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61화 (62/287)

< 타이틀(2) >

-뻐엉!!

시원한 속구가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대단하군. 숨김 동작이 좋아. 저렇게 끝까지 공을 끌고 나오면 실제 구속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지지. 저 정도면 롱릴리프, 아니 당장 하위권 선발 경쟁도 가능하겠어.”

밝은 금발의 사내, 빅터 오르트만이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영상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 친구는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김준성입니다. KBO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투수죠. 아마 책상 속을 잘 살펴 보시면 제가 올린 보고서도 몇 장 나올 겁니다.”

지구 반대편의 부하 직원이 비꼬는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가 질문을 이어갔다.

“김준성이라. 오늘 자네가 보러 간 친구랑 이름이 비슷하군. 형제? 친척?”

“아뇨, 그냥 이 나라의 20%가 김 씨라서 그렇습니다. 이름은 뭐 우연의 일치인 듯하군요.”

“그래서 저 친구는 나이는 어떻게 되지? 27? 28? 여긴 FA까지 좀 길다고 하던데 몇 년이나 남았어?”

“나이 많습니다. 33살이고 이미 FA 자격을 얻어서 2년 전에 4년 천백만 달러짜리 계약을 맺었죠.”

“4년에 천백만? 좀 아깝군. 그 정도면 우리도 긁어볼 만한데 말이야.”

“그래서 제가 강력하게 추천했었죠. 본인은 KBO에 계속 뛰겠다고 했었지만 아마 2년 1,000만 달러 정도면 충분히 데리고 올 수 있었을 겁니다. 저희도 계약 기간이 짧은 만큼 리스크도 적었고요.”

빅터 오르트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차피 2년 전에는 롱릴리프나 하위권 선발 하나 더 보태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어. 쓸데없는 돈이었지. 뭐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아쉽게도 시기가 맞지 않는군. 그런 의미에서 김성민? 그 친구는 참 느낌이 좋단 말이지.”

“문제는 그 좋은 느낌 단장님만 갖고 계신 게 아니라는 부분이죠.”

“자네는 참 다 좋은데 너무 건방져.”

“이틀이나 퇴근도 못 했는데 손에 다음 날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받으면 누구나 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고생했다고 무료로 해외여행에 야구관람까지 시켜주다니. 직원복지가 끝내주는 회사로군.”

“어차피 영상이랑 데이터로 충분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 건 자네 본인이야.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응? 그런 것까지 다 하려면 나 아니면 자네밖에 없는 거 잘 알잖나.”

“젠장, 내년 연봉 협상 기대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아주 톡톡히 받아낼 겁니다.”

***

마운드에 김준성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개막전에서 마린스를 상대로 승리할 때만 하더라도 이번 시즌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남은 경기는 여섯 경기.

재규어스와 마린스가 남은 경기를 모두 패배하고 돌핀스가 남은 경기를 모두 승리하지 않는 이상 정규 시즌 우승은 이미 물 건너갔다.

하지만 KBO에서 진정한 우승은 정규 시즌의 우승이 아니다.

한국시리즈.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는 2위인가 3위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하느냐, 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하느냐는 선수단의 피로도가 다르다.

타석에 3번 타자 박태경이 들어왔다.

9월의 끄트머리.

쌀쌀해져 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149.7km/h의 빠른 공이 홈플레이트를 시원하게 갈랐다.

이어지는 속구, 속구, 그리고 체인지업.

-부웅!!

“스트라잌!! 아웃!!”

1회 초, 삼자 범퇴.

성민이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그를 바라보는 준성의 시선이 복잡했다. 사실 본래부터 포텐셜은 있는 녀석이었다. 무려 16년 만의 고졸 신인 10승 신인왕이었으니까. 다만 그 포텐셜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현대의 한국 야구에서 80년대에나 나올법한 기록들을 끄집어내는 수준이라니.

‘녀석이라면 어쩌면.’

KBO 최고의 투수 김준성.

조금 우스운 타이틀이다.

야구에는 명백하게 리그간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리그간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21세기에, KBO 최고의 투수라는 말은 찬사인 동시에 MLB를 가지 못한 투수라는 멍에다.

