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치클리어링(ver. KBO) >
‘좌완 파이어볼러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리고 와야 한다.’라는 유명한 격언처럼 김병석은 드래프트 1라운드 최상위에 랭크되기 충분한 재능을 지닌 투수다.
당시 김병석 대신 백도형을 선택했던 마린스는 ‘이번에도 그놈의 부경고냐. 더러운 팀 파벌 같으니.’라는 욕설을 어마어마하게 먹어야만 했었다.
“솔직히 그때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아시잖아요. 전 도형이 말고 김병석이 추천했던 거. 도형이 추천한 건, 성지수 그 자식이잖습니까.”
“알지, 내가 잘 알지.”
“솔직히 전 도형이도 좋은 투수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병석이는 급이 다르다고 생각했거든요. 몸도 아직 다 안 커졌는데 150에 가까운 공을 뿌렸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야 아직은 모르는 거죠. 이제 2년 지났는데. 병석이도 도형이도 한참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저 둘이 대졸 투수라고 가정하고 지금 당장 드래프트한다면 누굴 선택하겠냐고.”
박경효가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백도형이요.”
“흐, 그래도 보는 눈은 남아있군. 여기서 병석이의 이름을 대지 않는 걸 보니 말이야.”
“2차 드래프트 때문에 2군 경기만 수천 타석을 눈이 빠지게 돌려봤습니다. 그중에 병석이랑 도형이가 던진 경우가 몇 경기였는지 아십니까? 그거 보다가 눈이 진짜 빠진 게 아닌 이상 그걸 못 알아보면 안 되죠.”
“그래, 나도 당시에는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워크에씩과 멘탈에 관한 지수의 말이 옳았어.”
“병석이도 열심히 하던 애였습니다. 마운드에선 배짱도 있고요.”
불퉁한 경효의 말에 스카우트 팀장이 웃었다.
“지수가 그랬잖나. 병석이는 자기애가 부족하다고. 녀석이 열심히 하는 건 워크에씩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말이야. 그때는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는데 오늘 경기를 보니 확실히 알겠구만.”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넷.
마운드의 김병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2회. 지금까지 투구 수 57개.
그의 얼굴에 사나운 표정이 감돌았다.
볼넷을 남발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평범한 타구를 받아주지 못한 야수들에 대한 원망이 드러나는 얼굴이다. 하지만 모두 속임수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한 감정은 분노가 아닌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고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병석이 던지는 공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기껏해야 한두 명? 당시의 병석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어른의 입장에서 경기를 진행했었다.
2군의 무대는 그보다 조금 무서웠지만 그래도 해볼 만했다.
하지만 지금 프로의 1군 무대는 달랐다. 타석에 서는 타자 가운데 어린아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타석에 서는 타자들 하나하나가 모두 당장이라도 자신의 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러 담장을 넘길 것 같다는 두려움이 그를 감쌌다.
자신의 공을 믿지 못하고 타자를 두려워하는 투수가 존에 공을 집어넣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컨트롤도 제대로 되지 않는 투수가 커맨드를 추구했다.
-뻐엉!!
결과는 경기 다섯 번째 볼넷. 밀어내기 볼넷이었다.
2:0
1사 만루.
덕아웃이 움직였다.
1이닝 63투구 수. 2피안타 5볼넷 3삼진 2실점 2자책.
김병석의 데뷔전이 처참하게 끝났다.
하지만 애송이 선발의 데뷔전이 끝났다고 경기가 끝나지는 않는다. 피닉스의 불펜 김민우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올해 24살이 되는 김민우는 이제 막 전성기를 열어 재끼는 젊은 투수였다. 비록 김병석처럼 계약금만 3억에 150짜리 공을 뻥뻥 던지는 1라운드 출신은 아니었지만, 프로에 입단한 이후 꾸준히 성장했다. 그는 내년 시즌, 장진철을 제치고 팀의 5선발이 가장 유력한 투수다.
-딱!!
물론 그렇다고 해서 1사 만루를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2회 2점의 추가점이 더해졌다.
4:0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김병석이라는 애송이 녀석. 멘탈이 형편없더군. 미국이었다면 싱글A에서 한 2~3년은 헤맬 종류의 인간이야.
‘그래도 150을 던지는 좌완이잖아요. 어디서 이상한 놈팡이 만나서 폼이 완전히 망가지지만 않는다면 KBO에서는 그럭저럭 던질 수 있을 겁니다.’
