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58화 (59/287)

< 가능성의 결과 >

프로에 오는 선수라면 누구나 아마추어 시절 날고 기었던 선수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최소한 중학교 시절이건, 고등학교 시절이건 팀에서 기둥 역할 정도는 해본 녀석들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1라운드, 특히 당해 고교 최대어 소리를 들었던 녀석들은 조금 더 특별하다. 김병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2031년 드래프트 전체 2순위.

좌완으로 최고 149.4km/h를 던지던 유망주. 프로에 와서 몸을 키운 이후로는 구속이 더 늘어나 152.1km/h까지 기록했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구속은 오늘 경기 1회부터 빛을 발했다.

-뻐엉!!

148.4km/h

하지만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마운드에 선 병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봐라. 꼭 우리 성민이 10년 전 모습 보는 것 같네.”

“그럴 리가요. 제 기억에 저는 마운드에 설 때부터 펄펄 날아다녔습니다. 제가 고졸 1년 차 신인왕 출신입니다.”

“그래, 너 고졸 1년 차 신인왕. 그리고 내가 너 신인왕 할 때 포수 골든글러브. 기억 안 나냐? 너 데뷔전? 내가 1회에 마운드 올라갔던 거? 그거 자료실 가보면 아직 영상 자료가 있을 텐데?”

“아, 그 제가 어깨가 좀 덜 풀려서 선배가 올라와서 제 어깨 풀어주셨던 거 말씀하시는거죠? 이제 기억이 나려고 하네.”

“어깨 덜 풀린 소리 하고 있네. 완전 쫄아 가지고 덜덜덜. 내가 그냥 무시하고 복판에 던지라고 하고 내려왔는데 코너윅 쩔게 던져놓고 ‘선배님 말씀대로 복판에 던졌던 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랬어? 안 그랬어.”

성민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아이, 참. 제가 진짜 그랬겠습니까. 그냥 분위기 띄우려고 그런 거죠.”

“진짜?”

“선배!! 저 오늘 선발입니다. 선발. 정신을 집중해서 피칭을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말 걸지 말고 저리 가세요.”

“지가 언제부터 선발인 날에 집중을 했다고.”

“오늘부터 합니다. 오늘부터.”

태경이 귀를 쫑긋 세운 다른 애송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봐라. 지금 저기 저 마운드에 선 녀석은 10년 전의 우리 에이스랑 비슷하다. 대단한 재능이지.”

“거, 나랑은 완전 다르다니까 그러네.”

성민이 투덜댔다.

“병석이 저 새끼, 내가 3학년 때 비리비리해서 나한테 홈런 2방이나 맞고, 투수한테 홈런 두 방 맞았다고 울던 놈인데.”

진섭이 나지막하게 투덜댔다.

태경이 말을 이어갔다.

“근데 말이다. 솔직히 내가 2032년의 김성민이 상대 투수라면 좀 무서울 것같은데, 2022년의 김성민이라면 글쎄다. 심지어 그때의 김성민한테는 박태경이라는 골든글러브까지 받은 쩔어주는 포수가 붙어 있었는데, 김병석이한테는 박태경이 없는 것 같다?”

“선배, 저 2022년 신인왕이었다니까요? 마린스 50년 역사에 단 두 명뿐인 신인왕. 2006년 이후 16년 만에 신인 10승 투수.”

태경이 또 다시 성민의 말을 무시했다.

“우리 마운드에는 저 김병석이라는 녀석이 1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고 모든 가능성을 다 터트려야 간신히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놈이 선발로 올라간다. 그리고 저쪽 마운드에는 10년 전에 비리비리하던 김성민 비스무리한 어떤 놈이 선발로 올라가지. 자 오늘 경기 어떻게 해야겠냐?”

덕아웃의 선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이걸 이야기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분위기 상으로는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성민의 눈치가 보인다. 물론 태경이 더 선배이기는 하지만 최근 폼으로 따지면 성민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리고 치열한 눈치 속에서 이진섭이 홀로 크게 소리쳤다.

“이겨야 합니다!!”

태경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성민 역시 진섭을 향해 엄지를 치켜 들었다.

“그래, 이겨야지. 창단 50년 동안 정규 시즌 우승이 한 번도 없는 거 난 너무 쪽팔린다. 거기다가 내가 원클럽맨으로 은퇴할 예정인데 우승 반지 하나 없는 건 더 쪽팔릴 것 같거든. 그러니까 이기자. 앞으로 계속 이기자. 알겠냐?”

