우승이 더 희귀한 기록 같다. 괜히 무패 지켜주려다가 우승 실패하면 진짜 눈물 날 듯.-

-애초에 성민이도 깔끔하게 자기 손으로 우승 결정 짓고 싶을걸? 시즌 초반에 마린스 우승 그냥 다들 우스갯소리로 말할 때, 성민이만 존나 진지하게 이야기했었잖아.-

-29경기를 무패로 달린 투수다. 마지막 경기 자기 손으로 마무리 짓게 해주는 게 예의지.-

-맞아. 솔직히 김성민 없었으면 우승은 당연히 무리고 간신히 5위 경쟁이나 하고 있었을걸?-

-김성민이 던지고, 이진섭이 치면은 승리는 따논 당상이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진섭 본인이 이런 기대를 압박이 아닌 응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감독님, 어떻게?”

“어떻게 하기는. 지금 진섭이 잘하고 있잖아.”

“하지만 벌써 4경기 연속 선발 등판입니다. 본인도 흥분해서 페이스 조절도 제대로 안 되고 있고요. 자칫 잘못하다 실수라도 저지르면······.”

강용구 코치의 이야기에 공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 코치야.”

“네?”

“너, 애들 관리하느라 힘든 건 잘 아는데, 적당히 하자. 호섭이가 1년 동안 수고했고. 너랑 친하기도 하고, 걔가 진섭이 선배인 것도 잘 아는데 그런 거에 휘둘려서 쓰겠냐? 내가 너 파벌놀이 하는 거 냅두는 건, 그런거 컨트롤 하라고 냅두는 거지, 휘둘리라고 냅두는 거 아니다.”

과거 2023년. KBO는 1차 드래프트를 폐지했었다.

하지만 연고지 우선권은 KBO의 팀들이 팜에 직접적으로 투자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제도였다. 팜의 고등학교들은 불만을 제기했고, 불과 2년 만에 연고지 우선권은 부활했다.

1차 드래프트의 연고지 우선권을 통해 들어오는 선수는 보통 당 해에 가장 기대를 받는 선수들이다. 프로에 성공할 확률 역시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지연과 학연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곳은 드물다. 파벌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공 감독은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마린스 창단 이후 최초 정규 시즌 우승 아니냐. 거기다 이제 가을야구까지 다해도 고작 한 달도 안 남았다. 우리 이제 소꿉장난은 그만하고 전력으로 달려봐야 하지 않겠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인마, 감독 자리도 좋지만, 너도 선수 때는 못 끼워본 반지, 코치로라도 끼워봐야 하지 않겠냐?”

공 감독이 용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파이팅 해보자. 애들은 알아서 잘 관리하고.”

“네, 알겠습니다.”

강용구가 고개를 숙였다. 물론 공 감독의 말에 감화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창단 최초의 정규 시즌 우승을 앞둔 감독의 파워 앞에서 성골 프랜차이즈 출신 차기 감독이 유망한 코치라는 타이틀 따위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

-부웅

시원한 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자세만 보면 완벽했다. 하지만 방망이를 휘두른 당사자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적당히 해라.”

“선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구단 사무실에 볼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 너야말로 이 시간까지 웬 연습이야. 내일 시합인데 힘 다 빠지게.”

혁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뭐, 내일 경기 이기면 우승이라니까 이상하게 실감도 잘 안 나고 그래서요. 거기다가 저 4경기나 쉬었잖아요. 체력 아주 가득입니다.”

“타격이 마음에 걸리냐? 그래도 작년보다는 좀 나아졌잖아.”

“그래 봐야 1할 4푼인걸요. 선배가 유독 점수지원 박했던 것도 솔직히 거진 절반은 제 잘못이잖아요.”

“네 잘못은 개풀. 애초에 너클볼을 받을 수 있는 포수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행운이었어. 그리고 인마, 리그에 지금 100타석 이상 소화한 포수 중에서 1할 5푼 미만인 타자가 어디 너 하나냐? 무려 넷이다. 넷.”

“그 중 엘리츠 애들이 셋, 나머지 하나가 저죠. 게다가 엘리츠야 원석 선배가 부상이라 백업들이 돌아가면서 들어갔는데 전부 다 타격에서 망하는 바람에 그런 거잖아요.”

그걸 다 확인하고 살다니. 이런 꼼꼼한 자식 같으니. 성민이 멋쩍게 웃었다.

