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틀(3) >
이진섭이 꿀꺽 침을 삼켰다. 프로 1군의 외야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그라운드에 섰던 순간은 승부가 결정 난 경기의 후반부였다.
7회 0:0.
마운드에 선 투수는 대기록을 만들고 있는 김성민이다. 만약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그 결과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진정하세요. 어차피 8회나 9회는 올라가지도 못할 거고, 기껏해야 이번 이닝이 끝일 텐데 침착하게 잘 막으면 됩니다.’
-성민아. 마린스가 1이닝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의 가짓수는 이미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영역에 도달해있다.
필 니크로가 뭔가 거룩한 표정으로 확신에 가득 찬 헛소리를 내뱉었다.
성민이 대답 대신 공을 움켜쥐었다.
9월의 끄트머리, 해는 이미 저물어 찬바람이 도는 날씨가 딱 좋다.
가을이라기에는 조금 쌀쌀? 아니 ‘춥다.’에 가까웠지만, 원체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 이 정도 날씨가 딱 맞다. 손만 곱지 않으면 된다.
타석에는 돌핀스의 3번 타자이자 돌핀스 타격의 기둥인 정태수가 들어왔다.
올해 35세. 26세에 포스팅으로 빅리그에 진출하여 6년을 뛰었다. KBO에서는 준수한 우익수였지만, 빅리그를 기준으로는 최소 수준의 역량을 보여주지 못해 결국 일루수로 뛰었다. 하지만 타격만큼은 빅리그에서도 중간 이상, 25인에 충분히 이름을 올릴만한 기량을 보여줬다.
그런 그가 전성기가 아직 남은 나이에 다시 KBO로 돌아온 이유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였다.
우선은 그의 수비가 일루수로도 수준 이하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일루수로는 평균 이상, 지명타자로는 평균 수준의 생산성을 보여주는 33세 타자에게 들어온 최고의 계약이 구단 옵션 2+1년 총액 800만 달러, 혹은 옵션 포함 단 년 400만 달러짜리에 불과했다.
물론 그로서는 단년 400만짜리 계약을 맺고 한 번 더 빅리그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KBO를 떠날 때만 하더라도 리그 최하위권을 전전하던 돌핀스는 그가 남기고 간 포스팅 피와 마침내 터져버린 김준성이라는 리그 최고 투수의 활약으로 KBO 정상을 넘보고 있었다.
그는 MLB에서도 뛰는 것보다 더 큰 돈. 그리고 고향 팀의 우승이라는 대의명분을 안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4년 120억짜리 타자가 타격 자세에 들어갔다.
어려운 투수다.
정태수가 빅리그에 있을 당시에도 저만한 투수는 흔치 않았다. 2년 전, 김준성이 빅리그행을 고민할 때, 그는 준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빅리그라······. 내가 생각할 때 너라면 충분히 통하기는 통할 거야. 뭐 전문가라는 것들이 네 속구 비중이랑 구속이니 회전수니 이야기하면서 KBO니까 네 속구가 통하지 MLB에서는 평균 수준밖에 안 되고 결정구가 막히면 투수는 통하지 않는다. 이런 소리를 지껄이지만, 내가 볼 때 네 속구는 충분히 통해.”
“그런가요?”
“그래, 디셉션도 워낙 좋고, 몸쪽으로 붙이는 공도 워낙 깔끔하게 잘 들어오잖아. 근데 말이야 문제는 오히려 슬라이더랑 체인지업 쪽이야. KBO에서야 속구 결정구로 써도 괜찮은데, 아마 빅리그 가면 그거 카운트 잡는 용으로 쓰게 될 거거든? 근데 그러면 너 결정구가 없어.”
메이저에서 5년. 약 700경기를 뛰고 돌아온 베테랑의 말에는 그 경험만큼의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면 내가 볼 때는 하위권 선발 경쟁이나 롱릴리프 정도? 뭐, 도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1~2년 정도 갔다 와도 금전적으로는 사실 크게 문제는 없지. 근데 넌 가족 생각하면 좀 애매하긴 하네. 이제 큰 애가 유치원 갈 나이 아닌가?”
“그렇죠.”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하지만 난 네가 나처럼 전성기를 헛꿈을 꾸면서 날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세금이랑 이런 거, 저런 거 하면 나도 그냥 한국에서 뛰는 게 더 벌었을걸? 그리고 거기서 뛰는 거 진짜 빡세다. KBO랑은 비교도 안 돼. 내가 생각할 때 거기서 뛴다고 내 선수 생명 한 2년은 줄었을 거다. 만약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절대 메이저 안 갈 거야. 그냥 한국에 남을 거다.”