-이상한 놈팡이?
‘있어요. 괜히 제구력 잡아주겠다고 자기 마음대로 여기저기 무책임하게 폼 뜯어고치는 인간들. 그러다가 안 되면 선수만 좆되는 거죠.’
-프로선수의 폼을 자기 마음대로 고친다고? 아니, 그 이전에 그런 짓을 쿨하게 받아들인다고? 프로가?
‘드래프트 1라운드고 뭐고 커리어 짱짱한 팀 선배가 은퇴해서 코치하고 있는데 팀에 선배들은 죄다 그 코치 후배고, 말을 어떻게 안 듣습니까.’
본래의 필 니크로였다면 성민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린스에서 몇 달을 지내며 봤던 것들이 있다. 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랬었냐?
‘제가 그랬겠습니까? 그냥 보는 곳에서는 예 예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했죠.’
-하기사.
‘뭐, 그 덕분에 망하긴 했었지만요.’
-받아들여야 하는 조언까지 다 걸렀나 보군.
‘어느 게 옳은 조언이고, 어느 게 아닌지 구분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라고요. 나이를 먹으면서 몸은 조금씩 달라지고, 경험도 달라지는데 폼을 똑같게 유지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고. 하여간 힘들었습니다.’
-꾸준히 폼을 점검하는 일은 절대로 자기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지. 아무리 위대한 현역 투수라도 옆에 믿을만한 트레이너를 둬야 하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믿을만한 트레이너님.’
필은 콧대를 세웠고 경기는 계속됐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뚜렷한 사계절이라는 말은 이미 40년 전 교과서에나 나오는 2032년의 대한민국. 9월 초임에도 여전히 낮 최고 30도를 오가는 더위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민의 공은 여전히 강력했다.
김병석의 공처럼 150을 넘나드는 구속은 아니었지만, 140중반의 속구와 평균 45km/h 차이가 나는 너클볼의 조합은 타자들의 타이밍을 완전히 흐트러트렸다.
하물며 오늘 성민의 상대는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헛스윙 삼진. 피닉스, 도통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 OPS 기준 리그에서 가장 낮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대전 피닉스의 타선이었다. 그나마 부진한 와중에도 리그 수위권의 OPS를 보여주는 박도명조차도 성민을 상대로 제대로 된 타격을 보여주지 못했다.
5회까지 그들의 출루는 오직 어처구니없었던 김호섭의 실책과 행운의 안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6회 초.
장진철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점수는 이미 7:0
하지만 승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KBO의 예능팀들이라면 6회 7점 차 정도는 얼마든지 뒤집혀줄 수 있다. 무엇보다 진철에게는 오늘 경기의 승패도 승패지만 불안하다 못해 훅하고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입지를 다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미 내년 시즌 선발 자리가 날아간 것이 거의 확정적인 상황이지만, 그가 쌓아왔던 커리어를, 그리고 그가 받는 고액의 연봉을 생각한다면, 남은 기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136km/h의 속구가 존을 공략했다.
타석에 선 타자는 현정현. 그의 방망이가 침착하게 장진철의 공을 받아쳤다.
-딱!!
우측 방면으로 크게 휘어나가는 큼지막한 타구가 파울 폴대를 넘어갔다.
[살짝 빗맞은 타구!! 현정현 선수. 정말 파워 하나는 무시무시합니다.]
[투수 입장에서 타석에 저렇게 제대로 맞으면 무조건 큰 게 될 것 같은 선수가 들어오면 참 무섭죠.]
장진철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공.
‘그래, 성민이 말처럼 구속이 떨어졌으면 더 날카로운 제구로 승부하면 되는 거야. 나 장진철이잖아. 장진철.’
몸쪽 높은 코스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아슬아슬한 속구. 장진철이 어지간히 제구력에 자신 있는 투수가 아니라면 함부로 던지지 못하는 공을 뿌렸다.
분명 장진철은 제구가 괜찮은 투수였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자신이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공을 꽂아 넣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그런 게 되는 투수라면 그는 아무리 130 중반까지 구속이 떨어졌다고 해도 5점대 투수일 이유가 없었다.
타격을 준비하던 현정현이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돌렸다.
-뻐엉!!
진철의 공이 머리와 불과 주먹 두 개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는 곳을 지나갔다. 현정현의 입에서 순간 욕설이 튀어나왔다. 마운드의 진철이 인상을 썼다. 빈볼성 공이 되긴 했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라면 그럴 수 있다. 게다가 애초에 그가 현정현보다 3년이나 선배다.