준성 역시도 야구선수인 이상 빅리그에 대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기 그와 경쟁했던, 그러나 그보다 먼저 두각을 나타냈던 선수들의 빅리그 진출이 실패로 끝났다. 그에게 제시된 금액은 크지 않았다.

‘아니, 다 변명이지.’

사실 KBO에 남는 것보다 조금은 더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일찍 결혼한 부인, 두 명의 아이. 오직 자신의 꿈을 위해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던지기에 그가 짊어진 것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저 녀석이라면 다를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뤘다.

선발 투수가 따낼 수 있는 4개의 타이틀을 모조리 석권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80년대의 기록들과 지금까지 기록된 적 없는 기록까지 목전에 두고 있다.

게다가 녀석의 저 뻔뻔한 성격을 생각한다면 미국에 가서 적응에 실패할 것이라 믿기 힘들다.

“그래도 호락호락 져줄 수는 없단 말이지.”

실패 없는 무결함으로 빅리그에 도전하는 것도 멋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리 실패의 쓴맛을 보여주는 것 역시 나쁠 것 없다.

오늘 경기, 절대 점수를 내주지 않겠다. 준성이 강하게 결심했다.

“준성아 뭐해?”

“어?”

“수비해야지.”

맙소사.

준성이 잠깐 결심 좀 하는 사이 돌핀스의 공격이 끝났다. 준성의 시선이 잠시 기록지에 머물렀다.

초구 내야 땅볼, 2구째 파울 플라이 아웃, 4구 헛스윙 삼진.

아무래도 단단히 각오한 것은 준성만이 아닌 듯 싶었다.

경기가 계속됐다.

-예전에도 한번 봤지만, 정말 괜찮은 투수야.

‘준성 선배야 뭐. 최동원 상만 두 번을 수상한 KBO 최고의 토종 투수 아닙니까. 솔직히 저 선배 정도면 어지간한 팀이면 25인에도 충분히 들어갈 만한 투수라고 생각합니다.’

-뭐, 속구도 저만하면 평균 이상은 되는 것 같고, 털릴 때 멘탈 관리가 되느냐가 관건이겠군.

‘나름대로 암흑기도 좀 있었던 선뱁니다. 국가대표도 꽤 했는데 입단하고 12년만에 첫 FA 받은 선배에요. 멘탈 단단하죠.’

-그런데 왜 빅리그를 안 간 거야?

‘뭐 선수들이 전부 빅리그에 도전해보는 걸 목표로 하진 않잖습니까. 결혼도 했고 애도 있고 돈도 빅리그 못지않게 준다고 그러면 남을 수도 있죠.’

-너는?

‘전 이야기가 다르죠. 저 선배야 팀에 따라서 잘하면 25인 간당간당한,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자원이었으니까 KBO에서도 사이즈 나오는 금액인 거고, 전 덩치가 다르잖습니까.’

-네 입으로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면 조금 부끄럽지 않냐?

‘전혀요. 전부 사실인걸요.’

필 니크로가 혀를 찼다.

KBO에서 뛰는 동안 자신감이 붙은 것은 좋지만 슬슬 조금 과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눈으로 볼 때 성민은 아직 부족했다. 물론 그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빅리그는 KBO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만큼 가혹하다.

또한, 실패를 모르는 투수는 작은 실패에도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손쉽게 무너질 수 있다. 물론 성민은 과거에 큰 실패를 경험해봤다. 하지만 필이 옆에 붙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대단한 투수전으로 경기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벌써 5회 초. 양 팀 합쳐서 지금까지 출루에 성공한 선수는 고작 세 명이 전부입니다.]

[그야말로 KBO를 대표하는 에이스 간의 자존심 대결.]

-딱!!

[말씀드린 순간, 박동엽!! 높게 뜬 타구!! 아, 하지만 방향이 좋지 못합니다. 좌익수 정면!! 아웃입니다.]

[타구질이 상당히 좋았는데요. 아쉽네요.]

준성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래서 한 방이 있는 타자는 무섭다. 스윗 스팟을 벗어난 공이었는데도 뻗어 나가는 힘이 다르다.

그가 좌익수를 향해 가볍게 감사를 표했다.

경기가 계속됐다.

점수가 터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치열한 투수전.

고작 1시간 41분이 지났음에도 벌써 경기는 7회에 접어들었다.