물론 준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돌핀스의 우승 가능성 좌우할만한 일이기에 설득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메이저에서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중간함을 맛보고 돌아왔기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한국에 남는 선택을 할 것이라는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부웅!!!
“스트라잌!!”
97km/h 짜리 너클볼이 태수의 방망이를 완벽하게 속였다. 타석에서 잠시 벗어난 태수가 욕을 내뱉었다.
“Shit!!”
빅리그에서 그럭저럭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타자는 에이스급 투수들에게는 무기력하게 당하더라도, 어중간한 투수들만 잘 두들겨 패면 그럭저럭 성적을 거둘 수 있기 마련이다. 빅리그 시절의 태수가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정확히 그가 두들겨 패던 투수들의 수준을 아슬아슬하게 넘어선 곳에 있었다.
태수가 자신의 멘탈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속구는 공략해 볼 만해.’
두 번째.
성민이 와인드업했다.
속구의 타이밍에 맞춰 방망이를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 태수의 감각이 소리쳤다.
늦다.
얼마나 늦나?
보통 사람이라면 감각 하기 힘든 미세한 차이. 아니 어쩌면 그냥 그걸 느낀다는 것 자체가 태수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저 둘 중 하나를 찍는 도박일지도. 태수의 감각이 성민의 공을 빠른 너클볼이라 인식했다.
코스는?
존을 통과하는 공이다.
그의 몸이 방망이를 조절했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배트 컨트롤이다. 빅리그에서도 가장 방망이를 잘 다루는 포지션은 지명타자다. 그리고 3년 전의 태수는 그 가운데서도 평균치는 하는 타자였다.
그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쫓았다.
-딱!!
물론 완벽히 힘이 실리지는 못했다. 낮게 깔린 타구가 3 유간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태수가 빠르게 일루로 달렸다.
가볍게 달려 나와 공을 잡은 박동엽이 일루를 향해 힘차게 공을 던졌다.
-뻐엉!!
박태경이 무사히 공을 받아냈다. 하지만 조금 멀었다. 박태경보다 윙 스팬이 14cm 긴 현정현이었다면 아마 베이스를 밟은 채로 받을 수도 있었을지 몰랐다. 박태경의 발끝이 일루에서 조금 떨어졌다.
“아, 시발.”
무사 주자 1루.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놈 같으니.
‘에이, 그래도 1루 내야 관중석에 안 집어 던진 게 어딥니까. 시즌 초랑 비교하면 많이 발전했네요.’
-그래, 이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은 발전이지. 망할. 이딴 게 또 안타로 기록되겠지.
성민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숙이는 동엽에게 괜찮다 손짓했다. 타구의 방향이 안 좋았다. 너무 깊숙했다. 애초에 저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동엽이 아닌 삼루수가 받아내야 하는 공이었다. 하지만 본래 일루를 보던 현정현의 좁은 수비 범위로는 무리인 공이기도 했다.
게다가 잘 받아냈다고 해도 KBO를 기준으로 애초에 동엽의 어깨가 아니었다면 무조건 안타가 될만한 타구이기도 했다.
타석에 돌핀스의 4번 타자가 들어왔다.
성민의 공이 그를 농락했다.
빠른 공, 느린 공, 더 느린 공.
그리고 다시 존을 빠져나가는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몇몇 전문가들은 성민이 주자를 내보낸 직후 더 강해진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완급을 조절해가면서 던진다는 의미다. 완전한 헛소리는 아니었다. 한 경기 100구 이상의 공을 던지는 과정에서 모든 공을 전력투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려운 타자를 상대로는 조금 더 힘껏 던지고, 그게 아니라면 조금 쉬어갈 때도 있다.
물론 방금 정태수처럼 전력을 다한다고 무조건 안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력을 다하는 성민의 공은 한층 더 매섭다.
이어지는 5번 타자 애셔 스미스 역시 5번째 공에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다. 사실 존을 살짝 빠져나가는 공이었는데 심판이 용병 타자라고 존을 좀 널널하게 적용했다. 얼굴이 벌게진 애셔가 뭐라 뭐라 욕을 중얼거리며 덕아웃으로 돌아갔지만 아무도 신경은 쓰지 않았다.
-네 기준대로면 좋은 심판이로군.
‘그러게요. 다음 설에는 참치 세트 말고 홍삼으로 보내야겠어요.’
-망할 자식.
투아웃 주자 1루.