진섭의 외침에 성민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제 딱히 꺼려질 것도 없다. 이번에는 선수들이 입을 모아 답했다.

“네!!”

한편, 덕아웃 저편에 서 있던 강 용구 수석 코치의 입이 댓발로 튀어나왔다.

‘저 샹노무 새끼. 원클럽맨으로 은퇴했는데 우승 반지 하나 없는 게 쪽팔려? 지금 나 저격한 건가?’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녀석도 말을 잘한단 말이지. 애들 사기 올라간 게 보이는 군.

‘저게 지금 사기만 올리려고 한 소리 같습니까?’

-응? 그러면 뭔데?

‘뺨치고, 어르고 달래고 우쭈쭈 해준 거잖아요. 누굴 애로 아나.’

-무슨 소리야?

‘요새 제가 좀 잘 나가잖습니까. 거기다가 오늘 태경 선배 등판도 없고요. 신참도 들어오고 했으니 그냥 마운팅한 겁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요.’

-마운팅?

‘네, 뭐 저도 잘못하긴 했죠. 그래도 한참 선배에 지금까지 해준 게 있는데, 알아서 좀 기는 모습을 보여줘서 서열 정리 좀 해줘야 했는데 말이죠.’

어차피 이번 시즌을 끝으로 미국으로 떠날 생각이라 좀 소홀했다.

하지만 박태경 입장에서는 불안했을 수 있다. 성민이 떠날 확률이 높다고 하지만 그거야 박태경 입장에서는 모를 일이었으니까.

‘뭐, 태경 형도 이제 대충 눈치챘을 겁니다. 내가 그냥 미처 신경을 못 썼던 거고,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걸요.’

-허, 그 대화 속에서 그런 서브 텍스트가 오고 갔다고? 니들은 대체 왜 야구를 하는 거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연히 제일 잘하는 게 야구니까 야구 하는 거죠.’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야.

필 니크로의 한탄 속에 경기가 계속됐다.

김병석은 좋은 재능을 지닌 투수였다. 2군에서 1년 동안 담금질을 하며 실력 역시 상승했다. 최고 152를 던지는 좌완은 KBO에서는 사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늘 경기.

그 사기성은 좀처럼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쟤 컨트롤이 구려.”

컨트롤, 그리고 커맨드. 한국에서는 제구력이라고 퉁을 치지만 사실 이 두 단어는 완전히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존에 공을 집어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구분하는 것은 컨트롤. 그리고 존안에서 원하는 곳에 공을 넣을 능력이 있느냐가 커맨드다.

최고 152를 던지는 좌완 투수라면 커맨드가 부족해도 KBO에서 충분히 통한다. 하지만 컨트롤이 부족하다면 이야기는 달라 진다.

마린스의 타자들이 김병석의 공을 끈질기게 지켜봤다.

-딱!!

적당히 오는 공이 파울로 연결되기도 했다.

볼넷만 무려 두 개.

31구.

“아!!!! 박동엽 이 씹새끼가?”

“투수가 저렇게 흔들리는데 시발 병살? 병사알? 니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6번 타자인 동엽이 깔끔한 병살타로 이닝을 끝냈다.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욕설이 펜스를 뚫고 동엽의 귀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설에도 동엽의 얼굴이 담담했다. 욕먹고 울상 짓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여전히 기분 나쁘고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얼굴에 덤덤한 표정을 떠올릴 만큼은 적응됐다.

현정현이 동엽의 등을 두들겼다.

“아쉽더라. 타구 좋았는데 말이야.”

“거의 복판으로 오는 실투성 공이었는데 구위가 너무 좋았어요.”

“알아. 컨트롤이 문제지 구위 하나는 살아 있더라. 저거 영점만 좀 잡히면 나중엔 까다로운 투수가 될 수도 있겠어.”

“그래도 저만큼은 아니죠.”

좀 전의 비교 때문일까? 동엽의 시선이 글러브를 쥐고 마운드로 오르는 성민에게 향했다. 현정현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저게 내가 더러운 꼴 잔뜩 보면서도, 그래도 마린스로 오길 잘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다.”

그들이 서둘러 글러브를 챙겨 들고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마운드의 성민이 등을 돌려 전광판을 바라봤다.

1:0

-흐음, 나 이러다가 메이저로 가면 적응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점수라는 게 원래 많이 나면 많이 날수록 좋아야 하는 거잖아.

‘그렇죠.’