0:0

타순은 이미 두 바퀴를 돌아 세 번째.

아무리 상대가 마린스라고 해도 세 번째 타순은 조심해야 한다. 직전 이닝에도 1점을 내줄 뻔했다.

‘오늘은 1점도 내주면 안 돼.’

상대는 시즌 종료까지 단 두 경기를 남겨뒀음에도 여전히 0점대 평자책을 기록 중인 괴물이다. 평균자책점 2위인 준성 자신과 무려 1.61점이나 차이나는 기록이다.

가볍게 호흡한 준성이 피칭을 이어갔다.

덕아웃의 공필승 감독이 고민했다.

오늘 김준성이 잘 던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마린스의 타선이 그를 공략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즌 144경기 중 139번째 경기다. 확장 엔트리를 통해 두 명의 선수가 수급됐지만, 막판까지 우승 경쟁을 하느라 주전 야수들이 너무 심하게 혹사당했다.

당장 박태경만 하더라도 포수로 뛰지 않는 경기에서는 휴식을 주는 것이 좋았음에도 굳이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을 했다.

‘용철이? 진섭이?’

둘 다 타격에 재능이 있는 유망주들이다. 이번 한 달 승패가 거의 결정된 경기 후반에 대타로 출장해서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단지 문제는 수비다. 용철이 포수 수비가 엉망인 거야 유명하다. 게다가 오늘 경기는 성민이가 선발인 경기다. 용철이를 대타로 쓴다면 수비에 구멍이 너무 커진다.

이진섭의 경우는 프로에 입단한 이후 팔에 문제를 발견하고 야수로 전환했다. 학창 시절 종종 외야수도 봤었다지만 여전히 수비 실력이 부족하다.

-보통이라면 7회까지 1점도 못 내는 무능한 야수 놈들을 욕해야겠지만, 왠지 오늘은 7회까지 에러 하나 저지르지 않은 것을 칭찬해주고 싶은 기분이로군.

말을 내뱉은 필 니크로가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이제 슬슬 마린스에서 뛸 마음의 준비가 끝나신 것 같군요. 천국 갔다가 다시 내려오시면 마린스의 투수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차라리 지옥을 선택하겠다.

공필승 감독이 선택했다.

오늘 김준성은 속구가 매우 좋다. 대부분 타자들이 그의 속구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있다. 김준성 본인도 그것을 알아 힘으로 윽박지르는 피칭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 중 속구에 더 강한 타자는 이진섭 쪽이다.

“진섭아 준비해라.”

“넵!!”

2사 주자 1루.

이진섭이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의 김준성이 공을 움켜쥐었다.

그는 속구 위주로 피칭을 가져간다. 오늘처럼 공에 힘이 붙는 날에는 속구의 비율이 거의 70%를 넘어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상대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는 투수라는 말은 아니다.

‘이진섭이라.’

이번 9월 1군에 확장 엔트리로 올라와 지금까지 7경기 11타석 10타수 3안타 1볼넷. 표본이 너무 적다. 하지만 김준성의 머릿속에 있는 진섭의 성적은 1군 성적이 다가 아니다.

퓨처스 리그에서 그가 최근 2년 간 거뒀던 성적과 그의 스타일에 관한 자료가 준성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초구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살짝 몸쪽으로 더 붙었지만 괜찮았다.

그가 2년 동안 퓨처스에서 기록한 홈런은 총 24개. 그중 17개가 몸쪽 높은 코스를 잡아당겨 만든 홈런이다.

성공의 경험은 습관을 만든다. 조금 몰리는 공에도 방망이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부웅!!

“스트라잌!!”

다시 말하지만, 김준성은 속구를 위주로 가져가는 파이어볼러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이진섭은 투수로 프로에 입단해서 야수로 전향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다. 강점과 단점이 뚜렷한 타자다.

-부웅!!!

“스트라잌!!”

체인지업.

그리고

-부웅!!!

“스트라잌!! 아웃!!”

또다시 체인지업.

김준성이 삼진을 잡아냈다.

7회 말.

마린스의 수비 이닝.

-누가 점수를 바랬어? 내가 많은 걸 바랬냐고. 대체 왜? 나에게 왜 이러는 건데?

야수들의 위치 조정.

그리고 필 니크로의 절규와 함께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 타이틀(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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