“선배 덕분에 올해는 30경기나 선발로 출장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내년부터는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또 어디서 너클볼 던지는 투수가 나타나길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성민이 차마 뭐라 답을 해주지 못했다.

혁준의 말이 옳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혁준은 1군에서 뛸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의 문제지.

필 니크로가 침울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도 너클볼 그렇게 받아내는 것 보면 동체 시력도 좋고, 순발력도 좋잖아요. 그 정도면 재능 있는 거 아닙니까.’

-타격은 동체 시력과 순발력보다 협응력의 문제지. 게다가 저 녀석은 동체 시력과 순발력이 좋은 바람에 어설프게 방망이를 틀어서 공을 이리저리 다 건드리잖아.

‘문제를 알면 뭔가 좀 도와주시던지요.’

-내가 타자냐?

‘어휴, 내가 이래서 잭 그레인키나 매디슨 범가너가 와주기를 바랬는데.’

-언제는 클레이튼 커쇼나 맥스 슈어저, 로저 클레멘스라며. 아니 그리고 애초에 걔들은 아직 쉰 살도 안 된 젊은 애들이잖아.

성민이 필 니크로의 말을 뒤로한 채 혁준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를 위로했다.

“인마, 입은 삐뚫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나 덕분에 30경기나 출장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네 덕분에 내가 너클볼로 리그를 폭파시킬 수 있었던 거야.”

“말씀 감사합니다.”

“내년부터는 이런 머리털 빠지는 공 받을 일 없으니까, 타격도 더 좋아질 거야. 그러니까 힘내라.”

위로하는 사람도, 위로를 받는 사람도 빈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다.

하지만 그 위로하는 사람이 KBO 최고의 투수, 아니 어쩌면 KBO 역사상 최고의 투수이자 이제 곧 메이저리그로 갈 사람이다. 혁준이 머리를 휘휘 털고 씩 웃었다.

“그러면 얼른 들어가서 쉬고. 우리 내일 우승하면 당분간 한국시리즈까지 시간 짱짱할 텐데 훈련은 그때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네!!”

10월 3일. 사직구장.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상대는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타격 생산성과, 가장 높은 장타율을 자랑하는 서울 브레이브스였다.

-브레이브스라 그리운 이름이로군. 왠지 야구를 매우 잘할 것 같은 이름이야.

“그런가요? 저는 왠지 161년 동안 우승 딱 세 번밖에 못 해본, 특히 최근 33년은 월드 시리즈 진출도 못 해본 팀이 연상 되는데요?”

-흥, 빌어먹을 테드 터너 개자식의 중계권 계약도 재작년에 끝났어. 브레이브스의 암흑기도 이제는 끝이야. 이제 다시 비상할 일만 남은 셈이지. 그래서 말인데······.

성민이 단호하게 필의 말을 끊었다.

“네, 안 갑니다. 전 빅리그는 야수들 짱짱하고, 뎁스가 두툼해서 불펜들이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그런 팀으로 갈 겁니다.”

-브레이브스도 그간 성적이 별로라서 팜 하나는 참 탄탄하지.

“거기 저도 조사했거든요? 드래프트 상위 라운드는 온통 파워 있는 타자 유망주만 뽑아서 수비는 엉망에 불펜은 맨날 어디서 주워오기나 하고. 솔직히 그 정도면 메이저의 마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 아닙니까?”

필 니크로가 크게 반발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린스라는 말은 너무 심하구나. 당장 사과해라!!

“아니, 마린스가 뭐 어때서요. 매일 틈만 나면 자꾸 우리 팀 까는데 솔직히 KBO에서 마린스 정도면 양반이거든요? 저희도 작년에 저 없을 때 준플레이오프까지 갔던 팀입니다.”

-1년에 에러만 140개씩 저지르는 팀이 정상은 아니지. 그것도 1년에 144경기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 말이야.

“아니, 그거야 뭐······. 그리고 140개 아니거든요?”

-그래, 137개.

성민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듣고 보니 그 부분은 확실히 제가 좀 잘못한 것 같네요. 사과드리죠.”

-그래서 브레이브스는?

“안 갈 겁니다.”

경기가 시작됐다.

< 0.1%(1) > 끝

ⓒ 묘엽

작가의 말

어느새 2020년도 한 달이 지나갔네요.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습니다.

2월의 시작은 기분 좋은 주말이네요.

다들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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