현정현이 참았다.
후배에게 꼰대질하려면 선배 짬 대우 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직전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으로 타자를 위축시켰다. 장진철의 특기는 크게 휘어 들어오는 슬라이더. 보통 슬라이더는 존 안으로 들어오는 척하다가 빠져나가는 공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몸쪽에 딱 붙었다가 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장진철이 세 번째 공을 던졌다.
아마 타석에 선 타자가 조금만 더 어린 타자였다면 그의 생각이 맞아떨어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정현 역시 10년 이상 KBO에서 뛰어온 노련한 타자였다. 장진철의 특기가 슬라이더라는 것 정도는 빤히 알고 있다.
피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공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것이 불행이었다.
장진철은 분명 몸쪽으로 딱 붙었다가 존으로 빨려 들어가는 슬라이더를 노렸다. 하지만 공이 제대로 휘지 않았다. 게다가 더 큰 불행은 공이 생각보다 훨씬 밖으로 빠졌다는 점이었다.
-퍽!!
현정현의 엉덩이에 장진철의 128km/h짜리 공이 명중했다.
140을 넘는 공들이 가득한 프로였기에 128의 공이 빠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140짜리 공보다는 조금 덜 아파도 128짜리 공 역시 맞으면 피멍 들게 아픈 것은 마찬가지다.
현정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진철을 노려봤다.
마운드의 장진철이 네가 그렇게 보면 어쩔 건 데라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 쏘아본다. 아무 일 없이 엉덩이에 빈볼을 맞았다면 그냥 실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직전 머리를 스치는 공으로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있던 현정현이다.
그가 방망이를 집어 던지고 마운드로 뛰어나갔다.
벤치 클리어링이 시작됐다.
‘아이, 씨. 더운데 귀찮게.’
이미 5이닝을 던진 성민이었다.
뭐 특별히 감정 격해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대충 봐도 욕심내다가 실투를 던진 정도인데 굳이 이걸 드잡이질하다니. 성민이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조심하자. 벤치 클리어링 때 자리에서 안 나가는 건 팀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그래도 선발이라면 조금은 몸을 사려도 이해할 거다.
필 니크로가 충고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마린스에서 성민과 함께했었지만, KBO의 벤치 클리어링을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온 충고였다.
성민이 대답 대신 웃었다.
굳이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았다. 멱살을 잡고 드잡이질을 하는 현정현과 장진철을 붙잡는 선수들의 뒤편에 슬쩍 다가갔다.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성민아.”
성민의 중학교 동창이자 피닉스의 불펜투수인 김수현이 성민에게 말을 걸었다.
“어, 김수현. 밥은 먹었냐?”
“점심이야 당연히 먹었지. 근데 이거 지금 무슨 일이냐?”
성민이 김수현에게 다가가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김수현이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험악한 인상과 달리 성민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상냥했다.
“못 봤어?”
“어, 불펜에서 몸 풀고 있느라고. 근데 갑자기 왜 붙어서 인상은 쓰고 난리야.”
“요즘 어딜 가건 나 찍는 카메라 한, 두 대는 있다고 봐야 돼. 괜히 구설수 오를 수 있으니까 너도 얼른 인상 써.”
성민의 이야기에 김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인상을 쓴 채로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깝게 다가간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철이 형이 정현이 형 엉덩이에 뽈 던졌어.”
“뭐야? 고작 그걸로 저러는 거야?”
“아니, 근데 문제는 그전에 헤드 샷 나올 뻔했는데 또 던졌거든.”
“아, 그래? 그러면 화날 만도 하지. 진철 형도 조심 좀 하지 왜 그랬대?”
성민이 답했다.
“그냥 요즘 저 형 좀 급하잖냐.”
“하긴 그건 그렇지. 그보다 이렇게 얼굴 보는 것도 오래간만인데 저녁에 곱창이나 한판 때릴까?”
“곱창? 날도 더워서 뭐 구워 먹는 곳은 좀 그런데?”
“그런가? 아, 부산 원정이었으면 냉채족발 먹으면 딱인데. 좀 아쉽네.”
멱살을 쥐고 소리를 질러대는 마운드 옆에서 성민과 수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저녁 메뉴를 의논했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 벤치 클리어링이라고?
그 평화로운 벤치 클리어링의 현장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은 오직 필 니크로 뿐이었다.
< 벤치클리어링(ver. KBO)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