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57화 (58/287)

< 늙은 투수 >

목요일, 때아닌 폭우로 경기가 취소됐다.

덕분에 선수들은 급박한 일정 가운데 하루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다음 날 경기에 대비해서 조금 일찍 대전으로 이동한 오후.

성민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이 형이 웬일이지?”

-누구야?

“진철이 형이요.”

-진철?

“왜, 저번에 그 청주에서 제가 선발로 뛰었을 때 피닉스 선발 있잖아요.”

-아!! 그 시설 엉망진창이던 구장. 그 녀석이랑도 연락하는 사이야?

“네, 같이 뛴 적은 없지만, 이 바닥이 워낙에 좁아서요. 두 다리만 건너도 모르는 사람 찾기 힘들어요. 게다가 그 형 태경 선배랑 학생 때는 티격태격했다고 들었는데 원래 미운 정도 정이라고, 요즘은 꽤 친합니다. 덕분에 비시즌 때 가끔 봐요.”

-그렇군.

성민이 스마트폰을 펼쳤다.

“갑자기 뭐지?”

-왜?

“한번 보자는데요? 밥이나 먹자고.”

-아는 사이라며?

“그렇기는 한데, 보통 태경 선배가 불러서 나갔을 때 얼굴 보는 사이지, 둘만 따로 보는 사이는 또 아니거든요.”

성민의 궁금증은 싱겁게 풀렸다.

대전의 한 곱창집. 지글지글 익는 곱창을 사이에 두고 진철이 입을 열었다.

“성민아, 너 혹시 너클볼 어떻게 익혔는지 말해줄 수 있냐?”

“네? 너클볼이요? 갑자기 너클볼은 왜?”

진철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게 말이다. 차라리 내가 몸이 안 좋은 거였다면 좋겠어.”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물론 지금도 여기저기 아프기는 하지. 안 아프면 어디 그게 선수냐? 하지만 작년, 재작년이랑 비교하면 나 몸 상태 진짜 좋거든? 작년에 시즌 망치고 겨울 동안 정말 빡세게 준비했으니까. 근데 공이 안 나간다?”

진철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뭐 내가 솔직히 젊을 때도 구속이 팍팍 나오는 타입은 아니었지. 이 악물고 던지면 145까지 나오기는 했는데, 어지간하면 140 초반대에서 왔다 갔다 했었어. 그래서 난 내가 구속이 좀 떨어지더라도 충분히 롱런할 수 있는 투수라고 생각했었지.”

“······.”

“피닉스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날 영입했을 거야. 근데 140 초반대 구속이랑 130 중후반 구속은 아예 다르더라. 너도 나이 먹어보면 알 거라던 선배들 말을 이제 알겠더라고.”

“형님.”

진철이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젠장, 하여간 프로선수도 참 구려. 남들은 서른여섯이면 이제 한창 전성기인데, 우린 버틸 만큼 버틴 나이잖아? 먹고 싶은 거 참고 놀고 싶은 거 안 놀고 했는데도 여기까지라는 게 너무 비참하네. 근데 또 이런 상황에서도 소주는 못 마시겠어요. 내일 불펜으로 등판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다시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성민의 위로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오른팔 인대가 늘어날 만큼 늘어나 탄력을 잃었어. 차라리 손상을 입은 거라면 낫지. 지금 저 나이에 인대가 탄력을 잃었다는 건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데드암이다.

‘저도 압니다. 근데 지금 여기서 형님 이제 끝이시니까 은퇴하세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없잖아요. 분위기가 있는데.’

-구속 회복 같은 가망성 없는 것 말고 다른 길도 있지.

진철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차라리 몸 상태가 나빠서 구속이 안 나오는 거면 괜찮아. 그런데 그게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혹시 너클볼 어떻게 익혔는지, 혹은 누구한테 배웠는지 가르쳐줄 수 있냐? 물론 맨입으로 해달라는 건 아니야. 이번 겨울에 플로리다에서 훈련할 건데 생각 있으면 네 훈련 비용까지 대줄게.”

“하지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너 한창 힘들 때 슬라이더 그립이랑 자세 내가 잡아준 적도 있잖냐. 내가 진짜 절박해서 그런다. 좀 부탁하자. 나 야구 더 하고 싶다.”