-근데 요즘 이상하게 1회에 딱 1점만 나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 한 4점 5점 나잖아? 그러면 막 기분이 이상하고, 없는 심장도 쿵쿵대는 것 같아.

그의 과장된 이야기에 성민이 피식 웃었다.

덕아웃에서 있었던 복잡한 인간관계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지워졌다. 남은 것은 오직 공, 글러브, 그리고 공을 기다리는 포수의 미트와 그가 상대할 타자들의 데이터뿐이었다.

선두타자를 상대로 초구 땅볼 아웃.

[김성민 선수의 노련한 땅볼 유도. 시즌 초반에는 많이 흔들리던 박동엽 선수도 이제는 상당히 단단한 모습입니다.]

[뭐, 단단하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어이없는 실책을 보여줄 때도 있긴 합니다만, 확실히 시즌 초와 비교하면 조금은 안정적인 모습이긴 합니다.]

[원체 툴 자체는 좋은 선수니까요. 아직 나이도 젊고 심지어 군대도 다녀왔으니 이대로만 성장해준다면 마린스는 앞으로 10년 정도 유격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해설위원의 이야기에 뿔을 냈다.

-뭐야, 저 새끼 박동엽한테 돈 받았나? 바로 직전에 그 어처구니 없는 병살 보고도 저런 이야기가 나와?-

-근데 솔직히 시즌 초랑 비교하면 수비는 많이 좋아진 거 맞음. 지금 박동엽 유격수 중에서 실책 3위임.-

-궁금한 게 3위가 많은 순서인거냐. 아니면 적은 순서인거냐?-

-초반에 적립한 게 몇 갠데 설마 적은 순서겠냐?-

-그러면 팀이 10개인데 그중 3위면 존나 못 하는 거잖아.-

-초반에 압도적으로 1위 할 기세였는데 3위까지 내려간 거잖아. 하반기에는 잘하고 있다는 의미지.-

-시발 됐고. 난 저 새끼 어처구니없는 선풍기 질이나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이어지는 두 번째 타자를 상대로 공 4개 만에 내야 뜬공 아웃.

가볍게 공을 잡아낸 성민이 세 번째 타자를 기다렸다.

[제가 요즘 김성민 선수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겁니다만, 정말 이 선수는 뭐랄까. 급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아예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고있어요.]

[김 위원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실제로 급이 다른 거 맞고요. 숫자만 봐도 압도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전 김성민 선수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FA자격을 얻는 게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이렇게 아예 수준이 다른 선수는 같은 리그에 오래 있는 게, 선수 본인에게나 다른 선수들에게나 좋을 게 없어요. 바로바로 상위리그로 올라가 줘야 합니다.]

[어, 이거 마린스 팬들이 듣는다면 조금 화가 날 이야기 같은데요?]

[아니죠. 솔직히 이건 마린스 팬들도 이해할 겁니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워할걸요? 마린스가 낳은 선수가 메이저에서 대활약한다. 크, 얼마나 멋있습니까.]

-뭐라는 거야. 저 샹노무 새끼. 성민이는 종신 마린스임.-

-근데 솔직히 현실적으로 인정은 해야지. KBO 규모로 성민이 잡아두기엔 좀 무리지.-

-난 성민이가 우리 팀 우승까지 딱 시켜주고 떠나면 인정 가능.-

-가는 길에 박동엽도 1+1으로 데려가 주면 더 인정 가능-

-메이저 가서 메이저도 터트리고 은퇴하기 전에 마린스 돌아와서 좀 더 던지다가 딱 은퇴해서 마린스 감독까지 하면 그림 나올 듯.-

-메이저가 무슨 풍선도 아니고 터트리긴 뭘 터트려. 가서 버티기만 해도 다행임.-

-하여간 어딜 가나 메뽕 놈들은 빠지지를 않지. 무패에 0.82찍는 투수다.-

-가서 다나카 마사히로 NPB 마지막 해 성적이랑 알동가서 쥐어터진 성적이나 좀 보고 오시죠.-

마운드의 성민이 세 번째 타자를 가볍게 삼진으로 잡아내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담담한 태도였다.

“존나 멋있어.”

덕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진섭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경기 전 있었던 태경의 연설은 거진 대부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김병석 같은 새끼가 10년 동안 로또 1등 한 세 번쯤 당첨될 확률로 포텐셜 터트려도 김성민처럼 될까 말까 하다는, 박태경의 이야기를 반쯤 자기 멋대로 변환시킨 이야기 뿐이었다.

경기가 계속됐다.

< 가능성의 결과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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