에러인지 아닌지 오묘한 수비로 선두타자의 출루를 허용했지만, 경기는 여전히 안정적이다. 타석에 6번 타자가 들어왔다.
공기가 차다. 1루 주자 정태수가 자신의 양팔을 비볐다. 그의 시선이 성민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녀석은 분명 당장 메이저로 꺼졌으면 싶은 대단한 투수다. 하지만 메이저의 그 대단한 리그 에이스들도 항상 완벽하지는 않다. 완벽한 피칭을 보이던 날에도 가끔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성민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한국에서는 그 어처구니 없는 실수조차도 제대로 공략해낼 타자가 드물기에 저런 터무니없는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뿐이다.
쌀쌀함을 넘어 추워지는 날씨. 손끝의 감각이 조금만 둔해진다면, 그래서 한 번만 실수를 저지른다면. 너클볼이 배팅볼이 돼준다면.
성민의 120km/h 너클볼이 존을 공략했다.
-부웅!!
“스트라잌!!”
두 번째 같은 공.
-부웅!!
“스트라잌!!”
그리고 세 번째. 성민이 더 느리고 더 격렬하게 춤을 추는 공을 준비했다.
‘아!!’
정태수가 바라던 수준의 배팅볼은 아니었다.
성민의 손끝은 아직 곱지 않았고 감각은 선명했다. 이것은 단지 시즌 막판 일곱 번째 이닝에 흔히 있을 수 있는 근력의 문제에 가까웠다.
더 느린 공은 맞았지만, 더 격렬하게 춤을 추지는 않았다.
시속 98.1km/h 그리고 2.8번의 회전수.
돌핀스의 일곱 번째 타자가 그 공을 두들겼다.
우측 외야로 쭉 뻗어 나가는 공.
홈런이 될 만큼 빠르고 강한 타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코스가 좋다. 정태수가 달리기 시작했다.
정태수가 간절하게 바랬다.
1점만.
부디 1점만.
김성민은 MLB에서도 통할 수 있는 괴물이다. MLB를 기준으로 해도 65점? 70점은 될 것이다.
김준성은 MLB에서 통할지 아닐지 모호한 투수다. MLB를 기준으로 한다면 50점이나 될까?
하지만 KBO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김성민이 80점짜리라면 김준성 역시 75점? 70점은 된다.
MLB가 아닌 KBO의 무대라면 운 좋게 1점만 낼 수 있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리고 행운 역시 그들의 편일 것이다. 정태수가 그렇게 믿었다.
애초에 자신의 출루 역시 마린스의 수비 조정 덕 아니었던가.
우측 광활한 외야.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고3까지 무려 10년 동안 마운드를 지켰던 투수 출신의 외야수가 달리기 시작했다.
많은 야구팬이 수비는 노력, 타격은 재능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장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타격은 재능도 재능이지만, 기술의 중요성 역시 만만치 않다. 그리고 기술은 노력의 영역이다.
수비에서 글러브질은 기술이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단련된다. 하지만 순간적인 타구 판단. 그리고 어떤 선택이 가장 올바른 선택인지를 이미지할 수 있는 센스. 그리고 순발력과 운동능력까지.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타고난 재능, 그리고 툴의 영역이다.
이진섭은 아직 외야수로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김호섭보다 빨랐고, 김호섭보다 센스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김호섭보다 과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린스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공의 방향을 살피고, 낙구 지점을 예측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작정 달렸다. 마지막 순간 슬쩍 고개를 돌려 공을 훑었다.
하늘을 날아오는 빠른 타구를 순식간에 포착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동체 시력은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행운? 혹은 재능? 이진섭이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
다섯 걸음. 그가 과감히 몸을 날렸다.
-톡
진섭의 손끝에 느낌이 왔다. 글러브의 볼 집에 공이 걸렸다.
그 경악스러운 장면에 한순간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미친?
미친 듯이 달려가던 정태수가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섰다. 터무니없는 수비다.
-아니, 그러니까 시즌 내내 우익수 때문에 고통받았는데 한 경기 남기고 저런 애가 올라왔다고?
오늘 경기, 정태수의 바람과 달리 행운은 마린스의 편이었다.
29경기 선발 등판 24승 무패.
성민이 KBO 역사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어떤 투수의 83년 60등판 44선발 30승(28선발승) 이후 가장 많은 선발승을 기록했다.
< 타이틀(3) > 끝
ⓒ 묘엽
작가의 말
헷갈린다는 분이 많아서 김민성 =>김준성으로 이름 수정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