진철이 성민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성민이 깜짝 놀라 진철을 일으켰다. 이 바닥에서 자기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후배에게 고개를 숙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형님, 말씀드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근데 진짜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그래도 좀 부탁하마.”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클볼 투수는 같은 너클볼 투수를 외면하지 않는다. 저토록 간절하게 원하는데 들어줘라. 나도 도와주마.

‘영감님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말이 안 되기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냐.

‘그나저나, 골치 아프네. 이거.’

-골치가 아프기는. 내가 도와준다니까?

성민이 필 니크로의 말을 무시한 채 진철에게 답했다.

“후, 형님. 믿기 힘드실 수도 있지만, 저 영상보고 그립 잡고, 혼자 던져서 한 거예요.”

“영상?”

“네, 저 재활한다고 병원 왔다 갔다 하고 재활 끝나고는 팀 훈련 함께 했는데 뭐 개인적으로 배울 곳이 어딨었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누군가한테 배웠으면 올해 성적 이렇게 나오는데 저 가르쳐준 사람이 가만히 있을 이유도 없죠. 어디 인터뷰라도 한 번 하죠. 이건 그냥 제가 생각보다 너클볼이 너무 잘 맞았던 거에요.”

“그렇구나.”

진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형님, 그러면 이렇게 하죠.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일단 연습장 한 번 가시죠. 가서 제가 잡는 그립대로 한 번 해보시고, 잠깐 연구도 해보면 뭔가 나오겠죠.”

“그럴까? 시간은 좀 괜찮니?”

“어차피 아직 7시밖에 안 됐잖아요. 우천 취소 아니었으면 이제 경기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시간 괜찮아요.”

“고맙다.”

인근에 은퇴한 선배가 운영한다는 연습실 마운드.

성민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립을 잡아주고 자세를 수정해줬다. 그렇게 진철이 열 개가량의 공을 던졌다.

-아니, 그러니까 거기서 중지 손가락을 조금 더 쭉 밀어줘야 한다니까.

신이 나서 떠드는 필 니크로의 잔소리를 성민이 입으로 옮겨주었다.

“진철 형, 지금은 미는 힘이 조금 약했어요. 특히 중지 쪽이요.”

“그런 사소한 게 다 보이는 거야?”

“아뇨, 뭐 던질 때 모습이 보인다기보다는, 대충 결과를 보고 과정을 짐작한달까? 형도 초짜들 슬라이더 휘어 들어가는 거 보면 대충 감이 오잖아요. 뭐 그런 거죠.”

“내가 애들 슬라이더 던지는 거 보듯 이란 말이지······.”

성민의 이야기에 진철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은 나쁘지 않아.

‘당연하죠. KBO에서 FA 2번 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에요. 저 선배도 전성기 기량만 따지면 어지간한 용병 투수들 못지않았어요. MLB에서 40인 정도는 충분히 노려볼만한 선수였다 이 말입니다.’

-몇 년만 매진한다면 KBO에서는 충분히 통할만 하겠어.

‘그러니까 글러 먹었다는 겁니다.’

성민이 진철에게 말했다.

“근데 형님, 제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만약 형님이 완전 끝이라면 마지막 동아줄로 너클볼 잡아보는 거 안 말립니다. 하지만 그거 아니잖아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지.”

“저야 너클볼이 너무 잘 맞았던 거고요. 방금 보셨잖아요. 형님 10개 던져서 너클볼 비슷한 거 하나도 없던 거.”

“그야 이제 막 처음 그립을 잡아본 거니까. 당연한 일이지.”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변화구가 어디 공 휘는 게 어렵습니까? 그 휘어진 공, 제대로 던지는 게 어려운 거죠. 근데 형님은 지금 변화구로 치면 공 휘는 것도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형님, 형님도 솔직히 아시잖습니까. 그냥 저한테 너클볼은 형님한테 슬라이더 같았던 겁니다.”

“성민아.”

“FA 아직 2년 남으셨죠. 지금부터 너클볼 익히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게다가 저 너클볼 익히고 슬라이더 완전히 조졌습니다. 형님도 잘 아시잖아요. 형님 아직 경쟁력 있는 거. 근데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 때문에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무기를 조진다? 형님. 전 이거 도저히 못 권하겠습니다.”

서른여섯 살.

