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틀(1) >
가끔 메이저의 벤치클리어링을 보면 팔뚝이 사람 머리만 한 남자가 홀로 서너 명을 때려잡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국의 벤치 클리어링 역시 구도만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장르가 조금 다르다. 메이저의 벤치 클리어링이 현실적인 검투사 물이라면 한국의 벤치 클리어링은 일종의 슈퍼 히어로 물이다.
다만 cg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다.
박태경이 한 걸음 쓱 걸어갔다.
피닉스의 선수들이 한 걸음 쓱 물러났다.
박태경이 손바닥을 쫙 펼쳐 흔들었다.
마치 장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피닉스의 선수들이 화급히 뒤로 물러난다.
“마, 그만해라. 정현이 너도 그만하고. 진철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잖냐.”
“실수요? 아니 실수를 했으면 사과를 해야 그게 실수죠.”
장진철이 발끈했다.
“이 새끼, 이거 선배한테 싸가지 없이 구는 것 좀 봐라. 야 박태경. 넌 후배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시퍼런 후배 새끼가 위아래도 없이 이렇게 날뛰는 거냐? 내가 진짜 애들 앞에서 쪽팔리게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이 새끼는 오늘 좀 제대로 교육해놔야겠어.”
“새끼이? 내가 왜 형님 새낍니까. 그리고 자, 잘못 따지는데 선배 후배가 왜 나옵니까?”
목에 핏대를 높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박태경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둘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의외로 쉽게 떨어진다. 사실 두 사람도 자존심에 아득바득하고 있긴 하지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성인이다. 홧김에 멱살은 잡았지만, 그 이상 나가기엔 좀 그렇다.
“진철아, 솔직히 머리 쪽에 던지고, 바로 빈 볼 던진 건 정현이도 화낼만하지. 옆에서 보면 네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알지만, 원래 당사자가 되면 몰라. 그리고 정현이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 옛날에 호빵이나 사 오던 걔가 아니다. 이제. 대우 해줘야지.”
“대우는 무슨. 그리고 아니, 누가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정현이 너도 그래. 설마 진철이가 너한테 일부러 빈볼을 던졌겠냐. 지금 상황에서. 손에서 공 좀 빠진 거로 와서 선배 멱살잡이하고 그러면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아니, 그래도 빈볼을 던졌으면 고의가 아니면 최소한 모자 정도는 벗어줘야······.”
태경이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내가 나중에 자리 하나 만들 테니까 앙금은 그때 풀고, 일단 오늘은 남은 경기하자. 어? 사람들 기다린다.”
벤치 클리어링이 싱겁게 끝났다.
“그러면 저녁 야식은 두부 두루치기에 수육으로 먹자.”
“항상 가던 거기?”
“아니, 거기는 얼마 전에 문 닫았고, 내가 다른 곳 뚫어둔 곳이 있어.”
“그래?”
“야야, 벤치 클리어링 끝났다. 나머지는 이따 끝나고 이야기하자. 내가 전화할게.”
“그래, 아 근데 난 오늘 경기 수훈선수 인터뷰할 수도 있으니까 좀 늦을 수도 있어.”
“어우, 재수 없어.”
“내가 쏘는 건데?”
“그래, 그러면 인터뷰 잘하고, 내가 식당 예약까지 싹 끝내놓고 연락하마.”
성민과 수현의 대화도 끝났다.
경기가 이어졌다.
벤치 클리어링 한 번으로 팀이 으쌰으쌰해서 경기의 내용이 뒤집히고 어쩌고 하는 판타스틱한 일은 없었다. 애초에 벤치 클리어링 자체가 팀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는커녕 양 팀 간의 화합을 돈독히 하는 느낌으로 끝났다.
게다가 오늘 마운드에 올라온 괴물을 상대하기에 피닉스의 타선은 너무 약했으며, 심지어 그 약한 타선을 자체적으로 다운그레이드까지 시켰다.
-야, 근데 쟤들은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냐?
‘아까 선발로 올라왔던 걔랑 비슷한 논리죠. 1군 경험.’
-경험도 수준이 맞아야 쌓이지. 쟤들은 거의 교육리그 보내야 하는 수준인데?
‘툴은 좋잖아요. 툴은.’
-어휴, 그놈의 툴. 박동엽만 해도 충분히 괴로웠는데 쟤들은 걔만도 못하잖아.
필 니크로가 죽어서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경기가 완벽히 기울어버린 후반, 피닉스가 대타로 올린 타자들의 수준은 그 정도였다.
[7이닝 무실점 8삼진. 2피안타!! 김성민 시즌 22번째 승리 수확!!]