조금 늦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직군이라면 새롭게 도전해볼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프로 야구 선수는 아니다. 프로 야구 선수의 서른여섯은 맺음말을 지어야 하는 시기이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하물며 숙련되기까지 최소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 너클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당장 갑갑하신 거 이해합니다. 근데 전 애초에 속구가 좋았던 거지, 슬라이더 같은 변화구는 형님처럼 찰떡같이 맞는 놈이 없었잖아요. 근데 그게 우연히 너클볼이었던 것뿐입니다. 지금 제 성적이요? 애초에 150 던지는 놈이 찰떡같은 변화구 하나 익혀서 나온 성적이에요. 형님 전성기에 슬라이더처럼요.”

“그런 거냐?”

“저도 형님한테 슬라이더 그립 배웠는데 결국 형님처럼은 못 던졌잖아요. 그런 겁니다. 형님, 구속 좀 떨어졌으면 어떻습니까. 그때 형님이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좋은 투수는 빠른 공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타자의 방망이를 헛돌게 하는 사람이라고. 형님 아직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까?”

“당연하죠!!”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

“좆될뻔했네.”

-뭐가?

“진철 선배요. 잘못하면 도와주고 욕 쳐먹을 뻔 했잖아요. 뭐, 사실 쌩판 남이면 욕하건 말건 상관없는데 태경 선배랑 친한 사람이라 더 난감했어요.”

-욕?

필 니크로의 질문에 성민이 답했다.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어요. 아시잖아요. 너클볼 입문하려면 걸리는 시간. 그리고 저 선배에게 남은 시간. 뭐 무명의 선수가 마지막 발악을 해보는 거라면 괜찮죠. 근데 저 선배는 그게 아니잖아요. 이미 쌓아 올린 것도 많고, 좋은 추억도 많아요. 유종의 미를 거둘 타이밍이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본인의 의사지. 더 뛰고 싶다고 하잖아.

“맞습니다. 근데 저 선배의 ‘더 뛰고 싶다.’는 하다가 안 되면 대만 가고, 대만에서도 안 되면 호주라도 가서 뛰고 싶다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KBO에서 사랑받으면서 뛰던 것처럼 계속 뛰고 싶다의 뛰고 싶다죠.”

-그건 또 무슨······.

“당장은 뭐 너클볼 알려주면 고맙다고 그러겠죠. 그런데 그거 연습하다가 오히려 성적 더 안 나오잖아요? 백 프로 저 원망합니다. 그렇다고 거절한다? 그러면 또 그것대로 절 원망하겠죠. 이건 진짜 외통수였는데 잘 빠져나온 겁니다.”

-속 좁은 녀석이로군.

성민이 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 형이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사람이 원래 다 그런 겁니다. 게다가 애당초 지금 저 형은 너클볼이 배우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FA인데 욕먹는 상황이 싫은 거예요. 좋게좋게 말로 포기시키는 게 정답이었습니다.”

-근데 애초에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면, 대체 왜 공을 던지러 간 거냐? 의외로 소질이 있었다면 어쩌려고? 만약 시키자마자 너클볼이 그럴싸하게 던졌다면 거절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방법은 많죠. 어차피 평가하는 게 전데요. ‘한 번 던졌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원할 때마다 너클볼을 던질 수 있는 안정성, 제구력, 구속이 필요하다.’ 솔직히 트집 잡을 건 널렸습니다. 중요한 건 직접 던져보고 포기한다는 과정이죠.”

필 니크로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동시에 아쉬워했다.

그가 이 세계에 남긴 유일한 미련.

너클볼.

이렇게라도 너클볼 투수를 늘릴 기회가 날아간 것 때문이었다.

물론 성민 역시 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물론 영감님이 너클볼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에요. 그냥 저만 믿고 가만히 계시면 투수들이 너도나도 너클볼 투수를 꿈꾸는 날이 올 겁니다.”

성민이 호언장담을 했다. 솔직히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모습 때문일까? 필 니크로는 왠지 성민의 말이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라면 어쩌면 해낼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신뢰.

근데 잠깐만?

그 이해 못 할 기묘한 신뢰 속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싹텄다. 필 니크로가 그 의문을 참지 않고 내뱉었다.

-근데 성민아, 잠깐만. 이거 혹시 나도 낚이고 있는 거 아니지?

성민이 대답 대신 크게 웃었다.

-야, 야. 김성민.

대전 피닉스 파크.

21살의 젊은 투수 김병석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생애 첫 1군 등판이었다.

< 늙은 투수 > 끝

ⓒ 묘엽

작가의 말

경자년 새해가 밝았네요.

다들 떡국이랑 전은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해는 하시는 일 모두 잘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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