[마린스와 피닉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벤치 클리어링.
‘사진 자료’
오늘 경기의 선발이었던 김성민 선수와 피닉스의 불펜 김수현 선수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시즌 막판, 1위를 다투는 마린스와 꼴찌를 다투는 피닉스의 격화 된 감정싸움.]
[마린스 팬들에게는 가장 아찔했던 순간. 김성민 선수에게 다가가는 김수현 선수.]
-현정현 저 돼지 새끼는 하여간 뭐만 하면 일단 달려나가고 본다니까.-
-근데 이번에는 좀 빡칠 만했음. 빈볼도 원래 머리에 던지는 건 위험해서 안 하는 건데, 좀 아슬하게 던졌었고, 그 뒤로 또 엉덩이에 맞췄잖아.-
-장진철 공은 워낙 똥볼이라서 헤드샷 맞아도 끄떡없음.-
-근데 둘이 원래 사이가 별로인가? 왜 경기 잘하다가 헤드샷을 노리고 그러는 거지? 경기에 뭐 문제 있었음?-
-아니, 그냥 장진철이 선배라고 꼬장부린 듯. 실투였던 것 같은데 사과 안함.-
-원래 야구는 빈볼 같은 거 던져도 사과 안 함. 그런 것도 다 전략의 일환이야.-
-그건 메이저 이야기고. 조선 야구는 원래 후배가 선배한테 빈볼 던지면 90도. 선배가 후배한테 빈볼 던지면 모자 벗는 게 국룰이다.-
-그러면 장진철 탈모 와서 모자 안 벗었다가 사건의 진상인 듯.-
-탈모면 인정이지.-
-근데 벤치 클리어링에 선발이 왜 나감? 난 김성민 달려나가는 거 보고 존나 쫄았음. 다른 애들은 다 다쳐도 우리 성민이는 다치면 안 돼.-
-벤치 클리어링에 안 나가는 게 원래 다음 날 선발 정도뿐일걸? 다른 애들은 다 나가야 함.-
-조선 야구에서는 다음 날 선발도 짬밥에 따라 일단 벤치 클리어링에 참여한다. 근데 쫄 필요는 없어. 어차피 선비답게 뒷짐 지고 에헴 하면서 대화로 해결하거든.-
-근데 성민이는 진짜 열 받은 것 같던데? 사진 보면 표정 존나 살벌함.-
-맞아. 김수현도 인상 쓰기는 하는데 좀 쫄은 티가 난다.-
어린 나이에 성공했던 프로야구선수인 성민에게 진짜 친구는 드물었다.
그렇기에 맹물과 음료수만으로도 수현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흐, 새끼.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인마, 너는 잘 될 줄 알았어.”
“어디 그 말을 너만 했었냐? 내가 인마 16년 만에 고졸 신인 10승 투수. 2026년 아시안게임의 영웅 김성민이야.”
“그래 2026년 9월 둘째 주 우먼 주간 특집 이슈 사윗감 삼고 싶은 남자 3위 김성민. 내가 너 잘난 거 잘 알지.”
수현과 성민이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어떻게든 FA 대박 한 번은 내고 은퇴하자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넌 이제 고작 4경기 남았네.”
“4경기는 무슨 4경기냐. 우린 ‘가을 야구’라는 것이 남았다고. 하긴,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겠네.”
“어우, 누가 들으면 가을 야구 좀 해본 놈인 줄 알겠다? 지도 이번이 처음이면서.”
“네가 FA까지 이제 3년 남았나?”
“어, 정확히는 2년하고 27일인데, 내가 뭐 어디 국가대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3년이라고 봐야지.”
“이번 시즌 던지는 거 보니까 좋더라. 보니까 선발도 노려볼 만 하드만.”
“됐어. 내 깜냥에 선발은 무슨. 게다가 이번에 꼴찌 하면 팀 성적 핑계로 연봉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아니냐.”
한숨을 내쉬는 수현. 성민이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이 자리 내가 내기로 했으니까 연봉 걱정하는 척하지 마. 너 인마 올해 연봉 나랑 별로 차이도 안 나잖아.”
“티 났냐?”
“하여간, 장가 일찍 가더니 아주 더럽게 짠돌이가 됐어.”
“인마, 너도 장가가고 애 낳고 해봐라. 아주 죽겠다.”
“벌이도 많은 놈이 무슨 엄살이야. 인마 우리가 벌이 가지고 엄살떨면 대한민국 사람 99%가 욕해요.”
“미래가 불안하잖냐. 미래가. 거기다가 아예 너처럼 벌면 몰라도, 나 같은 수준은 세금 떼고 의료보험 떼고, 국민연금 떼고 나면 노후를 걱정해야 한다니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새꺄. 하여간 야구만 하는 놈들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현실 감각이 없다니까. 인마, 야구선수 15년 만에 남들 대기업에서 30년 꼬박 일하는 만큼 벌면서. 걱정은 무슨. 쓸데없이 은퇴하고 사업한다고 말아먹은 선배들 보면서 노후 걱정하지 말고, 어디 연습실이나 하나 차리고, 야구 강습이나 하면서 모아둔 돈 까먹으면서 그렇게 살아. 아니면 남은 기간 더 열심히 해서 어디 코치 자리나 하나 구하던지.”
성민의 잔소리에 수현이 사이다를 들이켰다.
“하여간, 잘 나가는 놈이 잔소리하니까 더 재수 없네. 거기다가 또 맞는 말이라서 더 짜증이 나요. 이모, 여기 수육 중 짜리랑 두루치기 포장 좀 해주세요.”
“갑자기 뭐야?”
“뭐긴, 돈도 잘 버는 놈이. 형수랑 조카들한테 고기 좀 사준다고 생각해.”
“올해 연봉은 거기서 거기잖아.”
“지금까지 총소득에서 비교가 안 되잖냐. 1년 차부터 빵 떠서 혼자 잔뜩 벌어놓고는. 거기다가 FA로 수백억 챙길 놈이 쪼잔하게 4만2천 원에 나랑 척 질 거야?”
그 기죽지 않는 뻔뻔함에 성민이 웃었다. 중학교 시절 함께 야구를 하고, 서울로 유학을 갔던 이 친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뻔뻔했다. 그리고 이런 뻔뻔함이 있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친한 친구로 남을 수 있었다.
“가서 제수씨한테 꼭 내가 샀다고 전해라. 알겠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나중에 미국 가기 전에 한번 놀러 오고. 애들도 너 보고 싶다고 그러더라.”
“애들이? 하긴 내가 원래 애들이랑 어머님들한테 인기가 좀 많지.”
“지랄, 그때 네가 사줬던 게임 그거 있잖아?”
“아, 기억난다. 그거 재밌었지.”
“애들이 8개월 걸려서 네가 기록하고 갔던 최고 기록 깼다. 그래서 그거 자랑할 거라고 너 보고 싶다고 난리야.”
“그래? 그러면 이번에 또 가서 다시 한번 기록을 깨줘야겠구만. 이거 승부욕이 불타는데?”
선배와 후배, 혹은 그냥 아는 사람이나 인생에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다.
이제 친구라기에는 너무 멀어져 그냥 알았던 사람도 아니다.
성민의 몇 안 되는 진짜 친구와의 저녁이 끝났다.
9월이 무르익었다.
잠깐 선선한 가을이 찾아오나 싶더니 어느새 가을이라기에는 너무 추운 바람이 불어오는 9월의 끄트머리.
성민은 하나의 승리를 추가했고, 한 번의 경기를 노디시전으로 끝냈다.
28경기 23승 무패.
사실상 다승, 승률, 평자책, 탈삼진 4관왕은 확정이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마린스가 코리안시리즈 1위로 직행할 것인가. 그리고 김성민은 무패로 시즌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인가에 쏠렸다.
-아, 이걸 또 이렇게 대진을 잡아버리네. 공 감독 이새끼 생각이 있긴 한 건가? 이 새끼는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도 모르나? 거기다가 솔직히 한 경기 뒤로 미루는 정도는 비난받을 것도 아니잖아.-
-맞아, 솔직히 지금 아니면 무패 선발 투수가 언제 또 나올지 모르는데 한 경기 뒤로 미루는 게 맞았다고 본다.-
-근데 지금 마린스랑 재규어스랑 빡빡하게 순위 경쟁 중이잖아. 그리고 성민이 여기서 등판 뒤로 미뤄버리면 한 경기 등판 못 하는 거고.-
-맞다. 그리고 무패 선발 투수도 어렵겠지만, 마린스 정규 시즌 우승도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거든? 근데 시발 왜 말하면서 눈물이 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하필 여기서 수원 돌핀스 김준성이랑 맞대결을?-
-김준성, 좋은 투수 인정. 하지만 우리 성민이에 비하면 별거 아님.-
-별거 아니기는. 김성민이 압도적이라 좀 빛이 바라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준성 리그 2위 투수임. 쟤도 긁히면 9이닝 무실점 이런 것도 가능한 애라고. 게다가 마린스랑 돌핀스 야수들 비교하면. 답 나오지.-
돌핀스와 마린스.
수원 돌핀스파크에서 경기가 시작됐다.
< 타이틀(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